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날이 밝았다.
지난밤 황성, 정확하게는 황제궁으로 추측되는 구역을 집어삼킬 기세로 피어오른 불길을 목격한 귀족들은 떠오르는 해를 불안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의외롭게도 라베트 로나터스도 있었다.
“공녀님…….”
샤를리즈로부터 계획을 전해 들은 것은 아니었다. 황위 찬탈을 이뤄낼 군사력과 자금력, 그리고 정당성을 가진 가문이 하나뿐인 탓이다.
“라베트! 너 알았냐?”
노크하지도 않고 대뜸 문을 연 에리히가 질문부터 던졌다. 일어나자마자 달려왔는지 그의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아니요.”
“너한테도 말씀 안 하셨어? 우리한테 부탁하시지. 기사들이라면 얼마든지 내어드릴 수 있는데.”
하품을 쩍 하는 에리히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라베트는 제 오라비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다시 황성을 지켜보았다.
머리카락을 대충 매만지던 에리히가 코웃음 쳤다.
“너는 뭐가 걱정이야? 설마 엘루이든과 리엔타가 패했으려고? 네가 나보다 잘 알지 않냐?”
한때 선황자를 건드릴 계획에 동참한 멍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깔끔한 주제 파악이었다.
“네. 승리하셨을 테지요.”
라베트는 순순히 동의했다.
“하지만, 혹시 공녀님께서 황성에 가셨다가 작은 상처를 입으셨을까 봐, 공녀님과 친밀한 사이였던 기사가 전사했을까 봐, 끔찍한 장면을 눈에 담아 오래도록 기억하시게 될까 봐.”
햇살 아래 유독 환하게 빛나는 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걱정되는 거예요.”
* * *
비슷한 시각.
붉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푹 꺾였다.
“안 졸았어!”
가주위 승계를 위한 속성 교육에 하도 시달려 몹쓸 버릇을 가지게 된 로제타는 눈을 굴렸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새침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이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짊어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공녀님은 사람 걱정을 도대체 얼마나 시키려고 하시는지.”
뾰로통하게 중얼거린 로제타가 입술을 꾹 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작위를 수여 받으셨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황제가 리엔타 공작을 견제한다는 사실은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리엔타 공녀가 이뤄낸 공적이 작위를 수여 받아 마땅할 만큼 대단했음에도 황제가 작위 수여를 언급하자 참석한 귀족 모두가 그토록 놀랐던 것이다.
황제의 예상치 못한 선택과 어젯밤 황성에 일어난 불길. 그리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어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지금.
고개만 돌려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로제타가 괜히 중얼거렸다.
“이럴 때 이리안이라도 있었으면 좀 좋아. 같이 걱정이라도 나눌 수 있잖아.”
그러니까 어서 오라고, 로제타는 쓰고 있던 편지를 힘주어 작성했다.
* * *
노백작의 얼굴은 딱딱히 굳은 채였다.
그는 어쩐지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과거에 도착한 편지지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교황을 축출해내기 전, 리엔타 공녀가 보냈던 편지였다.
필리엄 백작에게는 미안한 것이 많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목숨과도 같은 손녀를 살려주고 진창에 있던 그를 구원해 준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황성에 고정돼 떨어질 줄 모르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할아버지!”
아리아가 달려왔다.
언제 초조한 얼굴을 했냐는 듯 백작이 넉넉하게 웃었다.
“오늘은 아리아가 일찍 일어났구나. 햇살에 눈이 부셨던 게냐? 그렇다면 커튼을 바꿔야겠구나.”
“아이참. 그것보다는!”
아리아가 눈을 빛냈다.
“황성에 불이 났어요! 할아버지도 보셨어요?”
“그럼. 보았지.”
“이것도 무슨 행사인 거예요? 저는 언제 황성에 갈 수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
질문했으나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던 소녀는 또 열심히 종알거렸다.
“생각만 해도 신난다! 공녀님이랑 같이 갈래요!”
두 팔을 번쩍 올리고 웃던 아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공녀님 요새는 오지도 않으시고. 섭섭해!”
오리처럼 뾰족하게 입을 내민 채 잔뜩 토라진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필리엄 백작은 다시 한번 황성을 바라보았다.
‘신, 혹은 신에 필적하는 존재시여. 부디 엘루이든 대공을 보살폈던 빛을 다시 내려 주소서.’
간절한 바람을 올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백작은 드디어 안도할 수 있었다.
* * *
선황제의 의문스러운 사망에는 역시나 타인의 개입이 있었다.
바로 황위를 욕심낸 안토니오의 소행으로, 그는 선황제도 모자라 어린 조카마저 살해할 악독한 계획을 세웠다.
선황제의 머리카락 끝이 푸르게 변색되어 있던 것으로 파악하건대 튜베롯 독이 확실하며, 신전은 극렬히 부인하였으나 선황제 독살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튜베롯 독의 개량에 매진한 신전은 이미 신병을 확보한 선황비를 이용해 선황자의 거취 역시 확보할 목적이었으며, 더 나아가 제국을 좌지우지할 야욕을 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어린 학생들에게 신전에 대한 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데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는바, 신학 과목은 아카데미에서 제외되며 신전과 직통으로 연결한 모든 포탈은 폐쇄한다.
전대 교황이 자행했듯 신전 내부에서 개인적으로 포탈을 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황실 기사단에는 불시에 신전을 수색할 권한이 주어진다.
황실과 아슬아슬하게 비슷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신전의 기세가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신호탄이었다.
* * *
만약 황제의 치세가 대단했다면 아직 어린 선황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처형을 유보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선황제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혈족 상잔의 주범이기는 하나, 앞서 터진 라우드의 사건이 너무도 충격적인 탓에 잘못이 저거 하나지 않느냐는 개소리를 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 볼 일 없었다.’
나는 흥, 하고 웃고는 수정 구슬을 반짝반짝 닦는 데 열중했다.
“저기 말입니다. 제가 신수의 등에 타서 날아갈 때 들려온 목소리, 그쪽 거였죠?”
간직하고만 있던 의문을 조심스레 읊었다.
“간헐적으로 조금씩 기억이 나나 봐요.”
마침내 본론이다.
두 손으로 구슬을 쓱쓱 닦으며 공손하게 물었다.
“그런데요, 묵음 처리됐던 목소리는 안 기억날 것 같은데 그거 말씀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알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궁금한데 말입니다?
뇌물을 바치듯 구슬을 열심히 닦았지만 끝내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수정 구슬에게 대놓고 부탁할 수도 있겠다만 딱히 끌리는 방법은 아니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파헤쳐 듣고 싶지 않았다.
구슬을 보관함에 넣기 전 무심코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웠어요.”
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줄곧 이 말이 하고 싶었다고.
함 안에 수정 구슬을 조심조심 넣다가 불현듯 멍청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어?”
수정 구슬의 표면이 마치 화답하듯 잠깐 빛난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눈을 크게 부릅떴지만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표면에는 내 우스운 얼굴만 비칠 뿐이었다.
“그런가.”
내 혼신의 아부 결과물에 햇살마저 미끄러진 것인가.
볼을 긁적이며 방을 나왔다.
현관을 나서자 어느덧 성큼 다가온 봄을 닮은 바람이 부드럽게 밀려와 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뜨렸다.
하지만 이제 더는 ‘주인공 아니라고 야박하군.’하고 불퉁해지지 않는다.
“샤를 님!”
봄꽃보다도 더 환한 미소를 얼굴에 그린 아이가 양팔을 벌린 채 달려왔다.
사샤와 함께 걸어오던 칼릭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착실히 좁혀지고, 미래의 조각이 시야를 강탈했다.
은발에 녹색 눈.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
입고 있는 새하얀 드레스보다도 눈부셔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는 사람.
“잘 어울려, 샤를.”
가로로 긴 눈매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누가 봐도 오늘의 주인공이야.”
언젠가 보았던 바로 그 조각이었다.
‘내 생일이 아니었군.’
깨달음도 잠시.
나는 조용히 분노했다…….
‘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리도 모르는 조각 같으니.’
이렇게 미리 보여 주기 있느냐는 말이다!
속으로 씩씩거리던 중, 돌연 생각이 닿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계속 보이는 건가?’
저번에 흑마법사를 제물로 삼아 솟구친 빛기둥을 조각낸 이후로 나는 미래의 조각을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회귀 전 샤를리즈와 칼릭스의 다음은 아마도 저 이후론 없을 테니까.’
물론 그 이튿날 바로 미래의 조각을 읽었기 때문에 틀린 추측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과연 언제까지 보일지 궁금해진 것이다.
“흠.”
그래서 조금 아쉬워졌다.
앞으로도 처음으로 눈이 마주칠 때 칼릭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내가 갑자기 웃자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아이가 따라서 헤, 하고 웃었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속삭였다.
“그냥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미래를 보여 주는 조각이 더는 필요 없을 만큼. 오히려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런 안온한 행복이.
행복한 웃음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비벼지던 말랑한 뺨이 어떤 말을 하는 것처럼 방싯거렸다.
이윽고 가까워진 칼릭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닿을 듯 닿지 못하고 헤매고 헤맨 끝에 마침내 마주한 지금이다.
우리, 원 없이 사랑하자고.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날이었다.
-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