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이유 모를 불길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을 곱씹으며 라우드는 지상에 도착했다.
굳어 있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역시나 있다.’
거기에 운 하나까지 더해졌다.
선황자와 공녀가 제법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공녀로서는 그녀가 위험에 빠지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선황자가 엮이지 않게끔 미연에 방지할 생각이었을 테다. 그 조심성이 도리어 발목을 잡게 될 줄도 모르고.
심중에 도사린 불길함의 발톱은 날카로워 여전히 선명하게 느껴졌으나 이유 모를 것들이란 본래 이리도 존재감이 선연한 법이었다.
그러니 단순한 우연을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며 붙잡는 멍청한 치들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뭐, 그랬기에 라우드 역시 교황위라는 자리를 의식한 다분히 정치적인 행보에는 우연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말이다.
소년으로 현신한 신수가 그를 보고 와락 얼굴을 구기는 것이 보였다.
라우드는 눈을 내리떴다.
“근처에 신전과 연결된 포탈이 있습니다. 안내하…….”
“멈춰라! 칼릭스가 이동한 수단을 선택하겠다.”
신수가 형형한 눈으로 라우드를 노려보았다.
“붙잡혔다고 갑자기 순순히 꼬리를 만다고? 너는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을 했다. 지금도 분명 그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야 의식을 재개할 수 있을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특한 간계만 가득하겠지.”
신수는 과연 예상대로 행동했다.
이곳에 머무르게끔 시간을 끄는 것.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도운 격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더 이상의 노력은 의미가 없음을 인정했을 뿐입니다.”
“너는―!”
입술을 깨문 신수는 그러나 더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옮겨 선황자 근처로 더 가까이 다가갔을 뿐이다.
‘신수를 더 자극하려고 해봤자 의심만 모일 터.’
라우드는 두 눈을 반쯤 가리며 흘러내린 앞머리카락을 치우지도 않고 눈을 깜빡였다.
‘신수가 바로 근처에 있어 까다롭게 됐…….’
……아니지.
이 상황에서는 굳이 선황자를 노릴 필요가 없다.
공녀가 스스로 실토한 약점이 뇌리를 스친 건 바로 그때였다.
라우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흑마법사가 아니기에 숨을 죽인 흑마법은 느낄 수 없지만, 신수가 흑마법을 파훼했으리라고는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 저들 뒤에 있을 나무가 문득 떠올랐다.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게 될까. 그 생각으로 이 장소를 올 때마다 매번 눈에 담은 탓에 이제는 시선을 두지 않고도 모양새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게 되어버린 것.
신수는 바라보고 있어도 눈에 담지는 못했을 테고 샤를리즈는 일부만 보았을 뿐 전체를 본 적 없으니 이름을 몰랐을, 그 나무.
그가 저 나무의 능력에 대해 알게 된 것도, 흑마법사와 닿게 된 것도. 그래, 모두 우연이었다.
가닥마저 촘촘하게 설계해 모든 생명체에 각자의 운명을 부여한 신의 눈을 피해 벌어진 우연.
애초에 저것들이 그에게 필요했던 이유의 시초를 생각하자면 그리 놀라울 우연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운명을 거스르려는 힘을 목격한 데서 기인한 결심이었으므로.
라우드는 설핏 웃었다.
흑마법은 파훼되었으되 파훼되지 않았다.
교황이 아직 정정함에도 수석 신관이라는 미명 하에 차기 교황을 정해 두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신수의 심장이 위치한 장소는 교황만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관들도 모르는 극비.
그러니 이 공간을 그의 입맛에 맞게 바꾸는 데 쓰인 힘은 모두 신성력일 수가 없었다.
이 장소에 침범한 흑마법이 들통나지 않도록 그 위에 제 신성력을 얇게 덧씌운 게 전부였다.
심장도, 성혈도 모두 잃은 장소를 유지할 이유는 애당초 없다. 하물며 회심의 일격을 날릴 마지막 수단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라우드는 그의 신성력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뒤바뀐 이곳을 유지하는 흑마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도록.
그리하여 그가 내도록 노리고 있던 ‘틈’을 포착할 수 있게.
곧 돌변할 상황을 흥미롭게 관전하듯 바라보던 눈매가 돌연 구겨진 것은 아주 잠시 뒤였다.
* * *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지―라고 생각하는 건 아무 의미 없다. 뭔가 이상하다 싶을 때부터 빠릿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나처럼 잘 살아남는다!
……이번은 살아남는 거랑은 영 관계없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혹시 말입니다. 교황이 신수 님께 말을 건다면 바로 사샤 옆으로 움직여 주십시오.]
[내게 말을 거는 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게냐?]
[……예에에.]
[그렇다면 역시나 사샤를 노릴 속셈을 품고 있는 게로구나! 그래. 내가 아이를 지키겠다.]
[신수 님께서 사샤를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무사히 지켜내실 것을 압니다. 다만, 아이가 봐서 좋을 것 없는 광경이니 사샤를 데리고 곧장 신전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마.]
[아! 본체는 말고요.]
[왜? 사샤는 용을 좋아한댔다.]
[바람이 거셉니다…….]
“어서 돌아가자. 여기 있으면 위험해진다.”
“다 같이요?”
“그러겠지.”
“그럼…… 함께 위험해질래요.”
“뭐어어어!”
신수가 질겁했다.
“네가 그러면 쟤네가 좋아할 것 같으냐?”
“…….”
“나를 꼭 잡아라.”
사샤가 머뭇거리며 신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봤다.
작은 흉통을 들썩이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포스스 웃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침실에 있어.”
혹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봐 위치를 콕 지정해주자 사샤는 배시시 웃었다.
이 겨울날, 침대에 쏙 들어가서 이불을 폭 덮고 있을 생각이 없는 거다!
“저는 추운 걸 잘 견뎌요.”
뻐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지만 유일한 장점을 내세우듯 뿌듯한 목소리였다.
입술만 달싹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칭찬하는 대신 말했다.
“조금만 있다가 보자.”
그 순간. 기시감이 불쑥 치달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릴 시간도 없이 그것은 곧장 정체를 드러냈다.
쿨럭.
밭은기침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손가락 틈으로 피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에 힘을 실었다.
전에 없던 강도의 흑마법이기는 한지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고통이 쉼 없이 몰아쳤다.
“샤, 샤를 님.”
“가지 말아라! 위험하다!”
“샤를 님이 아, 아프신 것 같은데.”
“감기에 걸렸나 보지. 그러니 너도 얼른 가는 게 낫겠다.”
“놓아 주세요. 샤를 님께 갈래요.”
목소리가 점차 아스라이 멀어졌다.
이것이 내 의식이 흐려지기 때문이 아니라 부디 우리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고 보니 이거, ‘샤를리즈’가 흑마법에 손댄 부작용이 아닌가 했었는데.’
그녀가 시간을 돌렸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때의 샤를리즈에게 신성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설령 있었다고 해도 이만큼의 신성력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네.’
애초에 그녀는 그 정도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다. 등가교환의 일환으로 제 목숨을 가져가는 대신 리엔타 공작을 살리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어쩌면 시간을 돌리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샤를리즈’가 몰랐던 부분을 알려준 사람은 역시 칼릭스가 맞았군.‘
그런데 왜 내게서 본인을 지웠을까.
기억도 모자라 감정까지 지워야 했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였을까.
답을 얻을 수 없을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 * *
’칼릭스 엘루이든‘으로 산 두 번째 생의 기억은 아직도 불완전하지만, 첫 번째는 뚜렷하다.
마치 그 전의 생처럼.
[바보 같은 짓이다. 신이 그대의 환생을 허락할 리 없지 않아.]
목표를 눈앞에 두고, 왕녀가 막아섰다.
[지금도 나쁠 것 없다는 이야기를 네게 하고 있어.]
[그래. 어쩌면 이 선택으로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용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꺾었다.
[너는 지난한 환생에서 벗어나고, 나는 나를 신의 손아귀에 쥐여주게 되는 셈이니.]
왕녀는 그녀의 설득에 회유된 듯한 말을 듣고도 안도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탓이다.
용이 짧게 웃었다.
그래. 성공해도 결국은 실패일 가능성을 상정하고도 시도했고, 성공했다.
기억이 돌아온 즉시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불행의 시발점이었다.
누구인지도 모를 것들의 피로 얼룩진 채 염원했다.
시간을 돌려 달라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 전으로, 그녀가 살아 있었던 때로.
두 번째는 다르게 행동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번에도 결말은 비슷하게 되풀이되고 말았다.
아니.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국은 같았을 것이다.
놀란 기색 없이 그저 싸늘한 녹안을 마주하며 그는 그가 조각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쩌면 너와 나는 만나서는 안 되는 악연이 맞는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