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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19화 (219/232)

219화

낯선 소년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사샤는 서둘러 말했다.

“샤를 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양순한 푸른 눈이 복도를 걱정스레 응시했다.

“그럼 마중하러 가 볼까?”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가방끈을 꼭 쥐고 있던 손 하나를 놓았다.

숙부님의 커다란 키에 맞추려면 마치 벌서는 것처럼 팔을 높이 들어올려야 했지만, 아이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잡아 주던 커다란 손이 이번에도 따뜻한 온기를 전달해 주었다.

그것을 사샤는 꼬옥 쥐며 야트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그들 앞에 두 개의 문이 나타났다.

“신관. 오른쪽 문을 열면 돼.”

소년은 멈칫했다. 교황이 언급했던 문은 분명 왼쪽이었다.

머뭇거리고 있자 칼릭스가 낮게 웃었다.

“내게 한 질문의 답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던가?”

“……저 문은 신전과 이어져 있군요.”

동요 없는 남자의 입매를 보며, 소년은 용기를 끌어모았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무감정한 시선이 닿았다.

“수많은…….”

소년은 저보다 더 어린아이의 존재를 깨닫고 뒷말을 삼켰다.

“찾는 사람이 없어야 했을 테니 거리의 걸인이나 보육원 소속이었겠지요. 그중에는 제가 아는 얼굴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공이 납득할 수 있을 이유를 차분히 읊었다. 행여 눈물이 또 차오를까 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소년은 절박하게 물었다.

“제삼자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 * *

천천히 느려지던 걸음은 종내 멈췄다.

유일하게 움직이던 신수도 내 앞에 도착하자 멈춰 섰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을 때, 교황이 입을 움직였다.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더냐.”

안광이 형형한 주제에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교황은 미소 지었다.

내 앞을 가로막은 사람이 있는데 모든 장면을 어떻게 이리도 똑똑히 볼 수 있느냐 하면은 그 사람의 키가 내 가슴께에도 안 닿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수가 막아 준 보람도 없이 내 급소는 여전히 몽땅 드러나 있는 것이다. 비열하게 허리 숙여 급소를 가리는 대신 가만히 상황을 관망했다.

“밀실을 탈출하기 위해 색다른 방법을 고안해 내셨더군요. 흥미로웠습니다.”

“네 감상 따위 궁금하지 않다.”

“어째서 이 제국을 유지하고자 하십니까? 제국은 부패했고, 수도의 외곽에는 배곯은 이들이 넘쳐나며, 황제랍시고 있는 건 제 친형을 죽인 패륜아입니다.”

영 수상했다.

‘신수가 착실히 반응할 수밖에 없는 말을 꺼내 들고 있잖아.’

과연 신수는 주먹을 꾹 말아쥐며 억눌린 소리를 내었다.

“그러는 너는 도대체 무엇이 그리 다르다고?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죄 없는 목숨으로 성혈을 제작하는 무도한 짓거리마저 벌이지 않았어!”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습니다.”

‘흠.’

개소리까지 지껄이고 있다.

“그럼 네가 희생하지 그랬느냐. 네가 희생했다면 나는 네가 했던 말들을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화는 점차 깊어졌고, 내 의구심도 마찬가지로 깊어졌다.

슬쩍 주변을 둘러봤으나 딱히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한 번 지나친 길이었지만 이 회랑 자체가 단조롭고 평범한 구조였던 덕택에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었다.

‘벽에 태피스트리라도 걸려 있었으면 그 뒤로 뭐가 있나 했을 텐데 말이다.’

혹시 장치가 숨어 있나 싶어서 진짜 벽이 맞는지 눈에 불을 켜 봤다.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려고 하는 건가?’

“그만해라! 궤변은 그만해!”

신수가 발을 쿵 굴렀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귀에 익은 소리가 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머쓱하지만 이전 생을 기억하기 전 ‘샤를리즈’ 시절에 발을 굴러댄 적이 하도 많아 차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미묘하게 텅 빈 소리.’

완전히 빈 건 아니다. 얼기설기한 느낌의…….

‘이거 혹시.’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작은 손을 낚아챘다.

“너는 정말로, ……샤, 샤를리즈?”

며칠간 우리의 신의가 돈독해지기는 했는지 신수는 이유를 묻는 대신 잠자코 따라와 주었다.

들려오는 신수의 숨소리가 컸다. 고작 이 정도 달리기만으로 숨소리가 저렇게까지 씨근덕거리지는 않을 테다.

‘일부러 흥분시킨 거야.’

조금만 더 가면 아까 지나온 문이 있다.

‘신수가 오답인 문을 열도록 해서 신전으로 이동시키면 돼.’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따라붙은 것은 그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겠죠. 다만, 한 가지 알려 드리지요. 공녀, 안타깝게도 소용없습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나는 애초에 누가 리엔타 공작을 죽이려고 하는지 찾아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공작이 자연사할 때까지 공작저에 칩거시키고 상시 경비 태세를 가동시키면 되니까.

마침내 시야에 문이 걸렸다.

힘껏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비릿한 향이 입 안 가득 들어찼다.

* * *

대공의 푸른 눈이 그를 무감정하게 응시했다.

그 시선 앞에서, 소년은 목울대를 크게 일렁였다.

교황의 곁을 지켰던 측근이 갑자기 돌아섰다. 연막이 아니라고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호기는 잠시 잊는 게 좋겠군.”

과연 짤막하게 대꾸한 대공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사라졌다.

닫힌 두 개의 문 앞에서, 소년은 오래도록 서 있었다.

* * *

안토니오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저는 이제 황제 폐하의 신하인 리엔타 공작이 아니라, 제 아이의 부친으로서 할 일을 하고자 합니다.]

마땅히 지어야 할 표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여유로운 척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무슨 뜻이냐고 운을 떼 보려고 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올린 입꼬리는 금세 다시 축 내려가 버리고, 하려던 말은 목 중간에 걸려 거기에만 뒤엉켜 있었다.

굳이 묻을 필요 없이 이미 저 말을 이해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지. 그럴 리가.’

안토니오는 제 예감을 황급하게 반박했다.

여기는 황성이다.

황제의 본거지라는 소리다.

아무리 금권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가문을 통솔하는 가주라고 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서 선전 포고할 리가 없는 것이다.

“교황이 리엔타 공녀에게 현상금을 걸라고 해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군. 하지만 그만두는 게 어떤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불안감 때문일까.

말이 자꾸만 길어졌다.

“교황은 나도 당연히 좌시하지 않을 걸세. 그러니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야 하지 않겠어. 공녀도 그것을 바랄 테지.”

“폐하.”

“그래, 말해 보게.”

“제가 폐하를 구해 드린 날은 협곡에 은닉해 있던 적군들이 합류해 아군이 수세에 몰렸을 때였지요.”

그랬다.

충분히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말에 그대들은 겁이 너무 많다며 적군의 후발대가 합류하기 전에 당장 쳐야 한다고 주장한 게 바로 안토니오였다.

결과는 대패였다.

상대의 전술에 제대로 넘어간 것이다.

“무거운 검도 버린 채 후방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는 폐하를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켜 드리느라 그날 저는 오랜 전우들을 잃었습니다.”

벨리악이 소슬하게 웃었다.

“그래서 면책권을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그것이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니 말입니다.”

“리엔타 공작.”

‘정신없이 도망쳤다’라는 말을 들은 시점에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안토니오가 짓씹듯 경고했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벨리악이 입을 뗐다.

“그때의 충정을 긁어모아 드리는 마지막 간언입니다. 피로 물든 제위에 선황자 전하께서 올라가시지 않도록, 스스로 물러나십시오.”

“벨리악 리엔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안토니오는 끝내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그대가 어떤 망발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교황이 폐하에게 건 목줄을 입수했습니다.”

입을 벌린 그대로 안토니오는 정지했다.

“천륜을 어긴 것도 모자라 권력에 눈이 멀어 어린 조카마저 죽이려고 한 오명을 달고 처형되는 대신 스스로 내려오는 모양새가 더 좋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내려오더라도 곱게 살려 둘 생각은 물론 전혀 없지만 말이다.

벨리악은 눈을 크게 홉뜬 안토니오를 보며, 저 머저리와 전혀 닮지 않은 그의 혈육이 공작저를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황제에게 청한 가택 연금이 진행됐던 어느 날이었다.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테라스에 침입한 남자는, 어둠을 틈타지도 않고 삼엄한 경비를 뚫었을 당시의 모습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을 만큼 선량하게 웃었다.

[샤를리즈에게 가 보려고 합니다.]

[샤를이 있는 장소를 알고 계신 겁니까?]

[짐작 가는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벨리악은 안도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 말 하나를 하시고자 찾아오진 않으셨겠지요.]

[교황에게 영상 마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황제가 선황제 폐하를 암살하고자 모의한 장면을 담은 마도구입니다. 교황이 곧 자리를 비울 테니 그때 그것을 빼내 주세요.]

벨리악이 눈을 길게 감았다. 황제의 욕심은 그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바였다.

건강했던 선황제의 급사는 의문점이 많았지만, 벨리악은 황제를 의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의심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다시 드러난 시야에 눈을 감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내부가 잡혔다.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살면서 아무것도 잃어본 적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이내 몹시도 당연한 사실 하나를 불현듯 깨달았다. 칼릭스 엘루이든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벨리악은 그를 보아 왔다.

그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건, 자신을 향한 황제의 볼썽사납고도 원색적인 견제에도 단 한 번도 동요하지 않은 어른스러운 일면 때문인지도 몰랐다.

황제는 샤를리즈에게 헛된 짓을 하려고 했고, 모두 실패했다. 벨리악은 딸을 잃지 않았고, 칼릭스는 유일한 보호자를 잃었다.

그랬기에 벨리악은 존중하기로 했다.

[온건한 방식을 택하려고 하십니까.]

그에 눈매를 가늘게 접은 칼릭스가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새벽에 황제궁으로 암살자를 밀어 넣었겠지요.]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벨리악은 몇 번이고 반복한 소망을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샤를리즈. 대공을 무사히 만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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