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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11화 (211/232)

211화

책상을 두드리며 안토니오는 엘루이든 대공저 방향을 흘깃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교황이 돌아간 직후 곧장 대공저로 서신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칼릭스가 의문스럽게 생각할 게 분명하지. 대비할 수 있는 여지를 줄 필요는 없어.’

그리하여 참았다고 참은 게 하루였다.

‘어차피 명분도 있지 않나.’

신성한 나무에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바로 리엔타 공녀였으니까. 하물며 이건 갑작스러운 연락도 아니었다.

공녀더러 회복되는 대로 조사에 합류하라고 이미 칙서를 보낸 바 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생각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출입을 허가한 안토니오가 채근했다.

“답은? 리엔타 공녀가 무어라 했지?”

초조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당황한 마음을 숨기고 시종이 대답했다.

“리엔타 공녀는 결혼을 앞두고 짧은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뭐? 감히 황명을 잊은 게야?”

그렇게 말하는 안토니오야말로 그러했다.

이미 목숨의 위협을 겪은 딸이 또다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 두렵다고, 정보의 출처는 본인이니 자신이 합류하겠다던 리엔타 공작의 청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어디로 떠났다고 하던가!”

“목적지를 묻지 않아 대공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거짓이 분명했다.

‘황제를 겁박할 정도라면 교황의 참을성이 동난 지 오래일 텐데 공녀를 어디서 찾아야…….’

주먹을 거세게 쥔 안토니오가 돌연 멈칫했다.

“약혼자에겐 비밀로 해도 제 아비에게는 말했겠지. 워낙 사이좋은 부녀지간이지 않아.”

이 상황은 어쩌면 그에게 유리했다.

들뜨는 기분을 애써 누른 채 안토니오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윽박지르듯 말했다.

“리엔타 공작저로 간다.”

* * *

―……네가 조용하면 어쩐지 불안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

“다음 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담한 줄 알았더니 걱정도 많구나. 위험한 일이긴 해도 영혼마저 소멸되는 사태는 없을 테다.

“……영혼이 소멸되지 않으면 다음 생이 있습니까?”

―……그럼 무슨 걱정을 했던 거냐……?

“이번 생에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이번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끝나는 건가 했습니다.”

누가 살면서 이마를 바람에 호되게 얻어맞는 일도 있겠다고 생각하겠느냔 말이다…….

신수의 목―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열심히 잡느라 이마를 문지르지도 못하고 상체만 더 바짝 숙이며 거친 바람에 눈물을 말렸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이 오히려 가장 안 좋은 시기가 아니냐? 나도 들었다. 교황이 네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래서 지금이어야 합니다.”

신수는 ‘알겠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하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용케도 너만 왔구나. 나를 따로 불러낼 줄 알았더니 그러지도 않았다.

“칼릭스가요?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다. 궁금하시면 말해 드릴까요?”

―안 들으련다.

그렇게 대화는 끊겼지만 이마가 하도 얼얼한 덕택에 지루하지는 않았다.

[호위 기사들도 없이 갈 생각이야?]

[신수를 타고 다녀올 생각이기도 하고, 어차피 그 안에 기사들은 들어가기 힘들 테니 혼자가 낫겠습니다.]

[교황이 신성력을 감지할 수 있도록 예비해 두었을 수도 있어.]

[가지 않을 수는 없으니 감수하는 수밖에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황제의 요청을 어기는 격이 되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잔뜩 신나서 아버지 찾아갈 게 뻔하잖아요.]

[재상과 총사령관을 겸한 전무후무한 이력의 소유자를 믿어 봐, 샤를.]

몸이 고단하기는 한 모양이다. 칼릭스 생각이 났다.

‘하여튼 얼굴처럼 성격도 섬세하다니까.’

언뜻 보면 듣기 좋으라고 아버지를 띄워 주는 것 같지만 실은 내 걱정의 뿌리부터 제거해주는 것이었다.

그때, 신수가 낭패라는 듯 말했다.

―이대로 착지하기는 역시 어렵겠다. 너, 정말로 괜찮겠느냐.

“제안한 사람이 저인걸요. 이 방법이 아니면 걷느라 꼬박 하루는 날아갈 겁니다.”

―생각건대, 너는 살짝 제정신이 아니다.

“이왕이면 효율을 따지는 영민한 머리와 담대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 주시죠.”

―왜, 일이 끝난 후 사샤에게 네가 이렇게 대단했다고 자랑도 해 달라고 하지?

“저는 이제 겨우 제 몸이랑 비슷한 무게의 마음을 갖게 된 아이에게 빚을 지우는 몹쓸 놈 아닙니다.”

―너는…….

야트막한 숨을 흘린 신수가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무서워도 잠시만 견뎌라.

그 순간이었다.

낯설고도 익숙한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잠시만 두려워해.]

반사적으로 돌아봤을 만큼 선명한 목소리였다. 쫓아가 바람을 움켜쥐면 그것을 간직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너를 보호한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

머리가 멍한 탓인지 이번에도 말소리를 따라갔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신수의 비늘을 단단히 쥐고 있는 내 손이었다.

손끝은 온통 새하얬다. 저것이 바로 추락사를 피하고자 하는 내 절박함의 발로다.

나는 흠칫했다.

‘이, 이게 바로 홀린다는 건가 보다.’

목숨줄에서 손을 떼고 바람을 붙잡으려고 했다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부릅떴다가 눈알이 시려 정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됐다.

―나를 믿어라.

어쩐지 비장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나도 비장하게 물었다.

“남은 생은 쉽게 살 수 있을까요?”

―……나는 신수지 신이 아니라 예지는 못 한, 샤를리즈. 준비해라. 지금이다!

말이 끝난 동시에 신수의 형체가 사라지고, 더는 기댈 곳 없는 몸이 그대로 추락했다.

허공에서 몸이 반 바퀴 굴렀다.

시야에 온통 나무가 빽빽하게 차 있었지만 뾰족한 가지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우연이라기보다는 신수의 보호 덕택이었을 테다.

‘툴툴대는 것 같아도 세심하다니까.’

무형의 힘이 아래에서 받쳐주는 듯이 추락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마침내 두 발이 지면에 안전하게 닿았다.

“가자.”

소년으로 현신한 신수가 다부지게 고갯짓했다.

“그렇게 가려고요?”

“그럼 걸리면 너 혼자 독박 쓸 생각이었느냐?”

혀를 찬 소년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이 걸음을 뗐다.

“바로 저기다.”

겉보기로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똑같았다. 건물이 있기는커녕 평지도 아니었다.

“가벼운 장난질이다.”

“이 정도면 접근을 시도한 즉시 발각될 수도 있겠군요. 바로 하시죠.”

“앞뒤가 맞지 않는구나. 하지만 마음에 드는 태도였다.”

오랜만에 제 심장 볼 생각 하니 가슴이 떨리는지 신수는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무릇 큰일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긴장이 도움이 되기 마련. 나도 같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정한 위치에 신수가 손을 가져다 댄 직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길의 종착지가 무저갱이라는 듯 계단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실패는 죽음이므로 두렵지는 않았다.

“가죠.”

* * *

안토니오는 기사들을 대동하고 리엔타 공작저에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제국의 광영을 뵙습니다.”

흠잡을 구석 없는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한 공작은 무장한 기사들을 보고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예전부터 불쾌감을 주는 면모는 여전했다.

그 이유를 면책권을 보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안토니오는 면책권을 선사한 과거의 자신에게 다시금 혀를 찬 후 근엄한 체 턱을 당겼다.

“공작. 그대의 고견을 구하고자 급히 찾게 되었네. 황제의 명을 어기고 수상한 행보를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옳은가?”

“제 딸아이를 말하고 계십니까?”

평생 황제에게 고분고분한 적이 없던 공작의 녹안이 짙어졌다.

“내 분명 공녀가 쾌차하는 대로 협조할 것을 요청했네만 공녀는 차일피일 미루는 것도 모자라 갑자기 행적을 감추었지.”

의심스럽다는 듯 한쪽 눈매를 구긴 채로 안토니오는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 보면 단서가 하나도 없던 때부터 신성한 나무에 대해 꿰뚫은 게 이상했네. 작일, 교황이 알현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 공녀가 언급한 시기에 흑마법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일세. 하여, 교황의 요청을 수락해 공녀에게 신전 행을 명할 예정이었어.”

리엔타 공작은 경청하듯 말이 없었다.

실은 대답으로 할 것이 없기 때문일 테다. 속으로 비웃으며 안토니오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공녀의 행보를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공작, 그대는 알고 있소?”

* * *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정확히는 눈앞에 보이는 문이 두 개였다.

하나는 마도구가, 하나는 성물이 각각 부착되어 있었다.

나는 슬며시 제안했다.

“도마뱀으로 변신해 교황의 냄새를 맡…….”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겠구나.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손등을 누르도록 해라.”

마도구 방향으로 쌩하니 가는 신수를 몸으로 막았다.

“왜? 네가 여기로 가려고? 내 생각에는 이쪽이 함정 같다. 교황이 마도구를 신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

“심장을 만지면 신수가 심장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교황도 압니까?”

“아마 모를 거다. 여태 반응하지 않았거든.”

정확히는 신성력이 부족해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친구에게 상처 주는 그런 나쁜 사람 아니다.

“교황의 성격대로라면 침입자를 생포하려고 할 겁니다. 배신자를 색출해내야 하니까요. 그러니 틀린 길에는 포획이나 신전으로 이동시키는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택지가 두 개뿐이었으니 이번엔 맞췄다고 해도 다시 여러 개의 문을 만나게 될 확률도 무시할 수 없고요.”

“네 염려를 이해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아. 어디가 내 심장으로 가는 진짜 길인지는 범위가 협소해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말씀대로 이 두 문은 진짜와 가짜. 그것도 진짜를 흉내 내는 가짜잖아요.”

신수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익숙한 기시감에 나는 짧게 웃었다.

“그럼 제가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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