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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28화 (228/232)

228화

사샤와 알콩달콩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리엔타 공작저로 후다닥 달려왔다.

[선황자 전하께서 신성력을 각성하셨다고?]

[예. 그래서 사샤가 눈을 뜰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속 썩인 자식 된 입장에서 얼굴만 잠깐 비칠 수는 없는 법. 일부러 배를 반만 채우고 왔다.

두 번째 아침 식사를 흡입하고 있는데, 공작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께서는?”

“지금쯤이면 황제와 독대 중일 겁니다.”

“그래…….”

공작은 무언가를 고심하듯 깊은 눈을 했다.

“선황자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지. 그럼 역시 섭정을 할 계획이라고 하시더냐?”

“어…….”

흰 빵을 입 안 가득 욱여넣은 채 나는 눈을 굴렸다.

‘안 물어봤다.’

꿀꺽 삼키고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뭐, 어차피 답은 하나이니 주요한 문제라고 할 것도 아니겠구나.”

공작이 내 잔에 물을 채워주며 고개를 주억였다.

“황제는 어떻게 처리할 계획이라고 하시더냐? 궁지에 몰리면 쥐새끼도 발악하는 법이다.”

이건 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교황이랑 같이 처형할 거랍니다.”

* * *

안토니오가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내게 그럴 권한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무리 교황을 네가 생포했다고 해도 처결권은 내게 있다는 것을 잊었나?”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더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정연한 목소리가 그의 심장에 무거운 추를 매달기라도 한 것처럼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헛소리일 것이 틀림없다. 그의 반쪽짜리 혈연이 시작할 이야기처럼.

“리엔타 공이 입수한 마도구를 확인하였습니다.”

“공작이 네게도 이상한 소리를 한 게야!”

안토니오가 기어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도 알지 않느냐? 교황은 흑마법에 손을 대었다. 그것 역시 흑마법으로 조작한 영상이다.”

“조작이 아닙니다. 흑마법과 깊게 관여되었던 이들이 할 수 있는 간단한 활로이지요.”

“…….”

“저는 지금 선택권을 드리고 있습니다. 제 조카가 험한 일을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혈족 상잔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감히 그 자리를 빼앗아 차지한 패륜아에게요.”

“칼릭스 엘루이든!”

칼릭스는 서늘하게 웃었다.

‘엘루이든’이라는 성은, 선황제가 직접 작명한 것이다.

황족이나 더는 황족의 성을 가질 수 없게 된 어린 아우에게 마음을 담아 지어 준 이름이다.

“증거라고는 그 영상 마도구 뿐이지.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자꾸나.”

“그러시다면.”

칼릭스가 순순히 일어섰다.

안토니오는 악에 받쳐 외쳤다.

“하나, 기억하거라. 나를 건든다면 네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처음은 샤를리즈 리엔……, 커헉!”

안토니오가 헐레벌떡 제 목을 감쌌다. 잡히는 손은 없었다. 분명 숨통을 조이는 손길이 여실히 느껴지는데도.

헐레벌떡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사람은 칼릭스 뿐으로,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의식이 끊어질 무렵. 숨통을 틀어쥐고 있던 무형의 손이 사라졌다.

안토니오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눈물만 줄줄 흘렸다. 오직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용량이 작은 머리를 가득 채웠다.

목이 따가웠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고 있던 때였다.

“또 그 말이군.”

분명 제 아우이되, 아우가 아닌 것 같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또 그 말을 해.”

높다란 창공을 닮은 새파란 벽안이 그를 직시했다.

그 앞에서는 화살에 단번에 꿰뚫린 보잘것없는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전신으로 무력감이 번졌다.

그를 무감히 내려다보던 남자가 뒤돌았다.

안토니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외쳤다.

“밝히겠다!”

갑자기 커다랗게 외친 탓에 아려 오는 목을 붙잡고 말했다.

“리엔타 공녀가 무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려던 교황을 막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밝히겠다.”

안토니오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무, 물론 밝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금화와 보석, 아니, 성물도 하사하겠다.”

“…….”

“그러니…….”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내뱉은 말부터 지켜야 협상에 돌입할 수 있다는 압박이다.

안토니오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선택권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몰랐다.

* * *

곧 봄이 온다.

그 말인즉슨 두 남매가 아카데미로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로단테. 신학 수업을 한 학기도 감내할 필요가 없어졌어.”

나는 히히 웃었다.

로단테는 뜻 모를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해요. 공녀님.”

“뭐가 고맙다는지 모르겠군. 로단테가 나를 도와준 게 몇 번인데, 이조차 안 하면 나는 몹쓸 놈이지.”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에게도 가 봐야겠다. 신성한 나무 군락을 모조리 불태운 아드리안은 돌아오고 나서 이틀을 앓았다고 했다.

‘늦었을 땐 선물을 들고 가야 하는 법.’

그래서 목 좋은 곳에 집 하나를 알아뒀다. 아침에 대공저에서 나오면서 집사가 서류 정리가 되었다며 집문서도 건네주었으니 오늘 만나도 되겠다.

‘그럼 대공가의 집사에게도 고마웠다고 선물을 줘야 하나?’

이것이 바로 내 얄팍한 지갑이 털리는 소리다.

‘그리고 로단테랑 엔젤에게 입학 선물도 줘야 하고.’

로단테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단어 하나하나 똑똑하게 발음한 것은 그때였다.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낼게요. 공녀님의 첫 번째 피후견인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도록 말이에요.”

악룡을 무찌른 용사도 아니고 ‘그’ 샤를리즈 리엔타의 피후견인 자리를 두고 칭호라니…….

아주 머쓱했지만 결연히 다짐하는 사람에게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악독한 짓거리를 저지를 수 없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런데 지갑이 다시 채워졌다!

“흑마법사 집단의 수장이자 한때 교황이었던 신관 라우드가 획책한 천인공노할 계획을 무산시키고 제국을 구하는 혁혁한 공을 세운바, 샤를리즈 리엔타에게 수여한다.”

하늘이 무척 푸르고 바람이 유독 살랑거린 날.

황성의 제1 대정원에서 나는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그래서 리엔타 공작 각하께서 교황, 아차. 그 신관에게 가택 연금을 함께 신청하셨던 건가 봐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말이에요.”

“공녀님이 이런 대단한 일을 해내시다니…….”

“해낼 수 있는 힘이 있으시다니…….”

“……꿈이면 좋겠어요. 얼마나 더 무서워지실까요.”

바들바들 떠는 처량한 눈망울들에 속으로 착실히 대답했다. ‘이제는 착하게 살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답니다.’ 하고 말이다.

이걸 입 밖으로 못 내는 이유는 ‘히, 히익. 우리가 한 말을 들으셨어!’, ‘어, 어떡해!’하고 사람들 심장을 벌렁거리게나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귀 기울이면 들리는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건만 ‘세상에나. 청력까지 좋아!’라는 말을 듣는 내 과거가 이번에도 문제다.

터벅터벅 자리로 돌아가던 나는 그 자리에서 3cm 높이로 깡총 뛰고 말았다.

‘뭐, 뭐야.’

그 눈 도대체 뭐란 말이냐.

에리히 로나터스는 감동한 표정으로 눈물까지 훔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다부지게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뭐에 결심하는 거지? 당장 취소해!’

목을 짤짤 흔들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눈이라도 씻고 싶은 소박한 심정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칼릭스가 상체를 기울여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축하해.”

“아닙니다. 칼릭스도 제 옆에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

“그럼 샤를이 훈장을 받는 광경을 지켜보지 못했을 테니 지금이 좋아.”

칼릭스가 눈을 접어 웃었다.

맞다. 주머니만 두둑해진 게 아니다.

황제는 내게 백작위도 내렸다.

‘칼릭스한테 도대체 얼마나 알랑거리는 거냐.’

필사적인 알랑거림을 실컷 구경하고 꼭 하루 뒤.

안토니오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벌인 무도한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 * *

“이, 이, 이게.”

공녀에게 무려 작위까지 내렸다. 마음이 쓰리기는 했으나 협상에서 수월하리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저를 보고 비웃듯 입술을 틀어 올린 공녀의 오만한 행태도 참아냈다.

굴욕적이면서도 안도되는 복잡한 마음으로 안토니오는 이만 잠을 청하고자 점등했다.

“…….”

그러나 사위가 묘하게 밝았다.

어리둥절했던 것은 잠시였다.

“선황제 폐하를 독살한 살인자를 찾아라.”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온 일라이저 바이에르의 목소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렸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보석함을 챙기던 안토니오는 손을 거두었다. 사용해봤자 추적만 될 테고, 사용하지 못하는 보석은 짐 덩어리나 될 뿐이다.

당장 융통 가능한 금화는 공녀에게 몽땅 쏟아부은 탓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종에게 명만 내리면 다시 채워지니, 잠시 방심한 게 실책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안토니오는 벌건 눈으로 책장을 밀었다.

“내가 이렇게 끝날 줄 알고.”

황성 지리라면 그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다. 오직 황제에게만 주어지는 수많은 권한 중 하나가 바로 황성의 비밀 통로이므로.

여기서 가장 가까운 통로로 가기 위해서는 문을 열 것도 없다. 바로 황제의 침전에 있는 덕택이다.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게 되자 안토니오는 망설임 없이 내부로 들어갔다.

등 뒤로 책장이 저절로 닫혀 폐쇄되고, 오래된 마법등이 먼지 냄새가 나는 복도를 밝혔다.

‘감히 칼릭스 네가 나를 능멸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안토니오는 미래를 계획했다.

가능성 없는 몽상에 잠긴 머리는 어슴푸레한 구역에 은닉하고 있던 인영이 한 걸음 나선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기다렸잖아.”

놀라 돌아본 순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새까만 암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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