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신수는 입술을 깨물며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이러고만 있을 시간이 없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샤를리즈와 칼릭스의 손이 현재 닿지 못하는 지점.
흑마법의 본거지를 찾아 소탕해야 했다.
그때였다.
“토끼풀. 나비. 바람…….”
유순한 얼굴의 아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푸른 눈이 한 번 깜빡이고.
“제 곁을…… 지켜주신 분이에요?”
신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멀거니 아이를 계속해 바라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범람하는 강처럼 수위를 높여 가기만 했다.
* * *
시간을 조금 돌려, 복도에 홀로 남겨졌을 때.
“어쩔 수 없나.”
나는 다른 쪽 문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고도 바로 돌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이 정도면 신수도 감안하겠지?’
어쩐지 신수라면 그가 없던 때 일어난 일도 다 알 것만 같단 말이다.
이것이 바로 내 등짝을 보호하려는 자그마한 몸부림이다.
“아니야! 도저히 안 되겠어! 나만 도망칠 수는 없어!”
잽싸게 손을 떼려던 순간, 익숙한 감각이 문고리에 닿은 손끝부터 전달됐다.
그렇다.
또 턱에 피가 묻게 되었다는 소리다.
‘흑마법이다.’
신전의 사람들을 생각해 제 목숨도 내버리려던 신수를 떠올렸다.
“……어쩔 수 없나.”
힘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종착지는 신전이 아니었다.
척 봐도 수상한 공간이었다.
은은한 빛이 이루는 면으로 이어진 기둥의 가운데, 숨이 간당간당한 사내가 있었다.
눈을 부릅뜬 채 문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거친 목소리로 금세라도 끊어질 듯 말을 이어갔다.
“네가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다지. 어차피 죽을 거, 도박을 건 보람이 있군.”
킬킬거리던 흑마법사는 그대로 숨을 거뒀다.
동시에 희붐한 빛을 띠던 면이 번쩍였다.
한순간 폭발하는 광폭한 빛에 시야가 어지럽게 이지러진다.
눈을 찡그린 채 주머니를 허겁지겁 뒤졌다.
혹시 누구의 머리를 가격하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챙겼던 짱돌이 손에 잡혔다.
후다닥 던지자 주먹만 한 돌은 가루도 남지 않고 허공에서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죽을 뻔했네.”
앞으로도 매사에 철저하게 준비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다섯 발짝 물러섰다.
“자아. 이제 이걸 어쩐다…….”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막막하게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눈꺼풀을 여닫을수록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 감각 역시 익숙한 것이었다.
“잠시만……, 이거…….”
‘죽으라는 겁니까?’는 아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을 것 같다.
그전에 의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 * *
[샤를리즈. 명심해라. 네 잘못이 아니야.]
웃긴 이야기였다.
그녀의 잘못이 맞았다.
거대한 가문의 가주가 이리도 비참한 최후를 기다리게 된 것은, 그녀의 죄였다.
[선황자를 감히 살해하려던 죄. 목숨으로 묻겠다.]
교황과 황제의 합작이었다. 이 기회로 면책권을 회수할 속셈이다.
해결법은 간단했다.
그녀가 죽으면 됐다.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말아라!]
공작은 전에 없이 분노했다.
면책권을 사용해 그녀를 구명했지만, 그뿐이다. 리엔타는 한순간 추락했다.
엘루이든 대공가의 암묵적인 공적이 된 리엔타와 더이상 왕래를 원하는 가문은 없었다.
가진 것은 돈뿐. 누구나 손가락질해도 되는 가문이 되어버린 거다.
면책권도 잃었겠다 눈엣가시가 된 가문을 대공이 어떻게든 무너뜨릴 것이 분명하므로.
과연, 리엔타 공작에게 반역 혐의가 세워졌다.
조작된 증거는 빠져나갈 빈틈이 없었다.
무려 공작가의 가주이니만큼 아직은 자택에 감금된 상태지만 곧 축축하고 불결한 지하 감옥으로 비참하게 끌려가게 될 테다.
[아버지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저를 내려다보는 푸른색 눈이 어떤 빛깔을 띠고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샤를리즈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그러쥐었다.
[알잖아. 선황자 전하께 그런 저의로 접근한 건 맞지만, 시도한 적 없어. 내가 죽을 테니 아버지는 놓아 줘.]
[애석하게도 이 일은 내가 관여한 게 아니라서. 그런데.]
입 안에서 굴리듯 어딘지 느린 말소리였다.
[이럴 때마저 너는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군.]
[볼썽사납게 매달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거라면, 이미 하고 있어.]
[…….]
[내가 죽겠다고 하잖아.]
[죽는다고.]
칼릭스가 문득 뇌까렸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어딘지 분노한 듯했다.
[네가 죽는다고 해도 이번뿐이야. 황제는 공작을 언제고 죽이려고 들 테고.]
[…….]
[그럼 너는 이미 죽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온 공작저는 지나치게 적막했다.
[아가씨…….]
초췌한 안색으로 집사가 말을 흐렸다.
[말해.]
[아가씨…….]
저 한 단어만이 유일하게 발음할 수 있는 것이라는 듯 집사는 흐느꼈다.
어떠한 예감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아니야.]
그러나 내딛는 걸음이 갈수록 빨라지는 이유를 몰랐다.
정신없이 달려가 마침내 품에 안은 몸은 차가웠다.
싸늘해서,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도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유일하게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그때 떠오른 것은, 아카데미의 비밀 서고에서 보았던 고서적이었다. 칼릭스의 뒤를 쫓아다니다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다.
영 수상쩍어 홀로 찾아갔을 때는 볼 수 없던 그 이상한 책.
단 한 번 읽었을 뿐이지만 필요한 건 모두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를 살려.]
이 의식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샤를리즈는 기꺼이 그 몫을 할 작정이었다.
[대신 내가 죽을 테니.]
시야에 빛이 번졌다.
의식이 제대로 발동됐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빛이 그녀를 잡아먹으며 완성될 테다.
완벽한 죽음을 앞두고 마음은 기묘하게 평안해졌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이 안도라는 건, 낯설지만 나쁘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에서도 세상을 눈에 담고 싶지 않다는 듯 굳게 내리감은 눈꺼풀이 돌연 위로 올라간 것은 잠시 뒤였다.
콰앙―!
빛기둥에 균열이 갔다.
* * *
눈을 떴다.
눈꼬리를 타고 길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래. 내가 해이했지. 너는 내게 손 한 번 내민 법이 없었는데, 이번이라고 다를 리가.]
어렴풋이 들렸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켰다.
‘저거, 아직은 깨뜨릴 수 있어.’
손에 신성력을 싣고 그대로 빛을 내리쳤다.
몇 번이고 반복하느라 손이 아릿했지만 균열은커녕 실금도 가지 않았다.
‘대체 언제.’
입술을 깨물고 다시 주먹으로 내리치려던 순간.
따스한 온기가 손등 위로 포개진 듯했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팔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렸다.
그리고, 쩌적―
‘됐다.’
시작은 실금이었다.
그것이 기둥을 온통 잡아 삼키기까지는 겨우 눈을 깜빡일 찰나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불규칙한 무늬로 뻗어나간 선으로 얼룩진 빛은 잦아들다 종내 사라졌다.
그렇게 지금이다.
“제물로는 신수까지 필요 없겠군.”
라우드가 내 손목을 틀어쥐었다.
“너 하나로 충분하겠어. 네게는 다행인가? 신수도, 선황자도 무사하게 되었으니.”
원래는 교황을 마주치기 전에 신수의 심장과 성혈만 들고 튀려고 했다.
신수의 증언을 내세워 교황을 처형하고, 신전의 위상을 추락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마주쳐 버렸다.
대뜸 멱살부터 잡은 데에 내 사감이 아주 매우 몹시 실렸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아무튼 우위에 있는 척 막무가내로 굴고, 턱관절을 혹사시킨 보람이 있었다.
‘초조해지고, 조급해졌어.’
언제고 빈틈이 생길 테다.
그때는 나보다 큰 키도, 강한 완력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지난 생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며 얻은 교훈 중 하나였다.
그리고 적기는 빠르게 찾아왔다.
“피를 흘릴 필요는 없겠군. 이미 엉망진창이니.”
가늠하듯 바라본 라우드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움직이면 곤란하니, 처치는 해 두는 걸로 할까.”
그가 검을 발끝으로 차 허공에 띄웠다.
시선이 잠시 나를 비껴갔다.
지금이 바로 적기였다.
나는 눈꺼풀로 줄곧 가리고 있던 눈으로만 웃었다.
쿵!
“하.”
라우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우스운 속셈…….”
주먹으로 미끈한 뺨을 후려쳤다.
“아까는 아버지 몫이고, 이번은 사샤야.”
옆으로 돌아간 얼굴이 다시 나를 향했다. 입 끝에 피가 맺힌 채 라우드가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죽기 전 소원 풀이인 듯하니 이 정도는 들어줘야지.”
“아무리 쓰레기라도 교황이라 처형이 확정된들 고신은 허가되지 않을 테잖아.”
바짝 고개를 숙여 눈을 맞댔다.
“그게 아쉬워져서 말이야.”
* * *
라우드는 목으로 웃었다.
저 자신만만한 여자에게 진실을 알려주면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해졌다.
“너, 네 잘난 약혼자를 기다리는 듯한데 이를 어쩌지.”
그가 턱짓했다.
“네가 들어온 문은 단발성이야. 네 약혼자는 동일한 방법으로 들어올 수 없다.”
아마 지금쯤 미로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다시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퍽 오래 걸릴 터다.
그러니 그사이에…….
“무슨 소리야.”
두 눈만 사나운 빛이 아로새겨져 있을 뿐, 줄곧 무표정하던 미형의 얼굴이 기울어졌다.
라우드는 의아해져 눈을 좁혔다.
그 순간, 팽팽한 공기를 가르며 울린 목소리가 있었다.
“손은 괜찮아, 샤를?”
늘 정연한 어조는 이번에도 그랬다.
“……언제…….”
“조금 전에.”
와락 얼굴을 구긴 라우드에게 대답해 준 사람은 샤를리즈였다.
칼릭스는 정작 샤를리즈의 손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손등을 조심스레 감싼 그 온기가 익숙했다.
문득 웃은 샤를리즈가 다시 말했다.
“아니, 너보다 한참 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