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시야를 가득 채운 회백색 먼지 속에서, 쭉 뻗은 고사리손을 본 것도 같았다.
망설이지 않고 단단히 잡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기세로 꾹 쥐었다.
‘사샤가 아파할지도 몰라.’
뒤늦게 생각이 닿아 황급히 손에서 힘을 푼 때였다.
그 자그마한 손이 나를 잡는다. 맞닿은 면적은 작아도 결코 무시 못 할 온기가 선명했다.
꼭 맞잡은 손으로부터 번지기 시작해 온몸을 휩쓴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샤를 님 맞죠?”
“……그래. 맞아.”
“사실은……, 사실은요. 샤를 님이신 거 알았어요.”
수줍은 목소리 끝에 물기가 스몄다.
“괜찮으신 것 맞죠?”
“응. 사샤가 지켜 준 덕분이야.”
아이가 희미하게 히히 소리 내어 웃었다.
“다행이에요…….”
작은 몸이 풀썩 앞으로 꺾였다. 한 품 가득 아이를 안은 채 나는 하고 싶은 말이 혹여나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거칠게 입술을 짓씹었다.
‘여기에 없어.’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자기 만족밖에는 안 된다. 대상 없는 사죄를 한 뒤 조금이라도 홀가분해지고 싶지 않다.
“사샤!”
신수가 달려왔다. 아이의 몸을 점검한 그가 야트막한 한숨을 뱉었다.
“단순히 잠든 게야. 많이 고단했나 보다. 샤를리즈 너는 괜찮으냐?”
“지금이 질문하기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신수를 바라봤다. 위험으로 달려 들어가던 사샤를 쉽게 가로막을 수 있었을 존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사샤가 완전히 각성하게 될 것, 아셨죠?”
“변명하지 않겠다. 하나, 예상이 맞다면 고통이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복잡한 얼굴로 신수가 순순히 말했다.
“처음에는 사샤의 기억이 모두 돌아온다면 신성력을 개화하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이미 조건은 모두 충족했는데도 무슨 일인지 가로막혀 있었고, 기억이 불완전한 것이 그 이유인가 싶었어. 본디 신성력은 담을 그릇도 중요하니 말이다. 한데, 너도 알다시피 아니었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했다는 말씀입니까.”
교황도 그랬다. 사샤가 신성력을 필사적으로 각성하기를 바라게끔 아이에게 유일한 존재가 될 간계를 획책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신수가 한 답은 완벽한 긍정이 아니었다.
“스스로 바라는 것도 바라는 것이지만, 누구를 위해 바라는지가 중요한 지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때도, 너로 인해 각성하게 되었지 않아.”
원작에서 아이의 각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이리안이었다. 굳이 바꿔 작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알 듯 말 듯 희미하지만, 똑같이 회귀 전의 기억임에도 아직도 선명한 장면이 있었다. 어쩌면 평생토록 잊지 못할 모습이 있다.
차마 눈을 깜빡이지도 못한 채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죄송해요. 공녀님. 제가 부족한 탓이에요.’ 하다 끝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만 어린애가.
“신수 님은 ‘주인’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으십니까?”
“글쎄.”
신수가 생각하고 있는 순간은 아마도 나랑은 다른 순간일 테다.
나는 ‘주인’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며 나를 찾아온 이번 생의 첫 만남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언젠가를 떠올리듯 그리운 눈을 한 신수가 눈꺼풀을 닫았다.
이윽고 다시 드러난 눈동자가 나를 부드럽게 직시했다.
“비록 기억할 수 없어도 잊고 싶지 않다는 소원 하나는 들어줄 수 있지.”
* * *
라우드가 운신할 수 없도록 속박한 대공의 신성력은 당연히 그의 신성력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랬기에 생명력 일부마저 이용했다. 그도 모자라 준비 없이 빠르게 끌어낸 탓에 몸의 어느 부분은 회복 불가 수준으로 손상되었다.
울컥 치민 피를 바닥에 뱉고 라우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정면을 직시했다.
‘분명 결계를 펼쳤지.’
하지만 대공에게는 미처 완벽히 대비할 시간이 없었다. 설마 생명력을 신성력으로 치환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미 상당한 신성력을 두어 번 사용했을뿐더러 더군다나 어느 정도의 신성력이 라우드를 속박하기 위해 묶여있기까지 하다.
다급하게 만들어 낸 결계의 허술함을 기대해 볼 만했다.
‘언제쯤 먼지가 잦아들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때.
희뿌연 공기를 가르며 가까워지는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윽고 드러난 얼굴은 스친 상처 하나 없었다.
“어째서.”
망연한 중얼거림에 점차 분기가 실렸다.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가 뭐지? 내가 착각하도록 만들어 내 힘을 빼기 위해서였던가.”
마침내 온전히 보이는 벽안은 한없이 무기질적이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근원적인 두려움이 엄습했다. 힘의 우위는 확실했다.
본능처럼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한껏 두려워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보다 우월했다고 생각한 세월이 길어서일까. 라우드는 애써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
불시에 뻗어 나온 손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숨통이 조이는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 틈 없이 견고한 손속이었다.
“버리지 못한 버릇을 또 하게 되거든.”
남자가 심상하게 대꾸했다.
겉보기로는 악력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손에는 핏줄 하나 불거지지 않은 채, 지루하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위협은 무용하니 대안을 준비하지 않게 돼. 조금 전처럼 말이야.”
칼릭스 엘루이든으로서의 첫 번째 생이 준 교훈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눈에 그저 지위만 높을 뿐이며, 그렇기에 대비하지 않은 채로 있다면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만다고.
그것을 잊지 않아야 했다.
교황에게 우습지도 않은 경어를 계속 사용했던 것 역시 타인이 보는 제 위치를 스스로에게 주지시키기 위한 일환의 일종이었다.
칼릭스가 문득 미소 지었다. 분명 빛나고 있음에도 어두운 밤하늘을 닮아 어딘지 스산한 초승달을 닮은 비소였다.
라우드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대공의 역린임을 눈치챘다. 회생할 기대를 버리지 못해 운을 띄웠다.
“공녀가 위험에 처할 뻔했는데 잘도 침착하군. 분노해 당장 손이라도 나가지 않을까 했더니.”
“그래. 화가 났어.”
칼릭스가 조금 웃었다.
“하지만 네게는 아니야. 네가 뭐라고 내가 화를 내지?”
느른한 의문이 이어졌다.
헛웃음을 한 번 터뜨린 라우드는 언제 웃었냐는 듯 시뻘건 눈을 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공의 힘이라면 충분히 세상을 합당한 방향으로 뒤바꿀 수 있을 텐데, 생각을 고칠 생각은 없나?”
“바꾼 게 지금이야.”
늘 여유롭던 남자가 처음으로 사나운 일면을 드러냈다.
“그러니 이만 끝을 받아들이는 게 네게도 좋을 테지.”
그리고 암전이었다.
칼릭스는 의식을 잃은 사내를 서늘한 눈으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교황은 숙원을 이루기 위해 들인 시간과 공이 있는데, 제대로 시도 한번 하지 못 하고 끝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의 숙원이 이루어지기라도 할까 봐 모두가 두려워했어야 마땅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원대한 숙원이 원대한 결말을 맞지는 않는 법이다.
그것을 칼릭스는 아주 잘 알았다.
교황이 어떤 공을 들였든 그 무엇도 그가 했던 것에 견줄 수는 없을 테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끝이 어떠했던가.
[너는 너보다 내가 중요하다고 했지. 애석하게도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이기적인 나를 영영 미워해.]
칼릭스는 비스듬히 웃었다.
그래. 어쩌면 영영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홀로 기억하는 건 익숙하니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보다도 더 이기적이어서, 기어코 시간을 돌렸다.
두 번째 생의 결말이 파멸임을 알았다면 과연 동일한 선택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샤를리즈의 세 번째는 파멸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파멸의 원인을 기억에서 지웠다.
비록 기대만큼 순조롭지는 못했지만, 칼릭스는 그럼에도 감히 생각했다.
우리가 악연은 아닌 것 같다고.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함께였다.
“너희도 둘이 왔냐?”
“마부 역을 해 준 기사가 있어.”
“……걔는 안전하다냐?”
“줄곧 교황의 시선을 잡고 있었으니, 아마도.”
“매정한 자식. 그렇게 말했단 거 알려주면 기사가 상처받겠구나.”
칼릭스는 대답하는 대신 웃었다.
성의 없는 표정 보라며 방방 뛰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내 어깨에 턱을 괸 채 곤한 잠에 빠진 아이를 힘주어 안았다.
“샤를리즈. 무겁진 않으냐?”
“더 무거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허튼 생각을 했구나. 원래 무식한 애들은 힘이 센 법이랬다. 그래, 너한테 무거울 게 뭐가 있겠냐…….”
종알종알거리는 신수를 곁눈질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왜! 왜 웃어!”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아서요.”
“전혀? 아닌……. 뭐, 기분이 조오금은 좋다. 흐흠.”
누가 조류 아니랄까 봐 화드득 털―비늘이나 털이나 몸을 감싸는 건 똑같다!―을 바짝 세우던 신수가 끝내 실토했다.
신수가 통 크게 발휘한 신성력으로 속도가 빨라진 마차는 반나절이 지나기 전 대공저에 도착했다.
울먹울먹한 눈으로 달려 나온 리반과 집사가 입으로는 “가주님.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하면서 사샤를 가장 먼저 바라본 거, 나는 다 봤다.
“리엔타 공작 각하께서 공녀님께서 귀환하시면 공작저로 방문할 것을 요청하시었습니다.”
‘……아버지, 저 당연히 갈 생각이었는데요…….’
제가 얼마나 불효자식처럼 살았길래 이러고도 안 찾아갈까 봐 걱정하신 건가요.
복도를 이동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깊게 잠든 아이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하고 발끝을 세운 채 조심조심 침실을 나섰다.
“저는 아버지께 다녀오겠습니다.”
“데려다줄게.”
“안 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위험합니다. 제시간에 아버지를 뵙지 못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럼 안 되겠네.”
같이 진지하게 동조한 칼릭스가 불쑥 웃었다.
혹시 나를 비웃나 싶어 가자미눈을 뜬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집에 있으면 원래 웃음이 막 나기 마련이다.
“예. 어서 문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문을 열어주자, 칼릭스가 선선히 걸음을 옮겼다.
“내일 봐요.”
닫히는 문을 모양 좋은 손이 “잠시만.” 하며 잡은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