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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24화 (224/232)

224화

[하.]

차가운 숨소리가 적막한 사위를 갈랐다.

헛웃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만나 버렸으니 어쩌겠어.]

샤를리즈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칼릭스는 느리게 웃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보다 그 악연을 끝내 주려던 사람을 방해해 놓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던가?]

[이렇게는 아니야.]

이렇게는 아니다.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눈길은 피투성이 된 샤를리즈의 다리에 머물렀지만 찰나였다.

시선이 일직선으로 맞닿자 샤를리즈가 눈을 치떴다.

[리엔타 공작을 이 방식으로는 살릴 수 없다. 이미 신이 거둬간 목숨이니 인간의 목숨값과 다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경계심이 가득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을 돌리면 돼. 그 대가는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

[……네가 왜.]

유독 가느다란 손가락이 바닥을 긁었다.

[대답해 봐. 왜 네가 감당하겠다고 하느냐고.]

[이유가 필요한가?]

[필요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노려보는 녹안이 형형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착각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는 선선히 입술을 열었다.

[바꾸고 싶은 부분이 있어.]

그러나 말할수록 절박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다르게 행동하고 싶은 지점이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기억을 막아두어야 했다. 그녀의 기억을 지워야 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첫 만남일 수도 있다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난다고 할지언정 지금보다 최악으로 치달을 수는 없을 테니까.

* * *

라우드가 구상한 설계는 이렇게 시작됐다.

선황자의 곁에 신수가 있다. 그러니 선황자를 위험에 빠뜨려봤자 대공의 시선은 정말로 아주 잠깐만 가닿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목표물을 겨냥하는 건.’

그렇게 급선회한 이유는, 대공은 현재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한몫했다.

대공은 공녀의 손에 든 멍을 분명히 보고도 치유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안’ 했다는 것보다는 ‘못’했다는 쪽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대공이 불능 상태가 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게 이상하다.

계단의 목전에서 대치했을 당시 대공이 사용한 신성력의 절대값은 엄청났다. 신성력으로 멈춘 시간을 다시 돌렸다. 라우드의 족히 두 배는 운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계는 이렇게 끝났다.

신성력을 이용해 대공의 발을 묶고, 반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공녀를 손쉽게 붙잡는다.

“커헉!”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라우드가 메마른 숨을 힘겹게 토해냈다.

무형의 손이 틀어쥐기라도 한 듯 목깃 부분이 엉망으로 구겨진 것도 몰랐다.

공간을 지탱하는 흑마법을 낯선 신성력이 장막처럼 덮었기 때문이다. 조금의 틈도 없이 에워싼다.

그것을 알아챌 수 있던 이유는 아직 회수하기 전인 그의 신성력이 남아 있던 탓이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대공은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만한 신성력을 어떻게 갖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누구의 눈에도 들키지 않은 채로.

“도대체…….”

애초에 인간의 육체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이기는 한가.

문득 떠오른 말이 있었다.

[교황 성하 덕택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지. 말도 안 되는 헛된 몽상이다.

라우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푹 숙인 고개에서 흘러나오던 웃음소리는 잦아들고, 들썩이던 어깨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다시 들어 올린 눈은 실핏줄이 잔뜩 서 시뻘겠다.

‘하나. 만약 그렇다면.’

공녀가 이 장소에 침입했을 때부터 애당초 그의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그야말로 필패였다.

붉게 번진 시야에 길게 늘어진 은색 머리채가 걸렸다. 저 홀로 빛날 수 있다는 듯 반짝이는 색이었다.

‘모든 것을 망친 주제에 본인은 모든 것을 갖는다는 건 불합리하지 않은가.’

이미 실패였다. 무슨 수를 써도 라우드는 목적을 이뤄낼 수 없다.

공녀에게도 이 심정을 반절만이라도 새겨 주고 싶었다.

힘겹게 이뤄낸 목표가 어그러졌을 때 저 오만한 얼굴은 어떻게 바뀔지.

공녀의 원대한 숙원을 모르는 제도 귀족은 없고, 라우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공을 죽일 수는 없다.’

치욕스럽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신수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뛰쳐나온 자그마한 체구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점차 공녀에게 가까워지는 아이를 지켜보다라우드는 돌연 생각했다.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지 않나.’

라우드가 입술을 비틀었다.

* * *

“안 된다!”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사샤는 달렸다.

무릎이 꺾여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휘청휘청 달려갔다.

‘피였어.’

아이는 아랫입술을 꾹 당겨 물었다.

‘피를 토하셨어.’

의사도 아니고, 약제사도 아니니 제가 가봤자 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을 안다.

하지만 샤를리즈 덕분에 아이가 알게 된 소중한 깨달음이 하나 있다.

바로, 힘들 때 꼭 안아 주는 따뜻한 손길은 무척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다정한 손은 여럿일수록 좋다는 거다.

그래서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손이 아주 커져서 더 많이 따뜻해질 수 있을 텐데. 이만한 거리쯤은 숙부님처럼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텐데.

“샤를 님…….”

혼잣말하듯 작은 목소리였다. 제 귀에도 겨우 닿았을 만큼 보잘것없는 크기였다.

그런데 칼릭스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샤를리즈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분명한 시선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꽂혔다.

이제야 히끅거리며 아이는 지친 발을 질질 끌었다.

샤를 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

언젠가부터 갖게 된 소망을 간절히 되뇌었다.

샤를리즈가 아이를 구해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다정하게 굴어주기 때문만도 아니다.

숙부님에게 자신을 데려다준 사람이 샤를리즈가 아니었다고 해도. 첫 만남이 아주 무섭고 매정하게 저를 바라보는 눈이었다고 해도.

왜인지 아이는 샤를리즈가 참 좋았을 것 같았다.

마치 실제로 겪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합리적인 근거가 필요 없는 확신이 마음을 온통 물들이고.

“샤를 님을 지키고 싶어.”

아이는 간절한 소망을 마침내 속삭였다.

* * *

사샤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은 분명 찰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놀란 듯 크게 뜨인 눈과 애써 울음을 참는 듯 일그러진 입매. 앳된 얼굴로부터 다시 오지 않을 언젠가의 눈을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은 성물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선황자 전하. 돌아가십시오. 대공 전하께서 아신다면 분명 진노하실 겁니다.]

[공녀님을 보러 왔어요.]

[공녀님께서는 현재 출타하셨습니다.]

[계신 것 알아요.]

유순하다고 정평 나 있는 선황자가 고집을 부렸다. 아이지만 아이로 대우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 통에 어쩔 수 없이 집사는 ‘샤를리즈’에게 고했다.

돌아온 답은 허락이었다.

[공녀님.]

굳게 주먹 쥔 손을 허벅지에 올리고 있던 아이가 서둘러 말했다.

[늦게 알았어요. 공녀님. 저는 알아요. 공녀님은 나쁜 사람 아니에요.]

[나쁜 사람 맞아.]

‘샤를리즈’가 냉랭하게 단정 지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네 얼굴은 별로 보고 싶지 않구나.]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제겐 나쁜 사람 아니었어요.]

허겁지겁 일어나 달려가려던 아이는 서늘한 눈에 걸음을 멈추고 대신 제 상의 끝자락을 꾹 잡아 내렸다.

[공녀님 덕분에 제가 신성력 개화했다고 숙부님께 오기 전에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

[그래?]

‘샤를리즈’가 싸늘하게 웃었다.

[하루만 더 일찍 하지 그랬니.]

지난한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다.

내가 사과할 수 있는 그 아이가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안다.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다.

영영 잊지 못할 원죄를 다만 기억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돌연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쐐애액―

교황의 일격이 쇄도했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빛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마침내 일정 범위 내로 다가온 순간.

“…….”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투명한 방어막이었다.

마치 손을 둥글게 말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듯 반구형의 모양을 한 결계가 달려드는 빛과 충돌했다.

콰앙!

귀를 터뜨릴 만큼 거센소리가 울리고, 맥동하는 빛이 환하게 터져 시야를 물들였다.

이 이상 현상을 알고 있다.

나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러느라 바닥을 짚은 손이 긁혔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피가 났다는 것도 칼릭스가 핏방울을 거둬가고서야 알았다.

“가, 샤를리즈.”

칼릭스가 말했다.

“이번에는 뒷일은 내게 맡겨 줘.”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빛이 터진 다음은 충돌 때문에 산란한 흙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기억하는 방향으로 달려가는 발은 늦추지 않았다.

“사샤.”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이래서는 듣지 못할 터였다. 지금은 아주 아플 테니까.

“사…….”

“샤를 님!”

그러나 어째서일까.

들려온 목소리는 비록 가쁜 숨 때문에 가냘팠으나 고통 따윈 묻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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