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흑마법이 발동된 거야.’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았다.
손끝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문을 열었지만, 정작 걸음을 멈췄다.
뒤로 뻗은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려던 순간, 돌연 몸이 밀려났다.
거친 손길은 아니었지만 몸에 힘이 빠진 통에 크게 휘청이고 말았다.
머리카락으로 시야가 반쯤 가려졌으나 걷어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좁혀지는 문틈 사이로 본 앳된 얼굴은 식은땀을 흘리는 채로도 웃고 있었다.
“너는 할 만큼 했다.”
터엉.
그리고 문이 공허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
신수는 샤를리즈가 열 수 없도록 문에 등을 대었다.
그를 겨냥한 이 흑마법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신성력을 운용하면 고통을 주는 것이다.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지만 신수는 존재 자체가 신성력이다.
그랬기에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는 지금도 끔찍한 격통이 온몸을 물어뜯을 기세로 씹어댔다.
“쓸모없는 일을 벌이셨군요.”
“너는 모르지? 걔가 얼마나 영특한지 말이다. 분명 신전으로 갔을 게다.”
신수는 피식 웃었다.
“두 군데로 나뉘었으니 네 계획이야말로 쓸모없어졌구나.”
“아시지 않습니까? 저를 자극해봤자 신수 님께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요.”
언제 입매를 굳혔느냐는 듯 라우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공녀가 신전으로 향했다고 하면 신수 님 역시 가시면 되는 일이지요.”
“너,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신수가 입 끝을 말아 올렸다.
“샤를리즈의 신성력에 걔가 관여한 바는 없다. 원래 있었어.”
“우스운 말을 하시는군요. 태중에 있을 때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랬겠지.”
덤덤한 대꾸에 라우드는 턱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한데 너도 알지 않아? 기억이란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는지 말이다. 그때는 기억하지 못했고, 지금은 기억했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변은 없어요. 일을 설계할 때 공녀의 신성력을 계산한 적 없습니다.”
“기억을 건드릴 힘. 감정을 지울 힘.”
신수가 눈을 길게 감았다.
“칩거를 깬 이유가 뭐였느냐. 비단 저뿐만 아니라 다른 힘도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야.”
“이 이야기를 더 이어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라우드가 웃었다. 입매가 비틀린 미소였다.
그 순간이었다.
아직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아챘다.
“대화를 더 이상 나눌 시간이 정말로 없겠어요.”
라우드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 기저에 도사린 것은 희열이었다.
“공녀의 거취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으니 어찌하실 텝니까?”
저를 보고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신수는 담담하게 시선을 돌렸다.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자 주먹 쥐는 손을 흥미롭게 바라본 라우드가 품에서 성물을 꺼냈다.
“감사 인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커다란 빛이 터지고, 인영이 녹아들 듯 사라졌다.
“신수 님의 힘이 의미 없게 사용되지 않으리라는 약조는 하나 드리지요.”
마침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무도 없는 복도뿐이었다.
신수는 이제야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래서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이 인간 세계에 있나 보다.
길게 감은 시야에 언젠가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 자체를 돌리는 것은 그래, 네 힘으로는 균열이 생기지 않을 게다.]
[내 질문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억을 지워도 영혼은 온전할 수 있나?]
[……원래는 그렇다. 하지만 그 애의 과거는 온통 너로 얽혀 있구나. 제 부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면 해 봐라!]
[기억은 안 되겠군. 조언은 고맙다고 말하지.]
[잠시만! 너, 모르는 거 아니지? 두 번이다. 벌써 두 번이야. 시간이 엉키면 그 애에게 어떤 이변이 생길지 알 수 없다.]
[‘나’를 기억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거라면, 상관없어.]
얼핏 드러난 진심은 피상적인 여유마저 사라져 있었다.
신수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돌린 채 “네 맘대로 해라!”하고 눈을 감았다.
[기억해라. 시간 전체를 돌리는 건 균열이 생기지 않아. 하지만, 개인에게 손을 댄 순간 흔적이 남는다. 누군가 알아챌지도 모른다.]
[환생할 기대는 버린 지 오래야.]
걸음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신수는 지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래된 친우가 시선 끝에 있었다.
“교황은 성물로 달아났어. 너와 나를…….”
작은 아이를 흘깃 쳐다보곤 뒷말을 삼켰다.
“이해했어.”
“그럼 어서 도망쳐라. 신전으로 가지는 말고. 그곳에 샤를리즈가 있다.”
“샤를리즈는 신전에 없을 거야.”
“뭐? 그럼 어디로 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을 크게 홉뜬 신수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더듬더듬 문고리를 잡았다.
“바보 같으니! 영특하지 않다! 조금도 똘똘하지 않아!”
씩씩거리던 숨소리는 금세 잦아들었다.
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 * *
내딛던 걸음이 멈춘 건 잠시였다.
동요한 흔적 따위 없는 얼굴로 라우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에 있었군요. 오는 방법은 어떻게 알았죠?”
“늦었네.”
라우드는 입매를 굳혔다.
어쩐 일인지 흰빛으로 그려져 있던 육망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바닥만 있었다.
“곧 죽을 테니 예의범절은 버리겠다, 이건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으나 내심은 복잡했다.
신수의 도발에도 여유로울 수 있던 이유가 있다. 문은 여는 방향에 따라 도착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녀는 마치 목적지가 이곳임을 알고 있는 듯 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시전은 어떻게 깨뜨렸고?’
묘한 이질감이 손끝을 타고 기어올랐다.
그랬기에 오기로 웃었다.
그러자 도리어 불유쾌해졌다. 사실은 그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 자체가 말도 안 되었으므로.
공녀는 홀로 무턱대고 들이닥쳤다. 신성력이 대단하다고 해 봤자 라우드도 만만치 않다.
가소롭다는 생각이나 들어야 마땅했다.
라우드는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싸늘하게 주시하는 눈은 여전히 동요 한 점 없었다.
직전까지 그는 분명 동요했다.
그러니 샤를리즈 역시 잔뜩 동요하는 게 맞다. 저렇게 무감한 눈을 하는 게 아니라.
라우드가 입매를 비틀었다.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답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무리 신수의 계약자라고 해도 신수를 이곳으로 부를 수도 없는…….”
그때, 샤를리즈가 움직였다.
느릿하지만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착실히 거리를 좁혀왔다.
“계속 생각했어.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이야.”
불시에 목깃을 틀어 잡히고 강제로 눈높이를 맞추게 됐다.
그래봤자 강한 악력은 못 되었다. 금세라도 벗어날 수 있지만 라우드는 그대로 있어 주었다.
그렇다고 멋모르는 철부지의 손속이 유쾌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부친의 면책권을 너무 믿고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제국을 없앨 생각이면서 면책권은 무슨.”
샤를리즈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너는 나와 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지만,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은 없어. 그건 너무 간단하잖아. 안 그래?”
라우드는 사나운 빛이 감도는 녹안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봤다.
단순히 자신뿐 아니라 공작을 처리하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그래, 공녀는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도대체 뭐지?”
끝내 소리 내어 곱씹고 말았다.
계획이 차례차례 무산됐던 순간이 돌연 떠오르고 만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수단은 인간의 눈과 귀다. 라우드 혼자만 간직한 정보까지 알 수 있던 경로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상식을 벗어나는 ‘경로’를 이미 알고 있다.
‘신수가 했던 말이 이것이었나.’
라우드는 제 목깃을 틀어쥔 손을 감아쥐었다.
“제물로는 신수까지 필요 없겠군.”
차라리 하지 않았을 게 더 나은 말이었다.
분명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여유라고는 전혀 없이 메마른 목소리였으니까.
* * *
텅 빈 복도를 보며 신수는 입을 달싹였다.
이 기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린 목소리가 사위를 가르는 것도 아스라이 들리기만 했을 뿐이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샤를 님과 함께 돌아오실 거지요?”
“그래.”
아이의 동그란 뺨이 위로 올라갔다.
“빨리 올게.”
“천천히 오셔도 돼요.”
“음. 그러면 샤를에게 혼날 것 같은데.”
“제가 보호해 드릴게요.”
칼릭스가 작게 웃으며 “응. 고마워.”하고 대답했다.
“사샤를 맡기지.”
“……알겠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신수는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성혈이 파괴된 것을 알고 있나 보군.’
하긴, 그것을 부순 게 활이었다.
교황은 현재의 사샤로는 성혈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러니 아이가 휩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속이 왜 아직도 이리도 답답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신수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
자그마한 고통이 느껴지고서야 눈치챘다. 그를 옥죄던 흑마법이 사라졌다고.
“신전으로 가랬더니 왜 엉뚱한 데로 가.”
신수는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얌전히 대피해 있을 것이지, 왜 거기는 쫄래쫄래 가서 용의 속을 이렇게 뒤집느냔 말이다.”
칼릭스가 사라진 문을 길게 바라보기만 하던 얼굴이 어느 순간 일그러졌다.
“바보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