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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27화 (227/232)

227화

“성하는? 교황 성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그보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성하께서 직접 나셨나?”

초조했던 마음을 드러내듯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누가 더 목소리가 크나 대결이라도 하는 양 소란스럽기만 하던 사위가 차츰 고요해졌다.

소년이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관들은 그제야 소년의 행색을 눈에 담았다.

유독 새하얀 사제복은 군데군데 거뭇했지만 그을음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년 자체였다.

분명 상처 하나 없음에도 무수한 상처를 담고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시면 모두 알게 되실 겁니다.”

고요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본인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굴어댔는지를 알게 된 대신관들이 괜스레 헛기침했다.

“한 가지만 묻겠네. 신전에 좋은 방향인가?”

다분히 권력욕에 맞닿은 질문이었다.

그 말을 꺼낸 대신관은 이윽고 저를 향한 투명한 시선에 오히려 뭘 보냐는 듯 뻔뻔하게 눈에 힘을 줬다.

엷은 미소를 입술에 그린 소년이 눈을 내리깔곤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

“다행이군.”

“역시 교황 성하께서 이유 없이 행동하실 리가 없지.”

안락한 지위를 잃을까 봐 불안에 떨었던 이들이 앞다퉈 안도했다. 목적을 이루자 그들은 한낱 신관으로부터 신경을 끊었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소년은 어느 한쪽을 보았다.

황성이 위치한 방향이었으나, 소년이 진정 바라보는 곳은 황성이 아니었다.

황성 근처에 있을 어느 저택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한데, 교황 성하께오서는 언제 도착하실 예정이시라고 하던가?”

시선을 거두며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이 또한 기다리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 * *

비슷한 시각. 황제궁.

황제의 침전 앞에서 트롤리를 멈춘 시종이 고했다.

“폐하.”

“들라!”

황제가 식사를 침실에서만 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사흘째였다.

잠 한숨 청하지 못한 것처럼 실핏줄이 선 눈이 시종을 향했다.

마치 황제가 아니라 거리의 무뢰배나 할 법한 표정에 아연했던 것도 처음 하루나 그랬다.

시종은 익숙하게 요리를 한 입씩 맛보았다.

정확히는 맛보고 이상이 없는 것을 황제에게 보여 주었다.

“나가 봐라.”

시종은 재깍 물러났다.

황제궁에서도 가장 공을 들여 청소하는 황제의 침전은 현재 아이러니하게도 황제궁에서 가장 더러운 공간이 되었다.

먼지 한 톨 없이 늘 청결하게 관리되던 장소는 환기조차 하지 않은 통에 공기가 매캐했다.

‘갑자기 또 무슨 일이신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시종은 트롤리를 바삐 끌었다.

한편, 닫히는 문을 끝까지 주시한 안토니오는 시선을 내려 식사를 확인했다.

켕기는 게 많은 사내는 매사에 의심스러워졌고, 독이 없음을 확인하고서도 안도하지 못했다.

식기가 닿아 조금 떼어진 부분 근처만 섭취하느라 며칠째 극소량만 섭취한 몸은 어지럼증을 호소했으나 도저히 더 넘어가질 않았다.

[피로 물든 제위에 선황자 전하께서 올라가시지 않도록, 스스로 물러나십시오.]

채애앵―

그나마 무사했던 도자기가 힘껏 내던진 식기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지난 사흘간 침전에만 틀어박힌 채 안토니오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로나터스라면. 로나터스라면 가능할 법도 하지 않은가. 라베트 로나터스가 샤를리즈 리엔타와 각별한 친분이 있으니 그것을 이용해 공녀를 납치해…….’

문제는 그리 생산적이지는 못하다는 데 있었다.

중구난방으로 뻗어나간, 차마 계획이라고 일컫기도 모호한 무언가는 항상 같은 지점에서 막혔다.

“리엔타 공작의 손에 영상 마도구가 있지.”

벌떡 일어난 안토니오가 침실을 배회했다.

“황제가 바뀐다면 크고 작은 소란과 변화가 생기기 마련. 현재를 영위하는 게 더 이득인 이들을 포섭하면 되지 않겠나.”

안토니오의 얼굴은 이내 와락 일그러졌다.

결점이 있는 황제의 편에 리엔타와 엘루이든의 합작품을 거스르면서까지 서고 싶어 하는 귀족가가 몇이나 되겠느냐는 말이다.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는데, 돌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오가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휙 들었다.

“폐하. 엘루이든 대공이 독대를 청하는데, 어찌할까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시종은 긍정이 돌아오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저 그의 선에서 돌려보낼 수 없는 인물인 탓에 고할 뿐이었다.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 불벼락이 떨어질까 봐 한숨만 삼키고 있던 와중, 황제가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답했다.

“응접실로 안내해라.”

“예, 그럼 축객……, 예?”

“십여 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전해.”

“예, 예!”

* * *

십 분은 사흘간 방치한 몸을 치장하고 응접실까지 도착하는 데 말도 안 되게 촉박한 시간이지만, 여럿이 달라붙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과연 안토니오는 응접실 문을 정확히 구 분이 흘렀을 즈음 열어젖혔다.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됐다.”

안토니오가 맞은편에 앉았다.

“아우님께서 무슨 일로 기별도 없이 방문하셨지?”

친근한 질문에 돌아온 것은 의례적이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천박한 피가 반이나 섞인 것에게 기껏 친밀하게 대해 주었더니 감읍할 줄도 모르고!’

안토니오는 부글거리는 속을 꾹 눌렀다.

잠시 뒤, 듣기 좋은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성혈과 신수를 제물로 삼아 전 제국민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을 심는 동시에 신성 제국을 재건국할 계획을 세운 교황이자 흑마법사 집단의 수장을 생포하였습니다.”

“……뭐?”

너무도 방대한 정보에 안토니오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멍한 얼굴에 천천히 희열이 깃들었다.

교황이 획책한 악독한 짓거리에 기함한 마음도 있으나, 어쨌든 무산되었으니 길게 두려워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다.

‘영상 마도구를 교황이 흑마법으로 꾸민 가짜라고 주장할 수 있겠어.’

칼릭스는 본인도 모르는 새 안토니오에게 칼자루를 돌려준 셈이다.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안토니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진중한 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극비로 두는 게 낫겠군. 괜한 혼란만 가중될 테니.”

물론 본심이 아니다. 리엔타 공작이 영상 마도구를 세상에 보였을 때 역공할 카드로 숨겨 두려는 것뿐이다.

“아니요.”

돌아온 것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황제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칼릭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형님께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아우라고 부른 그에게 형님이라고 맞장구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안토니오는 불현듯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칼릭스가 오늘 나를 보고 ‘폐하’라고 칭한 적이 있었던가?’

―라는 뒤늦은 의문을 말이다.

* * *

아이는 아주 긴 꿈을 꾸었다.

[사샤. 오늘은 둘이 함께 꽃을 구경하자.]

이상했다.

분명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인데,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데 어째서 정말로 기쁘지는 않은 걸까.

[신호를 주면 달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계속 뛰어. 그곳에 이리안이 있을 테니까.]

진정 바랐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아이는 깨달았다.

그것은 제가 무척이나 듣고 싶어 한 바로 그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 제가 가면 공녀님은 어떡해요.]

[여기에 내가 있다고 알리면 돼.]

시야가 흐릿했다.

아이는 서둘러 눈을 꼬옥 감았다.

가득 차올랐던 눈물이 흘러내리자, 그제야 그 사람이 보였다.

[흐, 흐윽.]

비록 다정한 눈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제 눈물을 걷어 가는 손길은 상냥했다.

착각이라 해도 좋았다. 공녀님은 저를 걱정했다.

신호가 떨어졌고 아이는 허둥지둥 달렸다.

약속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힘껏 내달렸다.

[저, 저기에 흐, 흑마법사가 공녀님에게…….]

숨이 가빴지만 아이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공작을 필두로 리엔타 소속 기사 몇이 곧장 달려가고, 아이는 따스한 품에 불시에 안겼다.

[많이 두려웠겠구나.]

아니요. 하나도 두렵지 않았어요. 계속 제 손을 잡아 준 분이 계셨거든요.

[공녀님은 무사하실 거야. 사샤가 이렇게 알렸고, 무장한 기사들이 향했으니 말이야.]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가, 갈래요. 공녀님께 가야 해요.]

[안 돼. 위험해.]

[안 위험해요. 공작님도 가셨고, 기사님들도 가셨고, 그리고…….]

[내가 함께 가지.]

숙부님이었다.

[그러면 저도 가겠어요.]

아이는 숙부의 품에 안긴 채 도착했다.

마침내 눈에 담고 만 것은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쓰러진 공녀님이었다.

[안 돼. 안 되는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작은 가슴팍을 연신 들썩거리며 아이는 칼릭스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그때였다.

[이이익―!]

리엔타의 맹공에 수세에 몰린 흑마법사가 이리안을 보고 달려든 것이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사샤. 네게는 미안한 선택을 하려고 해.]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의 볼을 매만졌다.

[약속할게. 네 신성력이 다시 개화할 수 있도록 무엇이든 하겠다고. 손가락질받아 마땅하고 모두가 질타하는 선택이라도 하겠어.]

아이가 신수에게 의지하는 것을 알아 하는 약조였다.

[모두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너는 같은 고통을 또 겪어야 할 테…….]

[다시 시작해요?]

얌전히 경청하던 아이가 물었다.

처음으로 숙부님의 말도 끊고 다급하게 질문했다.

[그러면, 공녀님이 저를 기억하지 못해요?]

[그래. 그렇게 될 거야.]

[그럼…….]

공녀님이 저를 미워하기 전이에요? 아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물어물 말했다.

[그러면 좋아요.]

[…….]

[갈래요.]

퉁퉁 부은 눈으로 아이는 힘주어 바랐다.

[갈래요. 숙부님.]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다정한 손길과 포근한 향기. 그리고 가만가만 말을 걸어 주는 단정한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잠시 떠올랐던 저편의 기억은 의식 아래 모두 내려 두고, 아이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잘 잤어?”

한없이 일상적이고도 친밀한 사이에서나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상하게도 주륵 눈물이 흘렀다.

“자, 잘 못 잔 거야? 그러면 얼른 다시 자자. 눈을 감아. 자아,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아니에요. 샤를 님. 잘 잤어요.”

꿈을 꾸었는지 아니면 꿈 한 번 꾸지 않고 깊이 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탓이다.

아이는 여전히 눈물이 고인 눈으로 해사하게 웃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하나는.

지금이 무척이나 바라온 순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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