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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18화 (218/232)

218화

상식적으로 그를 붙잡을 수 없는 게 분명한데, 대공이 그를 붙잡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붙잡지 않았다는 느낌.

처음으로 감지한 이것은 마치 피식자의 본능과도 유사했다.

“오셨습니까.”

그 생경한 감각은 저를 보고 곧장 고개 숙인 흑마법사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는 중에도 아교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어 불쾌감을 선사했다.

“선황자는요.”

“그것이……, 대공저에 없었습니다.”

“없었다고.”

흑마법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치만 살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겠군요.”

다른 장소에 빼돌렸을 가능성은 두지 않는 수장에게 충직한 흑마법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의문조차 갖지 않았다.

그저 물었을 뿐이다.

“의식은 계획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음.”

그때였다.

스으윽.

날붙이가 길게 스치는 소리가 돌연 울렸다.

기사로 변장하고 있던 흑마법사가 패용한 검을 라우드가 뽑아 든 것이다.

망설임 없는 손이 움직였다.

흑마법사는 예기치 못한 주군의 공격에 미처 대비도 하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쓰러졌다. 붉은 피를 토하면서도 그는 목이 졸린 소리를 기어이 내었다.

“왜, 왜…….”

“우스운 질문이네요.”

라우드가 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지며 웃었다.

“더러운 흑마법사의 쓸모가 이것밖에 더 되겠어요?”

저보다 큰 체구를 바닥에 그려진 육망성의 중심부까지 옮겼음에도 지친 기미 없이 라우드는 중얼거렸다.

“왜 추악한 것들은 이리도 목숨이 끈질긴지.”

한숨을 쉬며 검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선 순간이었다.

불현듯 엄습한 감각이 선득했다.

무려 신수의 심장을 마지막으로 보호하는 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 문은 예외다.

이상이 생긴다면 곧장 눈치챌 수 있도록 당대의 교황들이 문에 자신들의 신성력을 흘려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감각은, 문에 생긴 이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 * *

사람, 정정한다. 생물의 얼굴이 저렇게까지 희게 질린 건 처음 본다.

‘호, 혹시.’

나도 덜컥 가슴이 철렁해 물었다.

“용의 피는 어떤 성물보다도 위대한 것 아니었습니까?”

“마, 맞다.”

괜히 걱정했다…….

‘그럼 걱정하느라 신수가 저런 얼굴이 된 건 아닌가 보군.’

신기한 현상을 조금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화살을 찾기 위해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이던 때였다.

“그, 그래.”

몹시도 결연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내 이는 동글동글하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네 송곳니를 빌려야겠다.”

나는 허겁지겁 입을 가렸다.

“제 송곳니는 원래 있던 자리가 좋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냐. 나가야지!”

“저는 용이 아니라 피를 내도 소용없단 말입니다!”

“꽉 깨물어 보라고!”

“깨물 수 없, ……예?”

“자아. 여기 있다.”

신수가 눈을 꾹 감은 채 제 검지를 허공에서 파들거렸다.

“고통은 잠깐이지. 나는 긴 세월을 살며 여러 번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니 잠깐일 것을 안다. 비록 이런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은 처음이지만…….”

뭐라 중얼거리기는 하는데 영 이상했다.

아무튼 내 송곳니를 노리는 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안심하긴 이르다. 왼손으로 입을 야무지게 가린 채 오른손만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린 끝에 마침내 찾아냈다.

나는 땅에 파묻힌 보물을 꺼내 들어 햇빛에 비춰 보는 사람처럼 번쩍 팔을 들었다.

“이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물……, 어?”

“이걸로 부숴 보죠.”

“어……. 어…….”

신수의 얼굴이 불꽃보다도 새빨개졌다.

이번에도 다시 보기 힘든 신기한 현상이었지만 아쉽게 눈을 뗐다. 화살대를 손으로 말아쥐고 문으로 다가가려던 때였다.

“잠시만! 샤를리즈! 성물에 이상이 생긴다면 교황은 즉각 알아챌 테다.”

“기회가 몇 번 없다는 뜻이로군요.”

엄숙하게 걸음을 떼었다가 나는 후다닥 뒷걸음질 쳤다.

“이거, 신수 님이 해 주세요.”

“왜?”

“또 기절할 것 같습니다.”

“뭐? 알겠다.”

신수가 비장하게 화살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팍.

팍팍팍.

팍팍팍팍팍팍팍.

“……이 몸의 악력이 약한 모양이다.”

멋쩍게 돌아온 신수가 화살을 돌려줬다.

‘장갑을 껴도 소용 없었는데.’

또 기절했다가는 다시는 눈을 못 뜰 확률이 높다. 교황이 여기 오는 데 이틀이나 걸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망연하게 화살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활로 쏘아 볼까요.”

“뭐? 네가 무슨 신궁인 줄 아는……. 해 봐라.”

급격한 태세 전환을 마친 신수가 겨냥하기 좋게 비켜서기까지 했다.

활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다.

그러고는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신수 님. 보상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일의 성사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입니다.”

“성공만 하면 다이아몬드가 대수냐! 티아라도 주마!”

통 큰 신수 덕택에 궁술 대회의 기적이 재현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티아라. 티아라. 티아라!’

활시위를 놓았다.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문에 패인 작은 구멍에 정확히 꽂혔다.

“잘했다!”

들뜬 신수의 목소리와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파스스―

문에 기하학적 문양이 떠오르고, 그 문양대로 커다란 문이 조각났다.

귀퉁이부터 사라지는 파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길이 점차 뚜렷해진다.

“이제 가자꾸나!”

신수가 서두르라고 채근했지만, 나는 일단 아공간 주머니부터 열었다.

‘활 들고 다니다가 다리에 부딪히면 최소 골절이다.’

활과 화살을 주머니에 대충 던져 넣고 발을 뗐다.

“교황은 분명 내가 두드렸을 때부터 이질감을 눈치챘을 거다. 중간에 마주치게 될 수 있어. 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게 나을 게야. 신전으로 가게 될 테니 말이야.”

“칼릭스가 왔다고 하셨잖아요.”

“걔는 알아서 잘 빠져나갈 수 있다!”

“사샤가 있을지도 몰라요.”

신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는 대신 정면을 직시했다.

“교황은 침입을 확인한 즉시 오늘을 마지막으로 결정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흑마법사를 사용하는 데 주저가 없을 테죠. 사샤를 납치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칼릭스가 분명 사샤를 데려왔을 겁니다.”

“그럼 둘이 붙어 있지 않겠느냐.”

“계속 곁에 둘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교황이 사샤에게 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신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샤를리즈. 네가 모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교황에게 구미가 당기는 건 사샤가 아니라 너다. 신성력을 제대로 개화하지 못한 사샤가 아니라, 너란 말이야!”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따로 있다.

‘사샤가 각성하는 데 필요했던 조건이 모두 충족돼.’

교황이 만약 혼자 있는 사샤를 발견한다면…….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일이 제대로 끝난다면 신권은 전례 없이 하락할 테고, 사샤는 황권을 위협할 세력이 없는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굳이 개화하지 않아도 된다.

완전히 개화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고통을 영영 몰라도 된다.

그 작은 아이는 이제는, 이제야 아무것도 감내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신수가 먼저 움직였다.

“서둘러야겠구나.”

두 번째 문을 지나친 우리는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 *

교황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소년 신관은 비틀비틀 걸어갔다.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건만, 대공은 돌아섰다.

“잠시만요. 대공 전하.”

소년은 대공의 옷자락을 가까스로 잡았다.

“교황 성하께서 성혈을……, 그런 무도한 일을 하셨다는 게 정말인가요?”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아닐 거라고, 오해일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직감하고 만 것이다. 진실이라고.

소년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신성한 나무와도 관계가 있으신 게 맞습니까?”

그를 내려다보는 대공의 푸른 눈은 조금의 온기도 없이 건조했다.

절로 손을 떼고 말게 될 시선이었지만, 소년은 도리어 더 세게 잡았다.

살아온 이유는 지워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추악한 진실이었다. 유일한 구원의 실체는 말만 번지르르할 뿐,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졌다. 황급히 다시 주먹 쥐었지만 잡힌 건 허공뿐이었다.

마치 제 지난 나날 같았다.

그러나 감정에 매몰될 여유는 없었다.

대공을 다급하게 따라가며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침내 계단을 모두 내려간 대공이 멈춰 섰다.

“사샤.”

다정한 목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그리고.

“숙부님.”

자그마한 얼굴이 쏙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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