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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08화 (208/232)

208화

“…….”

떨리는 손으로 빠르게 찻물을 해치우고 침착하게 물었다.

“그 용이 혹시 아기 용사님과 씩씩한 왕녀님에 나오는 그 용은 아니겠지요?”

“음.”

칼릭스는 묘한 얼굴로 말을 끌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추측했다기보다는 그 용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칼릭스가 왜냐고 물었다.

나는 참담하게 대꾸했다.

“교황이 그 용의 힘을 구현하려고 애가 끓었잖아요. 제 몸속에 용의 피가 묻은 활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활을 빼내기 위해 저를 대상으로 온갖 실험을 자행하지 않겠습니까…….”

교황에게 안 잡힐 자신은 없단 말이다.

“괜찮아.”

한껏 침통해져 있는데, 칼릭스가 다정하게 말했다.

“공녀가 필요로 할 때 활은 나타날 테니까.”

힘이 쪽 빠진 통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휘청 움직이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 질문은 피가 용의 것이라고 했을 때 해야 했던 거 아니야?”

같이 고개를 기울인 칼릭스가 되물었다.

“칼릭스는 저를 속이지 않을 테니 활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습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몸에서 꺼내는 건 제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보니…….”

또 심각해져 말하는 것도 잊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사위가 고요해졌다.

상념을 끊으며 눈을 깜빡이자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닿았다.

“거짓말만 하지 않을 뿐이라면.”

칼릭스가 색깔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중요하지 않아?”

“비밀이라면 저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마 나를 따라오기 힘들 거다.

칼릭스가 익숙한 얼굴로 웃었다.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는 손길이 어쩐지 아주 오랜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겨뤄 보는 건 어때, 샤를리즈. 누구의 비밀이 더 만만치 않은지.”

그때 내 눈에 ‘상품은 걸지 않고요?’라는 기색이 절대로 없었으리라고는 슬프게도 확신할 수 없다…….

“보상은, 음.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어때?”

“승자를 축하하며 수여하는 겁니까, 패자를 위로하며 주는 겁니까?”

“글쎄……. 이것도 그때 생각해 보자.”

그러곤 입술을 내 귀에 밀착시켜 속삭였다.

“생각할 시간은 많잖아.”

그야말로 염원을 이루기 직전 사망한다는 플래그가 꽂힐 법한 발언이었으나 나는 담대하게 넘어갔다.

세상도 미처 듣지 못했을 테니까.

내게만 들릴 만큼 아주 작은 크기였다.

* * *

비슷한 시각. 신전.

“문제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는 떳떳하지 않습니까!”

“근거도 없는 낭설이 얼마나 가겠어요.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이지 맙시다.”

“그 흉문이 세간에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대응을 해야 해요!”

젠체하던 인간들은 어디로 가고 모두 바락바락 소리를 높이는지. 겉으로는 온유한 얼굴을 한 채 속으로 조소를 날린 라우드가 입을 뗐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교황 성하.”

“성하께서는 이 사태를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지난 세월 신전은 숱한 오명에 시달렸어요.”

퍽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라우드가 말을 이어 갔다.

“때로는 침묵했고, 때로는 대응했지만 흐름은 늘 같았습니다. 이미 시작된 불길을 잡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발화점을 찾아 불을 끄는 것이지요.”

“그 말씀은…….”

“공식적으로 반박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전이 관여되어 있지 않다고 증좌를 내밀어야 할 테죠.”

“가만히 있는 신전에 오명을 씌운 것은 황제이건만 어째서 우리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단 말입니까.”

한 대신관이 푸르르 수염을 떨었다.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대신관들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불쾌함이 가득했다.

‘이 일이 나쁘게 돌아가기만 하는 건 아니군.’

하지만 그건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니 특별히 도움이 되었다고 넘길 수는 없었다.

라우드가 싸늘하게 생각했다.

신전을 의심하는 눈이 많아진다. 그 말은 곧 신전을 대표하는 격인 교황에 대한 믿음이 옅어진다는 뜻이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그의 신성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런 소란이 지금 발생한 것은, 우연이라고 여길 수 없겠지.’

황제가 태세를 전환한 기점은 확실했다.

썩 비밀스럽게 독대 자리를 마련한 황제였으나, 라우드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독대 상대를 알아챘다.

유르겐 리닉스를 은밀히 납치하는 데는 대략 두어 시간이 소요됐다.

[모, 모릅니, 커헉!]

[황제의 생각을 환기시키기만 하라고……. 더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독대 자리에서 나눈 내용을 파악하기까지 또 이십여 분가량.

제거는 수 초에 불과했다.

입 끝만 올리고 있을 뿐 무기질적이던 눈동자에 날 선 웃음기가 번졌다.

* * *

신전이 전면 대응에 나선다고 한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고 있다고는 하나 모두가 쉬쉬하던 소문을 양지에서 반박하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도 밝힐 예정이란다.

―는 이야기를 이미 다 퍼진 지금 신수에게 듣고 있다.

기껏 찾아와 줬는데 수도에 모르는 사람 없을 거라고 말하려니 나쁜 놈 되는 기분이라 “그렇다고 합니까?” 하고 미간을 한껏 좁히자 신수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러니까 너도 대응해야 하지 않겠냐!”

“예.”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물었다.

“신수님의 심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건 왜?”

초콜릿 쿠키를 와작와작 씹은 신수가 찻물을 들이켰다.

“그럼 그거 계속 신전 수중에 둘 거예요?”

“아니지!”

관심 없는 듯하던 신수가 호기롭게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저번에 교황이 신성력을 담고 만져서 위치를 알았다. 그런데 심장보다 신전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게 먼저 아니더냐? 하나씩 차근차근해라. 그게 좋겠다.”

신전에 심장을 맡긴 게 아니라 간을 맡겼는지 신수는 태평하게 말했다.

쿠키를 하나 슥 집어 들며 나는 되물었다.

“신전의 위상과 평판이 바닥을 찍는다면 황실을 뒤집어 놓길 원하는 교황이 어떤 수를 쓸 것 같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더러운 수를 쓰겠지.”

“신수가 더는 제국을 수호하지 않는다고 표명하고 그것이 무고한 신전을 섣부르게 공격한 황제의 실책 탓이라고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딱 맞춰 떨어진 결정적인 증거들은 모두 조작된 게 아니겠냐고 사람들은 수군대겠죠.”

“……맞다. 심장을 부수면 나는 죽는다.”

허망하게 중얼거린 신수가 쿠키를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텅 빈 손에 쿠키 하나를 꽂아 주고 다시 말했다.

“신수를 제물로 삼을 생각도 했던 놈이니 뭔들 못 하겠습니까.”

“하나씩 차근차근하고 있구나!”

빠르게 태세 전환을 마친 신수가 나를 치켜세웠다.

“대책 없는 아이인 줄 알았더니 아주 영특해!”

저 정도 치하에 내 어깨는 솟아오르지 않는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하겠느냐? 위치만 알 뿐이야. 아주 꼭꼭 숨겨 두었을 게다. 그것도 모자라 사병들도 득실거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심장은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너무 뛰어나도 문제라며 신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진지하게 공감하는 바다.

사샤가 그렇기 때문이다. 만일 사샤에게 신성력이 없었다면 교황의 속셈을 눈치챘을 때 다 같이 망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교황의 발을 잡아 두고 신전의 행보에 세간의 이목도 집중시켰으니 생각만큼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러자 신수가 다시 중얼거렸다.

“너는 생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내 심장을 몇 겹의 기사들로 수호하고 있더라도 포기하면 안 된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래. 나는 네가 도리를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

내 도리는 인성처럼 탈부착이다.

유르겐을 그대로 둔다면 그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훤히 짐작했으면서도 손을 쓰지 않았다.

“이건 칭찬으로 듣지 않겠습니다.”

“왜! 이것이야말로 칭찬인데!”

* * *

모든 일은 전화위복이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복이 온다.

이번에는 그 복이 불운과 등을 맞대고 있었다.

[수고롭게 들고 다닐 필요 없는 무기를 공녀가 소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게. 우리는 사랑을 하는 거지 속박하려는 게 아니니까.]

“혹시 칼릭스도 엄청난 성물을 갖게 되었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상품으로 건 결투에도 여유롭기는 했는데 말이다.

유독 내 수명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구석이 있던 칼릭스는 달라졌다.

물론 저 말을 할 때 평소처럼 미소 짓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연인 간의 신의?”

서로가 소중한 만큼 각자 목숨 잘 붙잡고 있자는 그런 것 말이다.

황성에 며칠 붙잡힌 통에 차곡차곡 쌓인 가주 승계 수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로제타에게 눈치 없이 물어보는 대신 혼자 생각해봤는데 꽤 그럴듯했다!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바삐 옮겼다.

“준비하고 있었어요.”

챙이 넓은 모자를 야무지게 눌러쓴 사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모범적인 학생의 자세 그 자체야. 사샤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학생들의 귀감이 될 게 분명해. 그럼 오늘의 수업 장소로 바로 이동…….”

“샤, 샤를 님?”

얼른 의자 위로 올라간 사샤가 내 얼굴에 철퍽 붙은 종이를 서둘러 떼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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