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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16화 (216/232)

216화

신수는 대답했다. 그것만이 아니라고.

그 용은, 아니, 칼릭스는 내 기억만 지운 게 아니었다고 말이다.

“반란 혹은 건국과 관련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 답하겠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생각해 보아라, 샤를리즈. 네게서 사라진 게 그것뿐이었더냐? 네가 얻은 것은 어떻고.”

신수는 두 입을 굳게 닫았다. 여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다는 듯.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내가 잃은 것은 칼릭스에 대한 기억과 감정. 얻은 것은 미래에 대한 정보와…….

“일단은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깊어지려는 생각을 싹둑 잘랐다. 나머지는 나가서 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래. 그러…….”

신수가 돌연 눈매를 굳혔다. 그리고는 입매를 꿈틀거리며 섬뜩한 말을 날렸다.

“귀신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왔구나.”

“예? 귀신이요?”

“무슨 말이냐. 네 짝 말이다.”

신수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안 올 거라더니 왜 또 왔다더냐.”

‘부끄럼 많기는.’

심장마저 멀리 떠나보낼 수 있을 만큼 아끼는 친우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안다.

“알고 보면 네게 추적 마도구라도 붙인 거 아니……. 잠시만. 네 얼굴 뭐냐?”

“제 얼굴은 원래 이렇습니다.”

“아니야. 분명 달랐다. 마치 나를 어린애 보듯 바라봤어!”

딴청을 부리며 슬금슬금 문으로 다가갔다.

“혹시 기절했을 때 뭘 본 게냐? 뭘 본 게야! 신성한 존재에게는 감히 인간이 보아서는 안 되는 일면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얼른 말해라! 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곧장 따라붙은 신수가 바락거렸다.

나는 신속하게 실토했다.

“애틋한 우정을 목도하였습니다.”

“무, 무, 무!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몰라도 틀렸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씩씩거린 신수가 두 주먹까지 꾹 쥐었다.

불시에 날아올지도 모르는 주먹을 경계하며 문을 몸으로 밀었다.

그렇게 나는 벽에 몸을 기댄 사람이 됐다.

‘미는 게 아니라 당기는 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몇 번 더 밀고 당겨 보았지만 문은 굳건했다.

“이거 나갈 때도 장치가 있는 모양인데요.”

“그러니까, 내게는 우정……. 뭐? 비켜 보거라.”

재깍 비켜서자 신수가 심각한 얼굴로 문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뒤, 짓씹듯 나직한 목소리가 터졌다.

“어쩐지 마지막 문은 함정이 없더라니 이게 숨어 있을 줄은.”

신수의 앳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허리를 굽혀 열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것 보거라. 여기 작은 구멍이 보이지. 여기에 이 열쇠를 끼워 넣어야 하는 게다.”

과연 열쇠의 홈과 유사한 형태의 구멍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패여 있었다.

“이 밀실을 탈출하는 방법은 하나다. 그런데, 그 방법이란 걸 쓰면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아마 신전일 테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겨우 물었다.

“그럼 교황이 바로 여기까지 이동할 수도 있습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성물이 지키고 있는데, 감히 포탈 따위가 내부에서 유지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문밖에는요?”

“거기도 없었지.”

‘이상한데. 독 안에 든 생쥐 꼴로 만드는 것보다는 아예 들어올 생각도 못 하게 하는 쪽이 합리적이잖아.’

침을 꼴깍 삼킨 신수가 굳센 표정을 지었다.

“칼릭스가 왔다는 건 교황도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그러니 이대로 신전에 도착해도 괜찮을 게야. 신전 지리라면 그놈보다 내가 더 환하기도 하고.”

“신수 님. 그 성물은 한 번밖에 조작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먼저 가 보십시오.”

“뭐?”

그러나 신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게 무슨 생각이 있겠지.”

작은 손이 머뭇거리지 않고 열쇠를 꽂았다.

‘역시.’

시선 끝에는 여전히 신수가 있었다.

“이 문, 심장의 반출을 막는 용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근처에 포탈을 설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차피 갖고 나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말하면서도 의문 하나는 여전했다.

왜 애초부터 막지 않았는지 말이다. 심지어 교황은 이곳에 성혈을 옮겨 두었다.

‘파손될 가능성을 아예 상정도 하지 않은 건가?’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묘하게 찜찜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체하다 교황한테 잡히면 죽겠다는 깨달음만 얻었다.

그 많던 성혈을 다 깨부수었으니 네 목숨값으로 대신하라며 길길이 날뛸 수도 있겠…….

‘잠시만.’

이제야 알겠다.

왜 애초부터 출입을 막지 않았는지 말이다.

* * *

‘기도실에 포탈이 있었다니!’

소년 신관은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부지런히 교황을 따라갔다.

숲은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 걷기 힘들었지만 그것마저 작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제 곧 도착입니다.”

교황은 바삐 발을 움직이는 대신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대는 이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소년이 머뭇거리자 교황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아직 어린 그대에게 많은 짐을 지울 수는 없어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교황이 빨랐다.

“수상한 사람을 목격한다면 이 성물에 대고 말을 전하면 됩니다. 후방을 부탁해요.”

“……맡겨 주세요, 성하.”

“조심하세요.”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본 교황은 짤막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엉거주춤 선 채로 소년은 한 손에 감기는 구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것과 비슷한 성물을 본 적 있었다.

‘공녀도 신성력이 있는데 어째서 성하께 대립하는지 모르겠어.’

구체를 꾹 쥐고 있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 * *

라우드는 비릿하게 웃었다.

성혈이 파손되는 감각이 잇따라 전달됐다.

성급히 움직이던 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이어졌다.

“대공. 여기서 만나는군요.”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으나 겉으로만 그럴 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이 지나치게 미려해 선득했다.

마치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고작 불길한 느낌에 멈춰 서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지나왔다.

“대공이 아무리 제국법의 치외 법권 지대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신전의 보고에 침입한 죄인의 뒤를 지키는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겁니다.”

“신전의 보고라.”

짧게 뇌까린 칼릭스가 여상하게 말했다.

“뒤로 수많은 목숨을 탈취해 성혈을 제작하고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말종의 본거지라고 실토하시는 건가요.”

리엔타와 엘루이든의 정보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신수의 심장이 위치한 마지막 문까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적확한 길을 선택하고, 모든 내막을 알 정도라면.

단순히 정보력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수준이다.

‘세작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정보마저 모두 알고 있어.’

눈을 가늘게 뜬 라우드는 그대로 웃었다.

흑마법사에게 선황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하며 덧붙인 말이 있다.

[바로 의식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성혈은 지금도 파손되고 있다.

그래서 라우드는 웃을 수 있었다.

‘성혈은 단순히 깨뜨린다고 해서 파괴할 수 없지.’

그에 견주는 신성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잃었으되 잃지 않았다.

그러니 라우드가 해야 할 일은 한동안 시간을 끄는 것에 불과하다. 흑마법사가 나타나면 성물로 신관과 위치를 맞바꿔 제단으로 향하면 됐다.

“어쩔 수 없지요.”

신성력은 시간을 돌릴 수도 있는 힘이다. 그렇다는 건 멈출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세상을 손안에서 굴리는 것은 안타깝게도 그의 능력 밖이지만 특정한 공간이라면 가능했다.

라우드는 공간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보이지 않는 선으로 갈라진 두 공간은 시간의 빠르기가 점차 달라졌다.

가만히 서 있어도 부딪쳐 오던 서늘한 바람이 멀어지고, 부산히 흔들리던 잎사귀는 점차 느려진다.

마침내 그를 제외한 구성체의 움직임이 정지됐다.

‘조금 무리했나.’

라우드가 머리를 넘겼다. 막대한 신성력을 한 번에 운용한 탓에 손이 파르르 떨렸다.

“대공은 그대의 신성력이 제게 쓸모 있기를 바라야 할 겁니다. 그래야 함께 떠날 수 있을 테니까요.”

느리게 한 걸음을 뗀 순간.

그가 멈춘 시간 속에서, 라우드는 지나칠 수 없는 생경한 이질감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저 눈치챘을 뿐이다. 미처 대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휘이이―

모든 것은 불시에 재개됐다.

잠시 잠깐 폭풍우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을 뿐이라는 듯 고요해지기 전보다 더 거센 격랑이 몰아닥쳤다.

제멋대로 끝나려고 한 어느 시간을 붙잡아 되감았던 남자가 입술로만 웃었다.

“누군가는 매번 온몸으로 맞서는데, 이런 비겁한 수는 안 되지.”

* * *

한편, 소년 신관은 땅을 박차고 달리고 있었다.

‘흑마법사야.’

검은 로브 차림의 사내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구체에 대고 흑마법사의 출현을 보고하려던 소년은 멈칫했다.

‘성하께서 후방을 지켜 달라고 하셨는데.’

전면에서 흑마법사와 대치하고 계실 텐데, 이러면 짐만 얹는 셈이 되지 않나.

소년은 망설이다가 입을 굳게 닫았다.

그는 교황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이다.

‘어디로 간 거지?’

흑마법사는 다시 사라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년은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냥 바로 말씀드려야 했나. 지금이라도 말씀드려 보는…….’

구체를 초조하게 바라보던 그때였다.

“신전의 보고라.”

나긋하지만 가볍지는 않은 음성이 서늘한 공기를 예리하게 갈랐다.

단 한 번만 들어도 쉽게 잊기 힘든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엘루이든 대공이다.

소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대공이 얼핏 보였다. 그리고 성하의 뒷모습도.

“뒤로 수많은 목숨을 탈취해 성혈을 제작하고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말종의 본거지라고 실토하시는 건가요.”

‘왜…….’

어느 순간 손에서 놓친 구체가 흙 위를 굴렀다.

황급히 뻗은 손등에 물기가 번졌다.

‘아니야. 아직, 아직.’

거칠게 눈을 문질러 닦으며 기어이 구체를 다시 쥐었지만, 소년은 결국 묻고 말았다.

‘왜 반박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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