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괘, 괜찮으세요?”
“으응.”
“샤를 님의 볼이 빨개졌어요.”
“보기에만 그렇지 아프진 않아.”
“정말이요?”
진짜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눈알을 보호하고자 잽싸게 눈꺼풀을 꾹 닫아서 그냥 종이에 얼굴만 맞았을 뿐이다.
“신문이에요.”
여전히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고 신문을 건네받았다.
속보!
거리에 뿌리는 한 장짜리 간이 신문이었다. 가벼운 바람에도 둥실 떠오를 무게지만 여기까지 날아오기에는 대공저 정원이 너무 넓다.
‘신수가 한 일인가 보군.’
콧잔등을 슥슥 문지르며 시선을 조금 더 내렸다.
리닉스 공작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리닉스의 유일한 직계인 유르겐 리닉스 영식이 사망했다. 하여, 황제 폐하께옵서는 치안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것을 경비대에 당부하시는 한편, 리닉스에 수여한 작위 회수를 검토하고 계신다고 한다.
“흠.”
“나쁜 소식이에요?”
“아니.”
사샤를 쑥 들어 의자에서 내려 주며 대답했다. 아이는 유순하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씩 웃었다.
“재밌는 소식이야.”
“다행이에요.”
사샤가 작은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그럼 이제 나가자.”
“네에.”
오늘의 인성 수업을 마치고 고단했는지 사샤는 금세 곤한 낮잠에 빠졌다.
옆에 같이 누워 자고 싶은 게으른 마음을 꾹 누르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신속하게 커튼을 내리고 통신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시간이 맞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기사단의 휴식 시간과 맞아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본론만 물었다.
“황제가 리닉스의 공작위를 회수하는 쪽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도 아셔?”
―기사들 사이에도 소문이 파다하니 공작 각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 고마워.”
―별말씀을요.
반짝거리던 마도구는 다시 잠잠해졌다.
고위 귀족가의 직계가 모두 사망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회수하는 일은 전례가 없다.
불가능하다기보다는 선을 지키는 것이다.
저렇게 되면 황실은 눈독 들이는 가문의 직계를 모두 제거해 재산을 꿀꺽 먹어 치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귀족들은 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신경 쓰게 될 수밖에.
“황실의 행보에 귀추를 주목시키고 있잖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안토니오 황제는 신성한 나무로 신전에 오래도록 남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리엔타의 이목을 튜베롯 독약으로부터 돌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말로 신전을 치려고 하는 거다.
‘흑마법도 거론할 심산인가.’
깨부수는 상대가 무려 신전이니 요란 법석하게 판을 키워 제 위상을 드높이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런데, 이거 교황도 눈치챘을 텐데 말이다……?”
힘없이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결국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단전에서 끌어올리듯 낮은 목소리로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이 야심만 가득한 행동파 멍청이 같으니라고.”
내가 처리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처리당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니 이 무슨 귀찮은…….
신전과 대립한 황제라는, 후대에 숱하게 화두에 오르고 평가가 갈릴 주인공이 사샤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안토니오는 조금 더 살아 있어야 했다.
에휴에휴 한숨을 뿜어내고는 바닥을 짚으며 터덜터덜 일어났다.
“내 머리를 아프게 한 값,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고 말겠다.”
작게 보이는 황성을 집요하게 노려보면서 굳세게 다짐했다.
* * *
“리닉스의 작위 회수를 검토하고 계신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내일 중으로 신문사들이 앞다투어 소식을 전할 테니 모르는 귀족들은 전무하리라고 예상합니다.”
“수고했네.”
흡족하게 웃은 안토니오가 축객을 내렸다.
‘현 교황은 다루기에 꽤 까다롭지.’
생의 목적이 오직 신을 섬기기 위함이라는 듯 경건한 분위기를 휘장처럼 두르고 있는 젊은 교황은 속내를 알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신전의 죄를 물어 교황을 바꾸면 돼. 저를 임명한 사람이 누구인데 자리를 보전하고 싶다면 새 교황은 내 말을 순순히 따를 테지.’
신전을 통해 처리할 대상이 칼릭스였다면 비록 속을 몰라도 수완은 괜찮은 라우드가 나았을 테지만 표적은 허리에나 겨우 닿는 어린애다.
사샤를 신전에 끌어들이는 것만 성공하면 끝난다.
칼릭스는 황위에 오를 명분이 없으니까.
‘교황이 내 계획을 눈치채도 상관없다. 저가 아무리 신전의 왕으로 군림한다고 해도 내 허락이 없다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마저 가능하기나 할 줄 알고.’
처음에는 리엔타 공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었지만 신전을 누르고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듯했으므로.
신전과 황실은 건국 초기부터 서로를 견제하며 각축전을 벌였다.
건국 이래 긴 세월 동안 신전이 단 한 번도 황실에 오명을 씌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니 이 결단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상황을 벗어날 타개책을 떠올린 직후의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안토니오는 자신만만했다. 타인을 궁지에 몰아넣는 악인처럼 우월감으로 고양된 미소도 지었다.
만약 샤를리즈가 보았다면 이마가 빨갛게 부풀 때까지 뻑뻑 내리치고 말았을 장관이었다.
* * *
“하온데, 성하. 그 사건과 신전이 무관하다는 증거로는 어떤 것이 있을는지요?”
“연관성을 밝히는 증거는 제출하기 쉽지만 무결을 증명하기는 이토록 어려우니…….”
대신관들이 침통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숱하게 열리는 사냥 대회에 신관을 차출하라는 요구에도 군말 없이 수용한 결과가 이것입니까?”
“성군이시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지만 이건 암군…….”
“그만.”
점차 수위가 높아져 가는 발언을 라우드가 진중한 어조로 중단시켰다.
“제국의 황제 폐하이십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다는 얼굴로 대신관이 사죄했다.
“증거를 밝혀낸다고 한들 이미 씌워진 오명을 벗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진범을 밝혀내는 수밖에요.”
“진범을 말입니까?”
“예.”
라우드가 온기 없이 모양만 그럴싸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해결할 필요 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할 가치는 없다.
한 장면이 닫히고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온 벽안은 차분했다.
몰아치는 파도도, 흐르는 유수도 없이 잔잔한 호수가 시선을 빼앗았다.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눈을 조금 더 크게 뜰까?”
“괜찮습니다.”
“응. 알겠어.”
칼릭스가 눈을 안 깜빡이고 있는데 내가 깜빡이는 비겁한 짓을 할 수는 없다.
‘한계다……!’
눈을 꾹 감고 몸을 뒤로 빼 의자에 털썩 기댔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너무 가까이에서 미래의 조각을 보고 있군.’
이래서 조각이 끝나고도 질척대게 되나 보다. 다음부터는 멀찍이서 봐야겠다고 다짐하며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섬세한 손가락이 내 눈가를 조심조심 짚었다. 다소 차가운 온도가 기꺼워 얼굴을 맡긴 채 입을 움직였다.
“교황은 이 일을 지지부진하게 끌 생각인 것 같습니다. 결론만 나지 않도록요.”
“신전은 믿음을 잃었어. 분명 교황의 신성력에도 영향이 있었겠지.”
교황의 심계를 파헤치는 것보다 내 눈이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칼릭스가 눈매를 살짝 구겼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버티지 마.”
칼릭스가 내 눈을 찌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바짝 경계했던 게 무척이나 오래전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다음에는 내가 먼저 눈을 감을게.”
“제가 알아서 끊겠습니다!”
가늠하듯 나를 바라보던 칼릭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진귀한 보물을 하사받은 사람처럼 싱글벙글하고 있는데, 칼릭스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새로운 활로를 찾아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니 신수의 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샤를리즈, 조심해.”
“예.”
내 삶에 대한 의지를 시각적으로 보여 주고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건 잠깐이었다.
“어허?”
해괴한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왜?”
“이상하네.”
혼잣말하다가 아차 하고 말했다.
“칼릭스의 존재를 잊고 있던 건 아닙니다. 그냥 조금 신기해서요.”
칼릭스는 ‘무엇이?’하고 묻지 않았다.
“거사를 도모할 때는 힘을 최대한 끌어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교황처럼 성혈을 모으느라 온갖 수작을 부렸다면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집념을 가질 테죠.”
보통은 흑마법사를 이용해 사샤와 칼릭스, 그리고 나까지 한 번에 제물로 세우겠다고 의지를 활활 불태웠을 거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있어요. 꼭 힘이 이만큼만 필요하다고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에요.”
그 순간, 벼락처럼 생각이 꽂히고 머릿속에 섬광이 번졌다.
교황이 하고자 하는 일이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면.
시간을 돌린 흔적보다 눈에 띄기 쉬운 것.
“……칼릭스. 혹시, 그 동화책의 첫 편이 나온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칼릭스는 순순한 태도로 대답했다.
“팔 년이었던가.”
‘내가 칼릭스를 처음 만난 시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아.’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헤맸다면 저 정도 간격이 납득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때였다.
“샤를리즈.”
칼릭스가 입술로만 웃었다.
“내기, 지금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