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229화 (229/232)

229화

시간을 돌려, 어느 날 늦은 저녁.

“음.”

칼릭스는 미묘한 미소를 얼굴에 건 채 목을 울렸다.

“꼭 비밀 통로 내부에 잠입해야 할 필요는 없어. 길의 끝에서 기다려도 돼. 아니면 황제의 침전을 수색하다가 기이한 문을 발견했다며 들어가도 될 테고.”

“위험하지 않습니다.”

“황실 소유의 성물이 많아. 그간 자극했으니 곁에 두고 있었을 수 있어.”

“이게 있잖아요.”

나는 활을 슥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칼릭스의 푸른 눈이 깊어졌다.

“잠입하는 게 낫습니다. 선황제가 안토니오에게 황위를 양위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황제에서 황제로 이어지는 극비 통로로 도주하지 못해 비밀 통로에서 붙잡혔다고 알려지는 쪽도 꽤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칼릭스가 잠입하면 안 되는 거 알죠? 대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십시오.”

“각자의 일을 하자는 거야?”

칼릭스가 문득 웃었다.

나는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보다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칼릭스는 고민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그러자.”

한참 뒤, 눈꺼풀이 올라가고 그 아래 드러난 색이 깊은 벽안이 가늘어졌다.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도망치겠다고 말이야.”

그간 내가 내 목숨 살리려고 아등바등한 세월을 안다면 칼릭스가 이런 걱정할 일 없을 텐데 말이다…….

왜인지 머쓱한 기분이 되어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좋아.”

그렇게 돼서 안토니오를 기절시킨 것은 근래 요긴하게 쓰는 활이었다.

아공간 주머니에 다시 넣기 전, 더러운 것에 닿은 부분을 손수건으로 쓱쓱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마음으로 주머니를 툭툭 두드렸다.

“역시 쓸만해.”

괜히 칼릭스가 신수에게 이 성물을 콕 집어 부탁한 게 아니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신수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원래 신수랑 같이 올 생각은 없었는데, 저녁에 갑자기 대공저로 쳐들어온 바람에 동행하게 됐다.

[왜 내겐 말하지 않았느냐!]

[고단한 일정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시는 것 같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시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제 부친이신 리엔타 공작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실제로 보는 것처럼 아주 매우 몹시 생생한 설명을…….]

[왜 나만 쏙 빼놓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도 빼고 하면 더 삐칠 것 같아서 함께 움직이게 된 것이다.

신수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안토니오를 꽁꽁 묶었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열중하고 있던 때였다.

―저 치가 운신할 수 없도록 이미 제약을 걸었다. 그러니 진땀빼지 않아도 된다.

‘어어? 이거 그거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다.

손은 여전히 바삐 움직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요? 대단하십니다!”

―그렇고말고!

원래 안토니오 같은 작자에게는 시각적인 효과가 가장 유용한 법인지라 신수가 손을 쓴 것을 알아도 묶었을 테지만 뿌듯해하고 있는데 초 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할 건 없다.

신수가 위풍당당하게 콧김을 뿜었다.

―어서 가자꾸나.

* * *

제국의 검이 지휘하는 아래,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각 비밀 통로의 출구로 나누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기에 현재 일라이저 바이에르가 발을 붙이고 선 이곳은 다소 적막했다.

턱을 단단히 당긴 채 전방을 면밀히 직시하던 일라이저가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리엔타 공. 대공 전하께서는 조금 전에 황제의 침전으로 향하셨습니다.”

검 한 번 쥐어본 적 없을 것만 같던 남자는 정작 검을 들자 도리어 검을 잡지 않은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걸음과 혼돈 속 소란스러운 사이에서 그는 일견 홀로 고요했다.

성급하지 않되 느긋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승리가 확정된 판에 임하는 사람 특유의 여유라고 생각되지 않던 이유는 그 눈 때문이었다.

“그렇습니까.”

느리게 대꾸한 벨리악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뜨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습니다.”

* * *

황제의 침전에는 예상했듯 아무도 없었다.

칼릭스는 헤매지 않고 곧장 비밀 통로의 입구로 향했다.

어쩌면 선황제는 예감했는지도 몰랐다.

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이들이 그러하듯 기감이 유독 발달하였으니 저를 보는 아우의 역심을 오래전부터 눈치챘는지도.

[칼릭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로서의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이 황성의 비밀 통로를 그에게 알린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황제의 침전은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여러 가지가 달라지기 마련이지. 하지만 변함없는 곳도 있단다. 어디일 것 같니?]

그는 오래된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래. 바로 비밀 통로의 입구다. 세월이 흐르고, 세간의 취향이 달라져도 눈에 튀지 않도록 하려면 화려한 무늬가 없어야겠지. 무엇일까?]

혹여 어린 아우가 잊을까 봐 대화를 통해 연상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말해 주던 목소리는 다정했다.

[정답이다. 칼릭스.]

이곳을 짚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생에서는 실감할 수 없었던, 한때 유일한 가족의 배려가 손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래. 이렇게. 열 수 있겠니?]

그는 회고와도 닮은 기억을 뒤로하고 걸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점차 조급해지는 걸음을 따라 크기를 키운 목소리가 어느 순간 형체가 되어 날아들었다.

“칼릭스가 무사할 것 같은가?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말만 믿고 감히 황성에 쳐들어왔는데,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저 공녀에게 말만 조금 했을 뿐이야! 공녀를 겁주지도 않았다. 제 선택인 것……, 커, 커헉.]

“나는 절대로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생각이네. 반역죄는 즉결 처형이고, 네 부친의 목숨이라도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내게 협조하는 게 좋을…….”

날렵한 하관에 턱관절이 희게 불거진 순간.

“아.”

무신경하다 못해 심드렁하기까지 한 탄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주절주절 말이 많네.”

* * *

“으윽…….”

혹시 활에 피가 묻을까 봐 힘을 조금 빼고 갈겼더니만 안토니오 놈은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제 상태를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한 말이 이거였다.

“공녀. 이게 무슨 짓이지?”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주머니만 뒤적거리자 홀로 주절거린 끝에 나아간 말이 이랬다.

“리엔타 공작도 안 됐군. 그 노련한 정치가가 거짓에 속아 이런 일에 휘말리고 말이야.”

참나.

제 걱정이나 하지 별걱정을 다 하고 있다.

‘왜 이렇게 안 잡히냐.’

그냥 안토니오를 발로 굴리고 맨손으로 뒷목을 칠지 진지하게 생각하며 끙끙거리고 있는데, 드디어 잡혔다.

‘됐다!’

그래서 이제야 대꾸할 기분이 된 것뿐이다.

“주절주절 말이 많네.”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감싸고 몇 차례 돌려보았다.

‘긴장되는군.’

기절할 정도로, 그러나 머리통이 깨지지는 않을 바로 그 세기를 맞추기 위해서는 절묘한 힘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걱정되지만 걱정하지 않아. 서로 목숨 잘 간수하기로 약속해서 말이지.”

내가 잘 챙기는 만큼 칼릭스도 그럴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 걸음마저 멈추게 할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는다.

“얌전히 네 죄나 곱씹으라는 이야기야.”

퍼억!

이번에는 제대로 휘둘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아까도 제대로 휘둘렀다고 생각했다!

‘흠.’

기절한 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안토니오의 눈을 까뒤집어보려고 손을 뻗던 때였다.

―왔다! 그럼 나는 상황을 살펴보러 자리를 비우겠다.

나는 히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제 말대로 황제랑 대면해도 아무 문제 없었죠?’하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시선 끝에 들어온 얼굴을 바라본 순간, 나도 모르는 새 발부터 내디디고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칼릭스의 눈가를 매만졌다.

‘……이상하다.’

분명 눈가가 불긋해서 눈물을 흘린 것 같기도 했고, 몹시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지금은 희미한 붉은 기조차 없는 평소의 색이었다.

“샤를리즈.”

다른 쪽으로 신경이 온통 쏠린 몸은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곳에 시선이 닿았다.

어떤 말을 하려는 듯 그가 입술을 벌렸지만 정작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법이었고, 지금이 우리에게 그랬다.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망설이지 않고 칼릭스의 목에 팔을 걸었다. 어느새 성큼 거리가 좁혀졌기에 팔을 다시 그러모아야 했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맞닿은 입술이 완연한 곡선을 그리다 마침내 어느 한 단어를 느릿하게 발음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 * *

여명이 움텄다.

가장 어두웠던 시각이 지나자 하늘은 유독 시리게 푸른빛을 띠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어느 아이가 일어날 시간이 된 것이다.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내려온 아이의 시야에 문득 창문이 걸렸다.

아직 잠이 묻은 발이 휘청휘청 창문가로 향했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 없는 우연의 끝에서 아이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

마치 제 탄성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두 쌍의 눈이 창문을 올려다본 순간.

아이는 따라서 히히 웃었다.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숙부님과 샤를 님을 보아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고 일기장에 적을 결심을 하는 사샤의 손은 마치 펜을 움직이는 것처럼 꼬물거렸다.

몹시도 행복한 새벽녘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