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화 (2/300)

[2화] 내가 더러워서 관둔다

장롱의 문틈 사이로 짙은 청색이 뻗어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색은 더욱 짙어졌고, 아예 자줏빛에 가까워졌다.

게이트였다.

던전과 연결된 게이트였다.

경일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그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새벽이 오자 빛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경일은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잠을 충분히 잤지만, 그의 얼굴엔 아직 진한 피로가 남아 있었다.

“어휴, 피곤해.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잤는데도 피곤하네. 하~ 진짜 돌겠다. 그 미친 돼지 새끼 때문에 요쯤 무리했더니 몸이 엉망이네. 설마… 오늘도 그 지랄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어제 온종일 그 지랄을 했으니 미안해서라도 오늘은 그냥 넘어갈 거야.”

경일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출근을 했다.

“좋은 아침.”

“네, 안녕하세요.”

탈의실로 들어가니 먼저 온 작업자들이 웃으며 서로 인사를 건넸다.

아침이라 그런지 다들 얼굴이 밝아 보였다.

유일하게 경일만 안색이 어두웠다.

작업복을 갈아입고 시간에 맞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몬스터 부산물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 옆에 자리를 잡자, 작업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와 함께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였다.

“휴~ 오늘은 안 올 모양이네. 하긴, 돼지 새끼가 어제 온종일 내 옆에서 떠들었으니 지도 피곤하겠지.”

경일의 희망 사항은 작업이 시작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깨졌다.

악취를 막아 주는 비싸 보이는 방독 마스크를 쓰고, 한 손에 확성기를 든 김래원이 살찐 배를 흔들면서 경일에게 걸어왔다.

경일은 자신도 모르게 일을 멈추고 똥 씹은 얼굴로 김래원을 쳐다봤다.

그 순간, 확성기에서 김래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뭐 합니까? 가만히 서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거 안 보입니까?”

‘다른 사람이 뭐가 힘들어. 내가 손을 멈춘 게 아직 일 분도 안 지났다고.’

경일은 마음속으로 투덜대며 빠르게 작업에 복귀했다.

김래원은 어디선가 가져온 의자를 경일의 바로 옆에 두고 앉았다.

워낙 가까이 의자를 놓은 터라 조금만 움직여도 그의 몸에 닿을 거 같았다.

더러운 작업복이 그의 새하얀 양복에 닿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바로 옆의 김래원까지 신경 써야 하니 미칠 거 같았다.

살집이 두꺼운 다리를 꼬고 앉은 김래원은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일하기 싫습니까? 싫으면 지금이라도 집에 가면 됩니다. 최소한 월급 받은 만큼은 해야 하는 게 작업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개소리를 해 대는 김래원의 입을 한 방만 갈길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거 같았다.

김래원이 워낙 바짝 붙어 있어 그의 몸에 부딪히지 않게 작업하느라 일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 모습을 김래원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확성기에서 귀를 뚫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씨발, 내 말이 우스워요? 우습냐고. 손이 더 느려지면 어쩌자는 거야. 방금 내가 말했지. 일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관두라고. Move, move. 손은 움직이면서 내 말 들으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닭대가리야? 저런 놈이 직원을 하고 있으니 회사가 발전이 없지. 제기랄, 그놈의 노동법만 아니면 그냥 잘라 버리는 건데.”

오늘따라 김래원의 말속에 뼈가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온갖 욕까지 가리지 않고 하는 게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개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경일은 터질 거 같은 분노를 참고 또 참았다.

그를 해방해 준 건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경일은 김래원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해 작업반장을 찾아갔다.

작업반장이라면 분명 이유를 알고 있을 테니까.

“저 새끼가 지금까지는 이렇게까지 심하게 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왜 저러는지 아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경일이 묻자 그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거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작업반장이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경일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괜찮습니다. 말해 주세요. 기껏 해 봐야 여기서 잘리는 것 말고 더 있겠습니까?”

오히려 경일이 더 대범하게 말했다.

그러자 마음속 부담이 덜어진 듯 작업반장이 입을 열었다.

“저 새끼가 오늘 아침 아는 사람 소개라고 사람을 한 명 데리고 왔어. 근데 지금 티오가 없다고 사장이 거절했나 봐. 그럼 물러서야 하는데, 저 새끼가 약점이라도 잡힌 건지 데리고 온 사람에게 꼭 넣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 사장 눈치가 보이니 자네를 함부로 자를 수는 없고, 그래서…….”

경일은 뒷말을 더 듣지 않아도 돼지 새끼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었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회사를 나가지 않고 견딜수록 김래원은 더 기를 쓰고 괴롭힐 게 빤했다.

“세상 한번 더럽네. 이 조금마한 공장 아들도 권력이라고, 제기랄.”

작업반장은 경일의 한풀이를 모른 척하고 자리를 떴다.

그도 힘없는 작업자인 이상,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경일은 작업에 복귀했다.

“당신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우리 회사가 만만해 보여? 이렇게 설렁설렁 일할 거면 당장 때려치워.”

경일은 늦지 않았다.

공장의 벽에 붙은 시계도 아직 작업 시각을 알리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김래원은 두꺼운 손목에 찬 번쩍거리는 시계를 보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경일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작업을 시작했다.

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김래원은 또다시 짜증을 냈다.

“열심히라도 해. 일을 못 하면 남들보다 열심히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지금까지 표면적으로나마 존대를 했던 김래원은 아예 마음을 먹었는지 반말로 경일을 갈구기 시작했다.

경일이 할 수 있는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에 김래원은 더 흥분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별별 꼬투리를 잡아 욕을 퍼부었다.

평소보다 훨씬 심한 괴롭힘에도 경일이 꿋꿋하게 견디며 일만 하자, 오히려 약이 오른 건 김래원이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힐끗 본 경일은 작업대에서 물러났다.

“지금 일하는 도중에 뭐 하는 거야? 장난쳐? 회사가 만만해 보여? 내가 보고 있는데도 이러는데, 내가 없으면 얼마나 개판을 친다는 얘기야?”

김래원은 확성기의 볼륨을 최대로 올리고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화장실 갑니다, 화장실. 화장실도 못 갑니까?”

경일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그가 따지고 들자 김래원은 순간 멍해졌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틈에 경일이 재빨리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가자, 김래원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야, 당장 멈춰. 누가 작업 시간에 화장실을 가래? 미친 새끼가 눈에 보이는 게 없어? 네가 화장실에서 똥 싸는 시간까지 회사에서 돈을 줘야 해? 당장 돌아오지 못해!”

김래원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경일을 쫓아왔다.

경일은 따라오는 김래원을 확인하곤 그와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김래원이 경일을 잡으려고 걸음을 빨리하자, 경일은 그에 맞추어 더 빠르게 걸었다.

그는 경일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둘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화장실은 공장의 옆에 딸린 부속 건물에 있었다.

경일이 공장의 벽을 따라 코너를 도는 순간, 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약이 빠짝 오른 김래원도 곧바로 경일을 따라 코너를 돌았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아악!”

김래원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더러운 땅바닥에 허물어졌다.

그가 고통으로 바닥을 구를수록 새하얀 양복에 누런 흙이 묻었다.

혈색 좋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다 이내 하얗게 질렸다.

손에 있던 확성기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찢어지는 듯한 육성으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계속해서 질러 댔다.

“저런, 괜찮으세요?”

경일이 천진한 얼굴로 김래원에게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거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아아아악! 씨발, 이거 네 짓이지? 개새끼야, 분명 일부러 그런 거지?”

김래원은 양손으로 한쪽 신발을 잡고 바닥을 굴렀다.

구르는 와중에도 무섭게 치켜뜬 눈으로 경일을 노려봤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푸들거리는 뽀얀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잡은 신발 밑창에 못이 보였다.

김래원이 못을 밟은 것이다.

무거운 체중으로 못을 누르자 신발 밑창을 그대로 뚫고 그의 발바닥 깊숙이 박혀 버렸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제 누명까지 씌우는 겁니까? 내가 했다는 증거 있어요?”

자신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김래원을 노려보며 억울한 듯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씨발, 사장 아들이면 다야? 죄 없는 사람 누명이나 씌우고. 내가 따라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네가 스스로 화장실 가는 날 따라오다가 생긴 일이잖아. 몬스터보다 더 냄새나는 돼지 새끼가 지금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경일이 태도를 바꾸어 윽박지르는 모습에 김래원은 순간 어이가 없어 아픔도 잊을 정도였다.

일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자신도 지지 않고 뭐라고 욕을 하고 싶은데, 입은 어버버거릴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개만도 못한 돼지 새끼야. 더러워서 내가 그만둔다. 오늘까지 일한 거 바로 입금시켜. 안 그럼 노동청에 바로 신고해 버릴 테니까? 캬앗~ 퉷!”

경일은 김래원의 얼굴 바로 옆에 가래침을 뱉고서는 주머니에서 사표를 꺼내 그의 앞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저, 저, 저 이런… 개, 개, 개… 새…….”

김래원이 분한 마음에 욕을 내뱉으려 했지만, 경일은 곧바로 돌아서서 공장을 나가 버렸다.

비록 공장을 관두기는 했으나, 속은 시원했다.

김래원에 발에 찔린 대못은 그의 짐작대로 경일이 점심시간에 미리 작업해 둔 것이었다.

그의 계산대로 일이 흘러가자 속이 시원했다.

CCTV도 없는 곳이라 김래원은 어떻게 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고아가 되어 쓴맛, 단맛 다 본 경일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김래원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건들었다.

녹이 잔뜩 슨 못이라 김래원은 한동안 고생해야 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부터 했다.

부지런히 걸어온 덕에 찬물로 샤워를 해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제길, 인생 별거 있냐? 살아오면서 이 정도 일은 늘 겪어 왔잖아. 직장은 또 구하면 그만이야. 설마 나 하나 들어갈 곳이 없을까.”

경일은 허세를 부렸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밀려드는 막막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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