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칼릭스가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디 위험이 따라다니지 않기를.”
이마가 뜨끈해지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신성력 때문인지 아니면 내 사리사욕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후다닥 뒷걸음질 치고는 어서 문을 닫으라고 눈을 부라렸다.
“잘 다녀와.”
성스러운 미소가 번진 미려한 얼굴이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삐걱거리며 돌아섰다.
복도를 척척 걷는 내 낯짝은 분명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을 게 틀림없다.
* * *
“가주님.”
창문 너머 펼쳐진 정원은 방대했다. 그러나 주인의 눈은 한 곳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무엇도 시선을 끌 수 없을 것 같이 철옹성 같던 사람은, 이어진 말의 첫머리에서 곧장 반응했다.
“아가씨께서 대문을 통과하셨다는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응접실로 가지.”
벨리악이 돌아섰다.
아이가 언제쯤 도착할지, 어디 다친 곳은 없을지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똑똑.
그러나 노크 소리가 들리자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벨리악은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내딛는데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걸음은 완고한 권력가의 전형 그 자체였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줄곧 손꼽아 기다리던 얼굴이 그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샤를.”
제국의 명실상부한 권력가는 그저 자식을 걱정하는 평범한 부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붉어진 눈으로 묵묵히 바라보다 불현듯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품 안의 자식일 줄 알았던 아이가 어느새 이만큼이나 자랐다고.
그러니 어쩌면 이제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관심을 간섭이라고 받아들이며 귀찮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모란 언제까지고 자식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하는 법이었다.
비록 자식이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 * *
리엔타의 파티시에는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손도 빨랐다.
기별 없이 찾아왔는데도 금세 내 앞에 놓인 코코아밤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역시 교황이 샤를 네게로 간 것이 맞았구나.”
“예. 지금은 대공저에 포획해 두었습니다. 내일 중으로 끌고 갈 생각입니다.”
“그래. 하루는 쉬어야지. 고생했다.”
“음. 아버지를 가장 먼저 뵙기 위해 일정을 미룬 거예요.”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황제는 두문불출하고 있다. 정기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지.”
“그렇습니까.”
충실히 대답하곤 흘깃 맞은편을 살폈다.
‘……왜 이렇게 의연하시지.’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건 불효가 아니다.
걱정 안 하는 게 오히려 불효다!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슬쩍 물었다.
“아버지. 혹시 화나셨습니까?”
“위험한 장소로 갔다는 말에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단다.”
공작이 찻잔을 기울였다.
‘허, 허억.’
저 찻물에서 김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피어올랐는지를 눈에 담은 목격자는 기겁했다.
“아, 아버지. 여기 차가운 물이 있습니다.”
“고맙구나.”
그러나 공작은 미지근한 차를 마신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것이 바로 공작이 현재 무언가 이상하다는 방증이다!
“샤를.”
찻잔을 잠깐 매만지더니 공작이 어렵게 서두를 열었다.
나는 어서 냉큼 말씀하시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너도 부모가 귀찮은 나이가 되었느냐?”
“……다음에는 꼭 미리 말씀드리고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화가 나신 게 맞았다. 침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푹 수그리는데, 달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하고 보니 소저에 찻잔이 불규칙적으로 부딪치며 발생하는 소리였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공작이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또, 또 위험한 곳을 가겠다는 게냐?”
“세상일이란 알 수가 없어서…….”
“가겠다는 게로구나!”
공작이 눈꼬리에 주름이 질 만큼 눈을 질끈 감았다.
부모를 늙게 만든다는 자식이 바로 나였다.
불효자는 송구스럽게 어깨를 옹송그렸다.
“그런데 아마도 안 갈 것 같습니다. 월급 받고 하는 일도 아닌데 또 갈 이유가 없잖습니까.”
“……아니다. 샤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공작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
이윽고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어딘지 결연했다.
“나는 그런 네 뒤를 지키겠다.”
“예? 아닙니다. 아버지는 편히 쉬셔야지요.”
여기서 불효 레벨을 더 진화시킬 수는 없다.
“나는 네게 도움이 되고 싶구나. 비록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존재 자체로 제게 도움입니다.”
리엔타 공작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는 타이틀은 엄청나다.
크게 바라지도 않았던 자식 때문에 아내를 잃은 공작이 딸을 미워한다고 대부분이 생각했던 어린 시절에도 의외로 나를 면전에서 얕보는 치들은 없었다.
무릇 권력가의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이란 질투 어린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 쉬운데도, 가문의 권세가 막대한 통에 ‘후계자’라는 위치 때문에 알아서 몸을 사린 거다.
‘아주 덕을 톡톡히 봤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때.
익숙한 ‘쿠흥’ 소리가 들려왔다.
“샤, 샤를.”
……이제야 안도하게 되는 기분이다.
킁, 쿠흥, 거리는 아버지 곁을 가만히 지키기를 한참.
나는 계속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아버지. 안아 봐도 됩니까?”
“응? 우응.”
여전히 훌쩍이는 공작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 기묘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한 걸음을 떼면 뒷걸음질을 치고 싶어졌고, 또 한 걸음을 떼면 어서 달려가고 싶어졌다.
그때와 같은 구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공작은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저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할 수 없던 이유는 턱을 가로지르며 흘러내린 피 때문이었다.
주저한 끝에 뻗은 손이 닿았다.
‘따뜻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심장까지 얼려버릴 만큼 싸늘한 냉기가 아니라.
회귀 전의 공작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아버지.”
“그래. 샤를.”
공작이 이상하게 여길 것을 알면서도 결국 내뱉고 말았다.
“역모 혐의를 쓴 가문의 가주가 자결을 선택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쎄다.”
뜬금없는 질문에도 공작은 진지하게 고민해 주었다.
“공개 처형을 피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그저 두려워서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구나.”
“……가문이요?”
“물론 정치적으로 입지를 줄이기 위해 고의적으로 역모 혐의를 씌운 경우에 그렇단다. 그래도 목숨까지 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지. 보통은 재산 과반을 내어주고 끝나니 말이다.”
“…….”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혐의 앞에서, 공작은 제 목숨을 버리며 말한 것이다.
이것으로 되지 않느냐고. 이것이면 되지 않겠냐고.
통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제안에 제 목숨을 내건 거다.
‘……아버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공작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파국을 맞지 않도록 할 텐데. 잘 할 수 있는데.
떨리는 입술을 꾹 문 채 생각하다 깨달았다.
오늘이 바로 시간을 돌린 내가 원했던 그 지점이었다. 공작이 죽지 않도록 바꾼 결과가 지금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어.’
소리 내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스스로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네가 목숨을 내걸고 스스로 다리를 찔러 발동시킨 소망은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그때, 커다란 손이 내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의연하게 굴더니 실은 무서웠던 게로구나. 아직도 부모의 품이 필요한 게냐?”
“네.”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그런가 봐요.”
“그러니 앞으로는 위험한 장소는 가지 않는 게 좋겠다! 굳이 네가 갈 필요는 없지 않아. 그래! 엘루이든 대공을 보내면 되겠구, ……아니다. 그냥 둘 다 위험한 곳을 가지 말아라.”
어룽거리는 시야 속에서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말이다.
* * *
교황이 훌쩍 사라지고, 신전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대외 활동을 해야 하는 귀족인 리엔타 공작과 다르게 교황 성하께는 연금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고 속닥대며 공작을 비웃던 대신관들은 낯빛이 희게 질린 채 넓은 신전 부지를 이곳저곳 뛰어다녔다.
“큰일입니다. 황제가 리엔타 공작의 가택 연금을 해제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 성하의 부재를 눈치챈 것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한 대신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직 젊은 교황은 성품이 무척 고결했다.
신전이 수세에 몰리고 황제가 신전의 과오를 호시탐탐 기다리는 와중, 하필 이 시기에 그런 교황이 황명을 드러내놓고 거스르다니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교황 성하께서는 분명 뜻이 있으실 겁니다. 저는 그 뜻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어디 실책 한 번 하신 분이십니까?”
차라리 도피에 가까운 의견 합일이었다.
그렇게 애타는 심경으로 교황의 귀환을 기다리던 때.
교황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던 소년 신관이 신전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