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회심의 일격을 날린 안토니오는 느긋한 기분이 되어 상황을 관망했다.
촘촘하게 얽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다.
설령 공녀가 당장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다고 할지언정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만큼 기력을 회복했음에도 황명을 어겼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자, 이제 공작이 어떤 변명을 주워섬길지 궁금해지는군.’
앞서나간 머리는 현재를 주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알아채는 데 실패했다.
리엔타 공작에게서 당황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벨리악 리엔타는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각하. 아가씨의 전언이 있습니다.]
샤를리즈가 데려온 황후의 개가 고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딸이 안쓰러웠고, 그보다 더 죄스러웠다.
그러므로 샤를리즈의 신뢰를 받아도 되는 인물인지 아닌지 조사하고 처분하는 건 벨리악의 몫이었다.
노아라는 이름을 가진 충견에 대한 조사는 의외롭게도 신용할 수 있는 인물로 결론 났다.
[아가씨께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여, 황제가 아가씨를 죄인으로 부르며 찾아올 시 아가씨가 머무르는 장소를 각하께서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라고 하시었습니다. 정확히는…… 그때만 입을 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샤를리즈가 했던 말 그대로 옮겨 보게.]
전체적인 맥락은 동일하나 과연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아버지 연기력이, ……아무튼 걱정 안 시켜 드리려고 미리 말씀드린 건데 내 위치 알고 있어서 삐걱거리는 거 아니냐고 황제가 오해할 수 있으니까. 부탁해, 노아.
[샤를리즈가 끝까지 내 걱정을 하던가?]
[떠나기로 하신 전날, 즉 조금 전에는 각하의 상황 대처 능력을 믿을 수 있게 되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랬군.]
벨리악이 희미하게 웃었다.
“황명을 거스르고 도주한 죄인은 공개 처형이 원칙이지요.”
반면, 안토니오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었다.
모든 사용인이 지켜보고 있든 말든 당장 무릎을 꿇거나 보좌관더러 면책권을 가져오라고 외칠 리엔타 공작을 상상했던 탓이다.
안토니오가 탐색하듯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공작답게도 원리 원칙적인 말을 하는군. 제 딸에게도 냉철해질 수 있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만, 공의 의견을 구하러 온 이 걸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
“미천한 조언이 폐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리엔타 공작이 예법서의 교본처럼 인사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나치게 정확한 예법과 신하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 그것은 도리어 안토니오의 심장을 불길한 박자로 뛰게 만들었다.
리엔타를 상징하는 녹안에 예리한 검날처럼 선득한 푸른빛이 돈 것은 그때였다.
“폐하. 제 조언이 도움이 되었다면,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려 보아도 되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게 되는 기백에 압도된 안토니오가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한 때였다.
“선객이 있었군요.”
이 순간 들으리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한 목소리에 안토니오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공녀의 행방을 부친인 공작은 알고 있지 않을까 하여 방문한 길이었는데, 같은 생각을 한 분이 계셨을 줄은.”
라우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리엔타 공작의 답은 어떻습니까?”
“저 또한 마찬가지로 알지 못합니다.”
“아쉽게 되었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수배령을 내리는 수밖에요.”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투로 라우드가 마치 다과를 제안하듯 말했다.
그 말에 놀란 건 안토니오뿐이었다.
“폐하. 샤를리즈의 부친 된 입장으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분명 벨리악이 이 태도를 고수하기를 바라며 온 길이었건만, 어딘지 등허리가 스산해졌다.
안토니오는 오기로 대답했다.
“교황이 오기 전 내게 하려던 말이 이거였나? 해 보게.”
“신성한 나무를 이용해 신성력을 축적한 의문의 인물 혹은 집단의 존재가 밝혀졌습니다. 하나, 신성력을 필요로 한 목적은 묘연하지요.”
그것이 바로 안토니오의 신경줄을 갉아먹는 여러 근심 중 하나였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듯 제 딸은 단서가 없던 때부터 신성한 나무의 쓰임새를 파악했습니다. 하여, 제 딸이 황명을 거역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벨리악이 라우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문득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길을 막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주범이겠지요.”
명백한 경고였다.
제국의 두 세력 중 하나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다는 애틋한 가족애의 표명이었다.
라우드가 썩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추측이라고도 하기 모호한 희망 사항이로군요.”
“한 가지 가능성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팽팽한 분위기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라우드는 미소 지었다.
그가 굳이 이 저택을 방문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공작에게 공녀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침 방문하기 타당한 이유가 생겼고, 그간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을 확인하고자 찾은 차였다.
신성한 나무를 불태운, 신성력 보유자.
‘분명 상당한 신성력을 갖고 있을 테지.’
그렇다면 공녀의 전력에 도움이 되도록 두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런 속내는 모두 감쪽같이 갈무리하고, 라우드가 물었다.
“폐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 *
신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너, 뭐냐. 여기를 와 본 적 있는 게냐? 아니면 길을 찾는 성물을 갖고 있는 게야? 아니, 그건 아니겠구나. 옷가지가 가벼워!”
“잔재주입니다.”
“이것은 잔재주가 아니다!”
“그럼 재주입니다.”
“그렇다면 마도구를 해제한 것도 네 또 다른 재주인 것이냐?”
“그건 마도구의 맹점을 파고든 얍삽한 수작이었습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 만큼 선택하는 데 긴장은 없었다. 답을 알고 있는 문제를 풀고 있는데도 전혀 신나지 않는다.
이 길의 끝에 있는 건 신수의 심장만이 아니리라는 진실을 처음부터 깨달은 탓인지도 몰랐다.
연신 감탄하며 졸졸 따라오던 신수가 어느 순간 “잠시 기다려 보아라.” 하며 제지했다.
“저것, 성물이다.”
신수가 혀를 찼다.
“마지막까지 경계를 놓지 않았구나. 썩 까다롭게 되었어.”
“해제하기 어려운 종류입니까?”
“그게 아니야.”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신수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모양은 걸쇠지만 엄금의 기능은 없다. 하지만 문을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것을 빼내어야 하지.”
“침입을 알리는 용도로군요.”
“그래. 몰래 들어가기는 힘들어졌다.”
신수가 작은 어깨를 침울하게 떨궜다.
나는 힘내라며 신수의 어깨보다 1cm가량 위의 허공을 토닥토닥했다.
“예상과 달라진 건 결국 없습니다. 어차피 발각을 가정하고 시기를 정했으니까요.”
“……그래, 그랬다.”
금세 다시 솟은 어깨가 손바닥에 닿았다.
“연다.”
“예.”
“연다.”
“여세요.”
“연다.”
“…….”
기다리다 기다리다 내가 뽑았다.
“히익!”
타앙―
걸쇠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를 배경으로 나는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 * *
“당장 결정하기는 막중한 사안이군.”
안토니오가 모호한 말을 흘렸다.
라우드는 웃었다. 그 미소가 어딘지 안토니오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상하 관계가 확립되었기 때문일 터다.
“그렇기는 하…….”
넘어가 주겠다는 듯 너그럽게 입을 연 라우드가 돌연 말을 멈췄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마치 공허를 닮은 침묵은 아주 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검의 궤적마저 읽는 누군가가 목도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찰나는 못 되었다.
“공작은 결국 공녀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하니, 더 있을 이유는 없겠습니다.”
찰나의 공백은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자연스러운 말투였으나 벨리악은 눈치챘다. 교황은 분명 동요했고, 여전히 동요하고 있다고.
이유로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제 아이였다.
어쩌면 단순히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위협에서든 가장 먼저 생각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교황의 동요를 일으킨 이유에 샤를리즈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이상 좌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벨리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히이익!”
신수는 여전히 히익거리며 열린 문 안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둘의 해후를 방해하려니 미안해져 최대한 느릿느릿 들어간 끝에 목격한 것은 멈춰 선 신수의 등이었다.
“신수 님, 왜 가만히 서 있…….”
아.
시야에 빼곡한 결정체의 명칭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기분이 별수 없이 저조해졌다.
신수는 할 말을 잃은 듯 부릅뜬 눈으로 광활한 내부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충격에 빠진 것은 충분히 이해하는 바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그래. 그렇지…….”
여전히 성혈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는 신수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비틀비틀 걸어가며 신수가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권력을 욕심내는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나는 알아야 했다. 알아야 했어…….”
자책감을 견디지 못한 신수는 결국 제 손바닥에 얼굴을 떨구고 말았다.
이미 끝난 일을 후회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욕심에 희생된 가엾은 생명을 추모하는 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신수를 다시 끌어당기는 대신 그의 심장이 위치한 곳으로 홀로 걸어갔다.
이미 시간이 충분히 흘렀다.
그랬기에 바쁘게 내딛던 걸음은 어느 순간부터 점차 느려졌다. 신수의 심장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였다.
‘……이 형태는.’
붉은색의 각이 뭉툭한 하트 모양.
한때 내가 필두로 제작한 그 물건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