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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10화 (210/232)

210화

“좋습니다.”

제안을 수락한 격임에도 칼릭스는 잠시 묘한 얼굴을 했다.

금세 정돈된 얼굴로 그가 물었다.

“상품은 누가 갖는 것으로 할까?”

“승자가 정하기로 하죠.”

“좋아.”

“그럼 저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전생을 기억합니다.”

바라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눈치챌 수 없었을 아주 짧은 순간. 칼릭스는 동요했고, 이내 입술 끝을 올렸다.

“우연이네. 나도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사샤를 공표하는 연회에서 마주치기 전까지 저는 칼릭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 속에서 얼굴이 크레파스로 칠한 것처럼 가려져 있었어요.”

“그 책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한 시기를 물어본 이유가 그것 때문이야?”

“예. 그리고 사실 저는 이 생을 두 번째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아서 그걸 찾고 싶습니다.”

칼릭스가 문득 웃었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것도 비슷하네.”

“이상한 꿈을 꾼다는 것도 칼릭스와 비슷하군요. 그 꿈에 나온 남자가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남자가 왜 지금의 나를, 그리고 첫 번째의 샤를리즈를 도와줬을지 궁금했다.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교황이 눈독 들이는 신성력을 가진 존재. 그러니 흥미 본위의 일에도 엄청난 힘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 전, 칼릭스의 제안을 들은 순간.

알게 되었다.

그건 이유 없는 선의가 아니었다고.

“그 남자, 칼릭스였죠?”

* * *

스스로도 공교로운 타이밍에 한 말임을 알았다. 그랬기에 예감했다.

어쩌면 샤를리즈는 그의 제안을 들은 순간 눈치챘을 거라고.

“공녀의 짐작이 맞아.”

“역시.”

되뇌듯 혼잣말한 샤를리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이 시간부로 칼릭스의 경호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검은 밤의 기사들에게 귀띔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이 반응은 예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칼릭스는 샤를리즈가 말한 ‘전생’이 그가 없던 시간임을 깨달았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교황이 안다면 눈이 뒤집힐 테니 말입니다.”

대답 없는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쳐다본 샤를리즈가 눈을 깜빡였다.

“아, 승자는 칼릭스입니다.”

“내겐 말할 기회도 주지 않는 거야?”

“예. 어차피 저는 이길 수 없습니다. 대단한 과거를 가지셨네요.”

담담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어째서일까. 칼릭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왕이면 전생이라고 해 줘. 꼭 공녀를 만나기 전까지 부끄럽게 살아온 사람 같아져.”

“그렇습니까?”

고개를 갸웃한 샤를리즈가 “정정하겠습니다.”하고 흔쾌히 말했다.

“샤를리즈, 나는…….”

“하지 마세요. 어느 부분부터 제약에 걸려 있을지 모릅니다. 신수가 말을 아끼는 게 영 의아하더라니 이해가 가요.”

“그 이유라면, 나는 계속 공녀에게 말하지 못할 수도 있어.”

“비밀을 토로해야만 하는 건 적에게 잡혀 목숨을 부지하고 싶을 때뿐이에요.”

이상한 비유였지만, 샤를리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릭스는 이 주제를 이어가는 것이 제 욕심밖에 되지 않음을 인정했다.

“샤를리즈.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주인이 된 것을 축하해.”

“목걸이는…… 괜찮습니다.”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발음한 샤를리즈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대신 면책권을 받고 싶습니다.”

“그건 안 돼.”

“어째서요?”

“샤를리즈, 우리가 상하 관계였어?”

늘 부드러운 목소리의 남자가 선택한 거절은 파고들 틈 없이 견고했다.

샤를리즈가 눈매를 찌푸리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아. 면책권이 머리에 박혀서 그만…….”

“형님이 수치를 모르고 은인을 박대했지.”

“참고로 아버지는 몹시 후회하고 계시니 은인이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응. 고마워. 덕분에 눈밖에 덜 나겠어.”

칼릭스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언제나 스스로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

“교황에게 납치당하려고 소원권 요청한 거 아닙니다.”

이유를 물었던 것 같기도 했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녹안이 둥글게 휘어졌다. 서늘한 인상의 이목구비가 완연한 미소를 그렸다.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알려 줄게요.”

* * *

교황이 정면 돌파하겠다고 대신관들에게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사태를 신전의 구성원들이 황실에 확실한 반감을 갖게 하는 계기로 사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제 목적을 이루는 데 그 반감이 일종의 조력이 되는 셈이었다.

“만약 교황이 본래는 더 많은 신성력을 축적할 계획이었다고 쳐도, 결국 포기한 걸 보면 내 기억을 손볼 때 사용한 힘과 견주고 있는 건 맞아. 그럼 진짜 목적이 뭐지?”

분명 비슷한 결일 텐데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한 번 고민해 보려다가 빠르게 때려치웠다. 곧 죽을 사람 숙원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그 미래의 조각으로 알게 된 게 있다.

바로 교황이 내 목숨만 죽어라 노릴 거라는 거다!

“최종 악역이다 보니 조금 떨리는군…….”

눈물은 나지 않는다. 그간 받은 목숨의 위협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이다.

숙연하게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데, 익숙한 퍽퍽 소리가 들렸다.

“독수리가 부리로 때려도 금도 안 가니까 총알도 꿰뚫진 못하겠어.”

작지만 따뜻한 안도를 얻고 독수리의 발에 묶인 종이를 요령 있게 빼냈다.

정정한다. 요령이 아니라 내 팔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 속도였다.

처음부터 숙달된 것처럼 잘 빼냈으니 말이다.

형형한 눈을 하고 있는 독수리에게 냉큼 먹이를 바치고 종이를 펼쳤다.

교황이 황제에게 청한 알현이 거부되었다는 사실은 공녀도 들어 알고 있겠지. 내 귀가 말하더군. 교황이 시종에게 서신을 전하며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황제 본인이 확인하도록 당부했다고 말일세.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음.”

콩알만 해졌을 내 간이 위치한 부분을 위로하듯 두드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더 작아질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세상에는 너보다 더 작은 간을 가진 사람도 있으니 너무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말이다.

그렇다.

안토니오가 그렇게 될 예정이다.

* * *

“이 무슨 이야기란 말입니까.”

도무지 왜 이렇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교황이 알현을 청했을 때만 해도 안토니오는 비릿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교황께서 전하신 서신입니다.”

“읽어 보게.”

“그것이……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황제 폐하께옵서 친히 확인하셔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안토니오가 책상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은 서신을 확인한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그래, 이런 것도 보냈었지.”

애가 닳아 서신도 미리 준비해 왔을 정도면서 알현 신청은 두 번 안 하는 그 자존심이 언제까지 갈지 궁금했다.

퍽 느긋하게 펼친 종이는 반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못마땅한 기분이 되어 읽어 내려가던 안토니오는 어느 순간 튕기듯 일어나 시종을 부르는 종을 몇 번이고 반복해 울렸다.

그렇게 지금이다.

“폐하의 부덕을 다시 언급하기를 원하십니까?”

교황이 여전히 선량한 얼굴로 겁박했다.

“하. 교황이 이 일에 제대로 연관이 되어 있기는 한 모양이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을 보면 말일세. 내가 이 죄를 추가로 묻지 않는 이유는 돌아가신 폐하께서 듣기도 거북한 화두에 오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네.”

“말이 많아지셨네요. 두려우신가 봅니다.”

안토니오가 교황, 하고 짓씹듯 중얼거렸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라우드가 말했다.

“한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황제 폐하께 증거도 없는 죄를 묻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황!”

기어코 안토니오는 테이블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선황제의 사망과 연관이 있는 증거가 있다고 했나? 그게 얼마나 문제가 될 것 같은가? 부검도 할 수 없으니 의혹밖에 더 되겠어!”

“거래 순간의 영상이 남아 있다면요.”

안토니오는 그대로 굳었다.

“황위에 오르는 패륜아는 많지만 지킬 수 있는 부류는 오직 한 가지뿐이지요. 정복 군주.”

라우드가 애석하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하지만 제국을 제외한 대륙에 쓸모 있는 땅덩이는 적으니 고작 그것을 얻고자 전쟁을 일으킨다면 폐위 날짜만 앞당겨지겠군요.”

“…….”

“앉지 않고 뭐 하십니까?”

눈을 부릅뜨고 있는 안토니오를 바라보며 라우드가 “아” 하고 다분히 의도적인 소리를 내었다.

“마도구가 없음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거래에 응하셨지요. 폐하, 그래서 마법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랍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사건이 신전과 연관이 없다고 공표하기를 바란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아니요, 폐하.”

라우드가 가볍게 말했다.

“샤를리즈 리엔타를 유인하세요.”

* * *

“공녀를 죽일 생각입니까?”

“글쎄요.”

라우드가 고민된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웃으며 물었다.

“죽일까요?”

안토니오는 치욕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내 의견을 묻는 거라면 나도 글쎄라고 답하지요. 제 가문을 뒷배로 기고만장하게 굴던 공녀가 대공비가 된다면 얼마나 막무가내가 될지 고민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죽을죄는 아니니까요.”

퍽 여유롭게 답했으나 실은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공녀가 살아나와 전말을 공작에게 전한다면 낭패다.’

면책권의 위력은 대단하다.

만약 안토니오가 공작의 손에 크게 다치는 것으로 끝난다면 면책권으로 용서할 수밖에 없고, 죽는다면 다음 황제는 당연히 사샤가 될 테니 죄를 물을 리 없다.

그때, 라우드가 목을 울렸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니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나는 분노했다.

‘내 목숨이 공도 아니고 서로 던지는 거 뭐냐.’

남 목숨 쉽게 여긴 값, 결코 저렴하지 않으리.

“불쾌한 내용이었어?”

모르는 새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있었나 보다.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며 칼릭스가 손톱자국이 난 손바닥을 문질렀다.

“제 납치를 주모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불쾌한 내용이었네.”

칼릭스가 묘연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간소하게 여행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간소하다면…… 홀로 가려는 건가?”

“예?”

나는 기겁했다.

이 시국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니 꼭 내 인생과 이별 여행 같았다!

“아닙니다. 동행이 있습니다.”

“그래? 누군데.”

“칼릭스도 잘 아는 사람, 아니, 생물입니다.”

“……공녀만 간다는 것보다 더 불안해지는데, 기분 탓이겠지?”

“그렇습니다.”

칼릭스는 “음.”하고 웃었다.

여전히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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