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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17화 (217/232)

217화

그때, 신수가 불쑥 말했다.

“샤를리즈. 해답을 찾았다. 내 심장을 두고 가면 된다.”

신수는 손을 펼쳐 자신의 왼쪽 가슴께에 대었다. 망설이듯 눈을 내리깐 건 아주 잠시였다.

작은 손이 몸과 점차 멀어지자, 그 사이로 하얀빛이 실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마침내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심장을 틀어쥔 신수는 발부터 움직였다.

“심장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두면 나갈 수 있어.”

“원래 있던 자리는 신수 님의 몸속입니다.”

“말장난할 시간 없다. 교황이 언제 올지 몰라.”

“교황은 오지 않아요.”

신수가 돌아봤다. 작은 얼굴 가득 의아함이 선명했다.

“초반에는 다급했을 수도 있겠죠. 파손된 성혈과 비슷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을 찾았으니 결과적으로는 잃지 않은 것과 같지만 필요 없던 부담이 생긴 격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적혀 있는 듯한 앳된 얼굴을 보며 덧붙였다.

“교황은 성혈이 있던 공간 자체를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던 거예요.”

눈을 깜빡이던 신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심장을 두고 간다면 우리는 신전으로 이동할 수 있다. 내가 심장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해 여기에 어영부영 버티고 있을 거라고 교황이 확신할 계기도 없었어.”

“신전 자체를 제물로 삼는다면요?”

유일한 출구를 나는 잠시 바라봤다.

“그러니까 초반엔 동요했겠죠. 고작 성혈 몇 개 파손할 수 있는 신성력을 잡겠다고 신전 자체를 제물로 바치기에는 잃게 되는 것이 많으니까요. 나타나지 않았던 걸 보면, 대체재를 찾았던 것일 테고, 모든 결정체가 부서진 지금은 올 생각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는 말은.”

신수가 무언가를 억누르듯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빠져나가게 되면, 신전의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말이로구나.”

* * *

작은 몸은 웅크려 앉은 자세 때문에 더 작아 보였다.

가방끈을 꼭 쥐고 얌전히 있던 아이는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소란을 들은 것도 같았다.

‘숙부님?’

벌떡 일어난 사샤는 다시 쪼그려 앉았다.

기사들처럼 숙부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방해만 될 테다.

침울하게 푹 떨어진 고개는 벌써 몇 번이나 바라보았던 길로 향했다.

보이는 길은 하나.

하지만 갈림길이 연이어 나타날 것을 안다.

숙부님이 알려 주신 덕택이었다.

[모두 기억했니?]

[네에.]

[사샤. 그 길을 가면 안 되는 이유도, 가야만 하는 이유도 없어.]

그뿐이었다.

숙부님은 네 결정에 맡기겠다는 듯 그에 관해서는 더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하든 선택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사샤가 아닌 칼릭스가 될 터였다.

아이는 검지에 낀 반지를 오래도록 매만졌다.

“……죄송해요. 숙부님.”

아이의 손가락에 맞춰 줄어들었던 반지는 본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작은 주먹 안에 담기에는 다소 힘겨운 크기의 성물을 소중히 쥐며, 사샤는 경량화 마법이 걸린 가방을 열어 보관함을 꺼냈다.

선황비가 위험을 무릅쓰고 빼돌린 목숨을 지켜야 한다는 책무, 정통 황위 계승권자로서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책무.

아이는 그 모든 책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기가 무슨 공부야.]

그건 따스한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손을 펼친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눈을 깜빡였다.

* * *

“리엔타 공작의 추측이 정말로 맞았을 줄은.”

방금 안토니오는 교황이 한 신관과 함께 신전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보고를 받았다.

혼자 중얼거리던 안토니오가 돌연 인상을 와락 구겼다.

“교황이 어떤 경로로 빠져나갔다고 하던가?”

일리든은 고개를 조금 더 깊게 숙였다.

[황제에게 보고하게.]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황실 기사단 소속이 된 기사가 건넨 종이에 적힌 서두가 이랬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세작이 배신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굳이 써야 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테다.

“신전의 입구를 지킨 기사가 묘연한 기색이 없었다고 보고한 바, 신전 내부에 포탈이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현재 포탈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신관의 고신을 허가한다. 포탈을 서둘러 찾아야 하네! 자칫하다간 리엔타 공녀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어. 포르테 경도 수색에 당장 합류……, 아니지. 리엔타 공작을 불러오게. 어쩌면 포탈이 위치했으리라고 예상되는 범위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초조한 기다림은 짧았다.

“제국의 광영을 뵙습니다.”

“예법은 생략해도 좋네. 리엔타 공. 조금 전, 교황이 포탈을 통해 신전을 은밀하게 빠져나간 정황이 포착되었네. 정녕 그대의 추측이 맞았던 모양이야.”

안토니오가 한껏 심각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렇다면 교황은 현재 리엔타 공녀에게 향하고 있겠지. 하여, 서둘러 추적해야 하는 상황이네. 포탈이 있을 장소로 생각되는 곳이 있나?”

즉답은 없었다.

제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다. 곧장 고할 테니 이 김에 리엔타의 정보력을 엿볼 생각이긴 했다.

무릇 가문의 정보력을 감추는 건 기사단의 전력을 비밀리에 두는 것보다도 중요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꼭꼭 싸맬 리는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전까지는 리엔타의 손이 닿지 못했나 보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인 일만은 아니었다.

교황을 어떻게 저지해야 하나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안토니오는 이어진 말에 굳었다.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리엔타의 기사들이 향하고 있으니까요.”

“……뭐?”

교황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안토니오도 방금 입수한 정보를, 제 저택에 틀어박혀 있던 공작은 한참 전에 들은 것이다.

아연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안토니오가 힘겹게 입술을 올렸다.

“공작이 용케도 직접 가지 않았군. 기사들을 많이 신용하는 모양이지.”

“각자 맡은 일이 있는 법이니 말입니다.”

벨리악 리엔타는 비록 그에게 굽힌 적은 없어도 불손하지는 않았다.

안토니오는 미묘한 간극을 눈치챘다.

그저 그뿐이라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손은 시종을 부르는 종으로 더듬더듬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멈춘 것은 물리적인 수단이 아니었다.

그저 목소리였다.

“폐하.”

벨리악이 선고했다.

“저는 이제 황제 폐하의 신하인 리엔타 공작이 아니라, 제 아이의 부친으로서 할 일을 하고자 합니다.”

* * *

나는 정정했다.

“신수님. 이곳을 빠져나가 신전으로 가게 되면, 입니다.”

“같은 말 아니더냐. 이 문은 열면 바로 신전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신전에서 바로 현신해 날아오를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신전의 부지는 넓고, 나는 확률에 기댈 수 없다. ……네게는 미안하구나.”

제 심장을 매만지며 무거운 어조로 말하던 신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또 뭐냐.”

“신수 님은 굉장히 이타적인 분이셨군요.”

“……네가 할 말이냐?”

떨떠름하게 말끝을 올린 신수는 한숨을 폭 쉬며 말했다.

“아무튼 들어나 보자. 무슨 생각이 있는 게야?”

나는 활을 쥔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너, 너, 너! 문을 부술 생각이었냐?”

이번에는 ‘저 무식하게 힘만 쎈 놈 같으니…….’라고 적혀 있는 듯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홈을 부술 겁니다.”

“결국은 부순다는 거잖아!”

“아이고, 머리야.” 하며 비틀거린 신수가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 네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겠다. 성물로서 기능하는 부분을 파괴해 평범한 문으로 만들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저건 결정체가 아니다. 성물을 어떻게 부숴!”

“괜찮습니다. 용의 피가 있으니까요.”

“……뭐?”

그리고 신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 * *

부자연스럽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멎었다.

언제 이변이 있었냐는 듯 세상은 이전처럼 돌아갔다.

그러나 라우드는 그럴 수 없었다.

‘엘루이든 대공이 어떻게…….’

제물로 사용하고도 남는 신성력을 발견했다고 기꺼워할 수 있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칼릭스가 대답했다.

언제 경어를 내려 두고, 사나운 기색을 드러냈냐는 듯 평이하기 짝이 없는 어조가 이어졌다.

“교황 성하 덕택이라고 해야 할까요.”

타인이 유보한 평화는 치욕적이었다.

그러나 라우드는 그것을 깨려고 들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만 끌면 됐다.

설마 대공의 신성력이 수많은 성혈과 신수의 것을 합한 정도보다 대단하진 않을 것이므로.

침착함을 되찾았기 때문일까. 그는 뒤편의 신성력을 이제야 눈치챘다.

‘아.’

라우드는 비소를 삼켰다.

성물에 대고 보고하라는 그 간단한 명 하나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머저리가 저기 있었다.

‘뭐, 흑마법사가 나타나기는 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더 기다릴 것도 없었다.

저 무능력한 신관을 파악해 미리 대비해서 다행이었다.

라우드는 품에 있는 성물로 손을 가져가기 전, 칼릭스에게 웃어 보였다.

“대공. 공녀는 이 길의 끝에 있습니다. 선택해야 하는 문은 좌측, 우측, 우측, 좌측, 그리고 우측이지요.”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대공이 받아들이든 말든 상관없다.

성물에 접촉하고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일 초, 어쩌면 그보다 짧은 순간.

‘……뭐지.’

그런데 그 찰나라고 일컬어야 마땅한 시간 속에서 라우드는 선연한 위화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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