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대답해 주세요.”
절박하게 그를 붙잡은 작은 손에 힘이 실렸다.
평소라면 옷에 주름을 만들어 죄송하다고 화드득 손을 뗐을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을 뿐이다.
칼릭스는 제 어린 조카를 가만히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작았다. 어쩌면 선황제의 보호를 받지 못했을 적의 그보다도 더.
하지만 체구가 자그마하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걱정의 크기마저 작지는 않은 법이었다.
“사샤.”
칼릭스는 사샤와 시선을 맞췄다.
머뭇머뭇 고개를 든 아이는 이윽고 들려온 사과에 눈을 깜빡였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말하지 못할 것들이 많아서 미안해.
“……괜찮아요.”
아이가 손을 천천히 떼었다.
칼릭스는 그 손을 가져가 잡았다.
“남은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해야 되겠구나.”
색이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드러날 만큼 사샤가 눈을 크게 떴다.
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 애써 씩씩하게 감추고 있던 감정은 꽃송이가 톡 터지듯 만발했다.
“네에.”
아이는 이제야 서럽게 대답했다.
칼릭스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리반에게 눈짓했다.
사샤의 여벌 옷을 챙기고자 리반이 다급히 옆을 지나 달려갔다.
답삭 안겨 있던 아이가 허리를 세우고 다급하게 물었다.
“샤를 님에게 가는 거예요?”
“그래.”
“샤를 님은 괜찮으신 거죠?”
칼릭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것도, 그래. 하지만 더 괜찮을 수 있도록 가는 거란다.”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인 사샤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용사님이에요.”
커다란 품에 다시 안기며 아이는 또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그러셨어요.”
그렇게 멋진 사람은 처음 봤다.
아이가 좋아하는 동화책 속의 작고 귀여운 용사님과 달리 진짜 용사님이었다.
“맞아. 그러니 샤를리즈는 지금도 괜찮을 테지.”
사샤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비슷한 시각.
황제궁.
“샤를리즈 리엔타의 거취가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일리든은 몇 번이나 반복한 대답을 읊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안토니오가 답답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삯마차를 탔거나 하다못해 말로 이동했을 게 아니야. 도착지점은 묘연해도 출발한 경로는 뻔하지. 공녀가 얼굴을 드러냈다면 드러낸 대로, 감췄다면 감춘 대로 수상쩍어 눈에 띄었을 터.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추적이 되지를 않아!”
“면목 없습니다.”
“하아. 교황과 리엔타 공작은 현재 어떻던가?”
“리엔타 공작은 두문불출하고, 교황 역시 처소 이외의 목격담은 없었습니다.”
“모두 얌전히 있는 게로군.”
안토니오가 그나마 다행이라며 숨을 내쉬었다.
엘루이든의 보좌관은 황제가 교황을 감시할 리 없겠다고 판단했고, 리반은 그에 동조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교황이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던 건 겁박했기 때문이라고 보좌관도 짐작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몰랐던 탓이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제일 취약한 지점을 건드린 교황을 기회만 닿는다면 처리할 생각이 만만했다.
“그만 나가 보게, 경.”
그 홀로 남은 집무실은 무척이나 적막했으나, 안토니오는 불꽃놀이 구경에 끌려 나온 사람처럼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이 하도 소란스러워 머리가 다 아팠다.
“리엔타 공작은 대체 무슨 간계를 품고 있는지.”
탄식하며 안토니오는 몇 번이고 곱씹은 그 순간으로 다시 잠겨 들었다.
[폐하. 역시 저는 제 아이를 믿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교황 성하와 저, 벨리악 리엔타의 가택 연금을 폐하께 청하는 바입니다.]
당연하게도 혹하게 되는 요청이었고, 마찬가지로 당연하게도 선뜻 수락하진 못했다. 교황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공작은 이 음험한 사건의 배후로 신전을 지목하신 거로군요.]
[저는 신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신전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뜻에 교황의 미소는 짙어졌다.
[공작. 공작이 퍽 긴 시일 동안 지켜온 면책권을 이 얕은 판단으로 잃게 될 겁니다.]
[잃을 수 있다면 그것도 다행이겠지요.]
교황의 반란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교황의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씻은 듯 사라지고, 분위기는 일촉즉발로 치달았다.
그것은 이내 교황이 가볍게 터뜨린 웃음으로 끊어졌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폐하. 공작의 청대로 해 주세요.]
[하나, 공작. 그대의 목숨은 면책권으로 구명할 수 있을 테지만, 적합한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교황을 연금시키고자 한 행태는 신전으로부터 죗값을 받아야 할 거랍니다.]
“분명 교황은 진노했지.”
선황제를 독살한 이후, 모든 사람을 의심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아온 안토니오는 알 수 있었다.
끝내 수락하기는 했으나 짧은 순간 오간 살의는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공작의 추측이 맞는 건가?”
공작의 추측이 맞다면, 샤를리즈는 교황을 쳐낼 카드를 쥐고 귀환할 테다.
그렇게 되면 선황제 사망의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교황이 궁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몰아갈 수 있다.
신전도 제 뜻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될 테다.
“한데, 그렇다면 교황이 공작의 청을 수락할 리가 없지 않나.”
샤를리즈를 저지하기는커녕 제 발을 선뜻 묶은 셈이다.
소득 없이 제 자리만 빙빙 도는 사고 회로를 중단하는 방법은 하나다. 샤를리즈를 찾아내 취조하는 것.
“공녀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게야!”
안토니오가 죄 없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 * *
라우드가 이틀이나 잠자코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차피 신수의 심장을 갖고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간 신수의 심장을 노린 불청객은 많았고, 신전은 그에 대응하기 위한 수십 겹의 결계를 긴 세월에 걸쳐 완성해냈다.
“침입자는 공녀일 테지.”
처음에는 동요한 게 사실이다. 원대한 숙원을 이루는 방법을 감히 저지하려고 드는 이가 접근했으므로.
그러나 공작에게 발이 잡혀 있는 동안 오히려 침착해졌다.
밀실을 빠져나오려면 조작해야만 하는 성물이 있다. 그것의 기능은 신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결국 그의 손아귀에 들어올 테니, 직접 이동하는 것은 그를 주시하고 있을 대공의 수하들에게 조용히 처리할 좋은 기회만 주는 셈밖에 안 됐다.
“공녀가 혼자 힘으로 그곳까지 가진 못했을 터. 분명 신수가 함께 했겠지.”
호수에 머무르고 있다며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회복한 거다.
그래봤자 지금은 성혈을 맞닥뜨리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력감이나 느끼고 있을 신세다.
신수가 성혈을 훼손할 가능성은 상정하지도 않았다.
라우드는 신수를 잘 알았다.
“신수가 심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공녀를 제거하고 리엔타의 금력을 손에 넣은 뒤 신수가 있는 공간 자체를 제물로 삼으면 될 터.”
신수가 심장을 포기한다면 이야기는 더 쉬워진다.
시간은 이번에는 그의 편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녀는 공교로운 타이밍에 자취를 감추고 접근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만…….”
라우드가 썩 애석하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공녀는 급하게 일을 도모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보람도 없이 유명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라우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째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신수가 성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신에 가장 맞닿은 존재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이질감이 들이닥쳤다.
“설마…….”
라우드의 얼굴이 굳었다.
* * *
챙! 채앵!
“너, 너 괜찮은 게냐? 힘에 부치면 말해라. 교대하자.”
“괜찮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오기 부릴 것 없다!”
“정말로 괜찮은데요.”
여전히 답답해하는 신수에게 내 손목을 여러 각도로 마구 꺾어 보였다.
“……괜찮은가 보구나.”
“그렇습니다.”
한때 휘두르기에 매진한 효과가 이렇게 나타났다.
내 손목은 강철 손목으로 진화했다.
“결정체를 모두 부수려면 얼마나 더 걸릴까요?”
남은 결정체 수를 세려고 두리번거려 흐름을 끊는 대신 신수에게 물었다.
“어어, 그러니까……. 한 이 초?”
툭.
이것은 시방 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다.
“아닌가? 십 초?”
신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시간을 슬쩍 늘렸다.
그래봤자 초 단위였다!
‘교황이 오기 전에 탈출하는 것, 난이도가 한참 올라갔군.’
내 이번 생 난이도는 원래 이랬다. 이제야 친숙한 느낌이 든다…….
눈물을 말리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나저나 이 활, 뭐로 만들었냐.’
내구성이 어찌나 대단한지 한 번 휘두르면 결정체를 열 개는 부술 수 있다.
“이제 정말로 이 초 남았다! 힘내거라!”
제자리에서 쫑쫑 뛰며 신수가 응원했다.
마침내 마지막 결정체마저 균열이 갔다.
“잘했다! 정말로 대단하구나!”
쉴 새 없이 이어진 소음이 멎은 뒤, 마치 유리가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가 돌연 들렸다.
내가 돌아선 탓이다.
“신수님.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무수히 쌓인 결정체의 파편을 밟고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명의 기억을 지울 수 있을 만큼의 힘으로 반란 혹은 건국과 관련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말없이 나를 주시하기를 잠시. 신수가 입을 열었다.
“이 대답은 수많은 생명을 구한 등가교환이다.”
신수의 눈은 여전히 짙었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샤를리즈. 그것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