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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15화 (215/232)

215화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그대가 고생해주어야겠습니다.]

소년 신관은 트롤리를 부지런히 끌었다.

한낱 신관에게도 경어를 사용하고 매사 친절하신 분이 바로 교황 성하시다.

그런 분을 감히 근거도 없이 의심하고 처소 밖으로 나오시지도 못하도록 만들다니.

귀동냥을 해 보니 이 기가 차는 소식은 수도 전역에 퍼진 듯했다.

그러니까, 신전에 출입하는 모든 신도가 감시인이나 다름없게 된 격이다.

‘이것도 간악한 리엔타의 수작인가?’

입술을 꾹 씹던 소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성하?”

늘 걸려 있던 자애로운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어딘지 선득했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거린 소년은 교황이 제 옆을 스쳐 지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성하.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제가…….”

“네가.”

“네? 죄송하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성하.”

신장 차이가 컸다.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교황을 따라가려면 소년은 달려야 했다.

헐레벌떡 쫓느라 미처 듣지 못해 되묻는 사이에도 교황의 속도는 변함없었다.

질문을 듣지 못하셨나 싶어 한 번 더 물어보려던 찰나, 교황이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늘 제 처소를 관리해 주었지요. 제가 의식을 잃었을 때도 물심양면으로 간호를 해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을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푹 숙이며 소년이 우물거렸다.

라우드는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본래는 시답잖은 잡일 말고는 일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네가 도대체 뭘 할 수 있겠냐고 말할 생각이었다.

‘썩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군.’

괜히 곁에 둔 게 아니다. 소년은 차기 교황 자리도 노릴 수 있을 만큼 퍽 괜찮은 신성력을 갖고 있었다.

“내가 처소를 벗어나 괜한 의혹을 살까 봐 걱정되는 것이겠지요.”

라우드가 이해한다는 듯 조금 힘없이 웃었다.

“하나, 급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어요. 이 일로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눈이 많아지겠지만,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일 테지요.”

“성하…….”

“대신관들마저 함께 자리를 비운다면 신전이 그릇된 일을 도모하고 있노라고 의심해 제 뒤를 밟을 테지요. 그렇게 되면 일을 마무리하는 데 차질이 생기고 말아요. 그러니 그대가 이 길에 동행해 줄 수 있나요?”

소년이 목울대를 크게 울렁였다.

“예. 성하.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제게는 더없는 기쁨입니다.”

“다행이에요. 채비는 따로 할 필요 없습니다. 바로 이동하죠.”

뒤따르는 얼굴은 결연했고, 발소리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것을 비웃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라우드는 무표정하게 정면을 직시했다.

포탈이 위치한 기도실까지 가는 데 앞으로 십분. 그리고 포탈에서 다시 성혈이 놓인 장소까지 대략 이십여 분.

성혈 일부가 파손되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 내가 방만했지.’

샤를리즈 리엔타는 그의 예상 범주대로 움직인 적이 없었건만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 공간에서 외부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그러니 대공과도 연락이 끊겼을 터. 그렇다면 지금쯤 대공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을 수도 있겠어.’

세상 모든 일은 나쁘게만 흐르지 않는다.

라우드는 그 사실을 적재적소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처소에서 나오기 전 흑마법사 하나에게 연락을 취한 차였다.

대공저에 홀로 남아 있을 선황자를 데려오라고.

* * *

리엔타 공작의 가택 연금은 철저하게 진행됐다.

공작가의 사용인들도 발이 묶였고, 대문은 외출은 물론 출입마저 금하며 굳건하게 잠겼다.

“말하게.”

벨리악이 술잔을 손 안에서 기울였다. 투명한 유리 안에서 호박색 액체가 파도치듯 흔들렸다.

“말해 보래도.”

리엔타의 집사는 침통한 얼굴로 어렵게 입을 뗐다.

“아가씨께서 증좌를 수집하고자 떠나셨다고 하셨지요. 걱정이 많이 됩니다. 우리 아가씨, 검도 못 다루시지 않습니까.”

벨리악은 말없이 잔을 다른 방향으로 기울였다.

그는 샤를리즈로부터 이 여정의 목적을 듣지는 못했다. 그저,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샤를리즈가 직접 움직여야만 했을 이유를 유추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제 안녕을 담보로 한 내기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내가 죽은 뒤로 그가 살아온 이유는 어차피 유일한 가족, 샤를리즈였으므로.

한참 더 걱정을 종알거린 집사가 물러가고, 벨리악은 커튼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리엔타 공. 무례한 경로로 찾아오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라이저 바이에르가 그곳에 있었다.

벨리악이 테라스 창문을 열었다.

“오늘 길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황실 기사들의 눈에 띈다면 바이에르의 수장이라는 이름값이 아깝지요.”

그리고 일라이저는 곧장 말했다.

“리엔타 공녀가 신전과 관련된 정보를 요청했을 즈음 신전에 사람을 몇 심어 두었습니다. 교황의 처소 근처에 식사가 담긴 트롤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더군요. 직후, 교황의 전담 시종 격인 신관을 은밀히 탐색했으나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고 합니다.”

표정 변화 없이 잠자코 경청한 벨리악이 말했다.

“교황의 기도실에 포탈이 있습니다.”

무심하게 언급할 수준의 정보가 아니었다. 교황의 기도실은 황제의 집무실과 비슷한 상징성을 가진다.

그러나 리엔타라면 수집할 수 있을 법했고, 리엔타의 정보라면 확실했다.

“그곳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포탈과 이어진 장소를 아십니까? 교황이 직접 이동했을 정도라면 심상찮은 일일 테지요.”

“알고는 있습니다.”

짤막한 답에 일라이저는 느리게 웃었다.

“그렇군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지요.”

살면서 생과 사의 기로를 숱하게 맞닥뜨린 일라이저다. 한계까지 갈고 닦인 감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과연 어떤 의미로는 마지막 수도행이 맞았다.

“그럼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로군요.”

* * *

손에 꼽히는 장인의 손길이 닿은 마차일지언정 모든 길에서 승차감이 완벽할 수는 없다.

울퉁불퉁한 길을 가는 내내 사샤는 몇 번이고 흔들흔들거렸다.

그때, 마차가 멈췄다. 이어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사샤. 여기부터는 마차로 갈 수 없어.”

“네. 네에.”

양손을 다리 사이에 꼭 끼운 아이는 누가 봐도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칼릭스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도 가겠니?”

아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리 안기렴.”

사샤는 전투적으로 칼릭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조금만 참아. 떨어질 일 없단 것만 기억해.”

“네에.”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걱정하지 마세요.”라고도 덧붙였다.

“눈도 감고 있을게요.”

사샤가 얼른 두 눈을 꾹 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말이 얼마나 빠르게 달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샤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을까.’

자신이 없었다면 숙부님은 벌써 도착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셨을 테니까.

그러나 아이는 이미 자책도, 반성도 아주 많이 할 결심으로 따라온 차였다.

[함께 가도, 저택에 있어도 위험할 수 있어.]

숙부님은 마치 저 두 선택이 같은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사샤는 알았다. 두 개는 달랐다. 따라간다면 숙부님은 더 힘드실 테다.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숙부님이 조금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 조카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을 주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노력해야겠는걸.]

[갈래요. 샤를 님께…… 같이 가고 싶어요.]

만약 함께 가는 선택지만이 위험하다고 해도, 사실 아이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샤를리즈는 신수의 심장을 찾기 위해 떠났어. 심장을 이용해 나쁜 일을 벌이려는 사람이 있거든.]

말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잘했어. 눈을 떠도 돼.”

두 발이 땅에 닿은 후에야 아이는 눈을 떴다. 얼마나 질끈 감고 있었는지 시야가 다소 뿌옜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숙부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알 수 있었다.

칼릭스는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으슬거리던 몸이 단번에 따뜻해지자 사샤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마를 만지작거리다 어느덧 개인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평범한 숲 그 자체였다.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때였다. 칼릭스가 어느 나무에 손을 대자 땅 일부가 직사각형 모양으로 갈라졌다.

사샤는 입을 꾹 물었다.

‘샤를 님이 저기 계신 거야.’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도록 깊었다. 하지만 아이는 정말이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샤를리즈에게 향하는 길이니까. 이 길의 끝에 있을 사람을 생각하면 무서워질 리가 없다.

오히려 빨리 가고 싶어 아이는 자그마한 어깨를 움찔움찔거렸다.

“그간 우리는 너를 걱정해 위험으로부터 멀리했어.”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사샤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불시에 마주쳤다.

한없이 다정한 눈을 보고 있노라니 왜인지 목이 메었다.

“그런데, 그게 너를 외롭게 만들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외롭지…….”

잠긴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하다 아이는 다시 입을 뗐다.

“외롭지 않았어요.”

또박또박 말하느라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왼손 검지에서 생경한 이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숙부와 나눠 낀 반지였다.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샤를리즈를 가장 먼저 맞이해 줘.”

맡겨 달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가방을 달랑거리며 열심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자그마한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시한 칼릭스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몸을 돌렸다.

계단을 열기 위해서는 신성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신수는 그가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테다.

어쩌면 교황조차도.

“상관없나.”

어차피 이곳으로 오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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