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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22화 (222/232)

222화

라우드는 바닥을 긁었다. 손가락 끝에 피가 맺힌 것도 몰랐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온갖 도리를 내버렸다. 사람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교황이라는 찬란한 자리에 앉아 사특한 것들을 가까이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원대한 숙원의 목전에 겨우 다다랐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라고?’

상응할 대가. 딱 그것 하나만이 부족했을 뿐이다.

심지어 이제는 모두 충족됐는데.

시뻘겋게 물든 시야를 라우드는 눈을 감아 가렸다.

그리고 다시 향한 시선 끝에 한 사람이 걸렸다.

‘……그래.’

대공만 없으면 된다.

제물을 지키려고 하는 방해꾼만 사라지면 승산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품속에 있는 이동형 성물의 질감이 선연했다.

쉽게 마음이 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계단 앞에서 보았던 대공의 눈. 그것 때문에.

붙잡을 수 있음에도 가만히 놔 주는 듯했던 그 시선.

‘하지만 이것 말고는 없다.’

라우드는 인정했다. 이 방법 말고는 이 위기를 탈피할 수 있는 수가 없다고.

‘완벽히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삼사 초.’

그동안만큼만 대공의 눈을 돌려놓으면 된다.

‘당장 대공의 등 뒤로 소란을 만들어 눈을 돌리게 한다고 한들 신성력을 느끼면 곧장 반응할…….’

[선황자는요.]

[그것이……, 대공저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겠군요.]

“…….”

라우드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신수는 현재 선황자를 데리고 이동할 여력이 없을 터.’

추측에 기반한 확률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기대볼 건 어차피 저것밖에 없었다.

그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 * *

“제 곁을 지켜주신 분이에요?”

신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뜨거운 불덩이가 목에 걸린 듯했다.

차마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그것은, 그저 존재감만이 선명했다.

“맞으시지요?”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영특한 아이는 그것을 이해했다.

“감사했어요.”

아이가 들에 핀 꽃처럼 웃었다.

모든 인간이 저마다 하나씩 가진 표정.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별다를 것 없는 그 미소가, 이리도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그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음.”

아이가 눈을 깜빡깜빡했다.

그리고 다시 포스스 웃었다.

“그냥요. 그냥, 알았어요.”

이유 없이 알았다는 뜻이다.

아주 오래전 나눴던 대화가 불쑥 떠올랐다.

[이유 없이 우연히 만난다는 건 운명 아니냐?]

[우연이다.]

[왜?]

[그게 좋으니까.]

신수는 우연을 기꺼워하던 누군가를 비로소 이해했다.

그때였다. 그는 예상보다 이른 움직임을 포착했다.

문이 열리고, 은색 머리통이 슬쩍 보였다.

“야, 너!”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자 제 잘못을 아는지 샤를리즈가 뒷걸음질 쳤다.

문을 넘어 벽까지 몰아세우고 발꿈치를 바짝 든 채 신수가 와락 외쳤다.

“괜찮냐?”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얼굴은 과연 상처 하나 없었지만, 신수는 면밀하게 관찰했다.

“손이 왜 이래!”

“아.”

손날이 아주 푸르딩딩했다!

“하여간 무식한 방법밖에 모르는구나!”

“친구를 욕하는 것은 나쁜 행동입니다.”

“걱정시키는 건 좋은 행동이라더냐?”

툴툴대며 샤를리즈의 손날을 제 작은 손으로 덮은 신수가 “됐다.” 하곤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도 시선은 고정한 채 못마땅하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일단 고통만 막아뒀다. 치료는 돌아가서 받아야 한다.”

완벽하게 치유도 하지 못하다니 이런 굴욕이 또 없었다.

혹시 신성력을 크게 운용해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아껴 써야 된다고 몇백 년 전의 그에게 설명한다면 콧방귀나 뀔 텐데.

“감사합니다.”

“됐다.”

팽 돌아선 신수가 먼저 걸음을 뗐다.

“교황은?”

“곧 나올 거예요.”

“걔는?”

“같이 있습니다.”

“……혹시 죽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러냐?”

심드렁히 대꾸하며 신수는 특정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계속 살피고 있었건만 대체 어느 틈에.’

샤를리즈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아이의 근처에서 신성력이나 흑마법의 징조가 돌연 나타나진 않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어떻게.

순식간에 희게 질린 얼굴로 신수가 더듬더듬 말했다.

“큰일 났―.”

―다.

“컥.”

……샤를리즈에게 뭔 일이 나기는 했다.

* * *

아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은색 머리카락이었다.

밤하늘에 총총 뜬 별처럼 밝은색. 아무리 어두워도, 아니 어두울수록 눈에 띄는 환한 색깔.

눈에 담는 것만으로 안도하게 되는 빛.

아이는 그 빛을 향해 언젠가처럼 달려갔다.

“샤를 님.”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는데도 샤를리즈는 그때처럼 단단히 지탱해 주었다.

헐떡이던 아이는, 그래서 자그마하게 웃었다.

“샤를 님. 어디 아프시진 않은 거죠? 괜찮으신 거지요?”

몸이 불쑥 위로 올라갔다.

일견 무뚝뚝한 녹안과 일직선으로 마주쳤다.

그러나 아이는 저 눈에 담긴 온기를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제 얼굴과 몸을 확인하는 시선이 이렇게나 따뜻했다.

“사샤가 걱정해 준 덕분에.”

“정말로 다행이에요.”

진심으로 안도하며 사샤는 팔을 뻗었다. 아주 어린 아이처럼 보여도 괜찮았다.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포근한 향이 나는 몸을 있는 힘껏 안았다.

“이제 슬슬 나가자꾸나.”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사샤는 작은 가슴팍을 뗐다.

“내려 주세요.”

“싫어.”

“무거우실 텐데…….”

“그건 맞아. 아주 흡족한 방향이지.”

피식 웃은 샤를리즈가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엉거주춤 밑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든 사샤가 눈을 깜빡였다. 망설임은 짧았다.

아이는 제 볼을 샤를리즈의 어깨에 조심스레 붙였다.

사실은 이 품에 계속 있고 싶었다.

* * *

간헐적 체력 단련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띵해지는 가파른 계단에 숙연했던 것도 잠깐. 어떻게 숨 한 번 흐트러트리지 않고 올라온 것이다.

“이제 여기서 기다려라. 나는 신성한 구역에 감히 기어든 흑마법을 파괴하겠다.”

“그러십시오.”

편하게 하라며 세 걸음 물러선 때였다.

“아니다. 생각을 바꿨다.”

고개를 홱 돌린 신수의 눈이 야광석처럼 빛났다.

“원래 이런 건 요란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합당한 상을 받는다!”

‘그거 줄 사람 곧 죽을걸요?’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만큼 야심 찬 눈이었다…….

“그리고 교황, 아니 저것도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 증거를 날려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이미 증거는 충분하기도 하고 조용히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크게 키우면 귀찮아지기만 한단 말이…….

나도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닙니다. 크게 키우는 게 좋겠습니다.”

“역시 똘똘한지고! 너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신수가 맞장구쳤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바르게 살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샤를리즈’를 진창에서 꺼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악명을 수습할 수 있는 건 그에 견주는 선행뿐이다!

그렇다면 보상은 다 거절해야 할 테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다.

어차피 상을 주게 될 사람은 사샤 혹은 칼릭스일 테니 내 가족 주머니 털어먹는 짓밖에 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우리 주변에 느껴지는 흑마법의 기류는 모두 파훼하도록 하마.”

“아주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나는 다시 세 걸음 물러났다.

신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잦아들기 시작했을 무렵.

저 멀리, 칼릭스가 보였다.

* * *

공녀가 먼저 공간을 빠져나간 뒤로도 대공은 그저 라우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진정으로 시선 끝에 있던 것은 그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미려한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깃들지 않아서, 제삼자가 본다면 그들이 적인지 동료인지도 유추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끝내 라우드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세요. 수도에 도착한다면 조용히 대화하기 어려워질 테니 말이에요.”

긴 숨을 뱉으며 라우드는 설핏 웃었다.

방심할 찰나. 필요한 건 그 짧은 순간뿐이다.

한순간이나마 대공을 확실하게 속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치밀하게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되니 과거를 후회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저는 후회되지 않는군요.”

“신에게 하는 게 더 좋을 고해성사로군요.”

무심하게 대꾸한 남자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는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지금쯤이면 됐으려나.”

‘신수와 사전에 논의한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간과할 수 없는 말에 라우드는 내리뜬 눈을 예리하게 좁혔다.

“가시지요. 교황 성하.”

하지만 가장 영문 모를 것은, 그에게 여전히 예의를 갖추고 있는 저 남자였다.

“제 운신이 자유로워지도록 해도 괜찮습니까?”

떠보듯 한 말에 대공은 가늘게 웃었다.

“신수께서 계신 덕택에요.”

“그런가요.”

라우드는 대공의 신성력을 본 적 없다는 것처럼 태연히 말을 받았다. 그러나 당연히 잊었을 리 없고, 잊을 수도 없으며, 잊어서도 안 됐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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