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시간 축
“당장 뭐부터 해야 하나? 음~ 일단 잘 곳부터 만들자. 그런데 어떻게 만들지? 그러고 보니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뭐, 대충 만들자. 이슬만 피하면 되는 거지.”
경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급한 대로 작은 움막을 만들면 되겠다. 만들기도 쉽고.”
생각이 끝나자 곧바로 필요한 나무를 구하러 갔다.
풍성한 숲인 만큼 쓸 만한 나무는 많았다.
바닥에 적당한 두 개의 나무를 기둥 삼아 꼽았다.
기둥을 한 개의 나무로 연결하니 간단한 움막의 뼈대가 만들어졌다.
기둥을 연결한 나무에 사선으로 나무를 놓고 그 위에 나뭇잎이 풍성한 가지를 꺾어 덮었다.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바닥에 나뭇잎을 촘촘히 깔았다.
부족하지만 경일의 눈에는 근사한 움막이 만들어졌다.
“좋구나.”
그는 움막을 기분 좋게 바라봤다.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 오는 희열이 있었다.
경일은 땔감으로 쓰기 적당한 나무들을 구해 움막의 옆에 두었다.
그러고는 불을 지필 땅을 다듬고 축구공만 한 돌을 원으로 둘러 작은 화덕을 만들었다.
“적당한 공구들도 준비해야겠어. 공구들만 있어도 훨씬 멋진 걸 만들 수 있을 거야.”
경일은 던전에 만들고 싶은 것이 많았다.
직접 만든 것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직은 이곳이 낯설지만, 자신의 손길이 닿을수록 친숙해질 것이었다.
던전은 먹을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풍족한 곳이었다.
나무를 구하러 가는 길에 여러 가지 과일을 봤다.
이곳은 계절과 관계가 없는 듯했다.
처음에 던전에 들어와서는 사과를 봤고, 조금 전에는 복숭아를 봤다.
여름 과일과 가을 과일이 같이 존재했다.
“이게 행복이구나. 걱정거리도 없고, 먹을 건 지천에 깔려 있고, 계절에 상관없이 온 과일을 다 먹을 수도 있고. 이곳에는 내가 모르는 또 어떤 것들이 존재할까? 이거 앞날이 기대되는 걸?”
우선 장작을 공기가 통하게 듬성듬성 쌓아 불을 붙였다.
움막에서 자는 거야 별문제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노숙은 질리도록 해 봤으니까.
자는 곳과 불이 해결됐으니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경일은 개울로 가서 물고기를 잡았다.
개울물은 워낙에 투명해 바닥의 작은 모래까지 보일 정도로 맑았다.
아까 먹은 물고기가 너무 맛있었던 터라 실컷 먹을 요량으로 많이 잡았다.
“손으로 이만큼의 물고기를 금방 잡다니. 이거 완전 사기네, 사기. 불에 직접 구워 먹으면 이게 또 얼마나 맛있으려나.”
경일은 어릴 때 본 만화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작대기에 통째로 끼워 맛있게 구워 먹던 걸 보고 나서는 언젠가는 자신도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나무를 구해 오면서 봤던 복숭아나무에서 복숭아도 몇 개 따 왔다.
“복숭아에는 또 어떤 효능이 있으려나?”
복숭아를 크게 한입 베어 먹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던전 복숭아를 먹었습니다. 더위를 견디는 힘이 강해집니다.]
“음, 더위라… 여긴 크게 덥지 않으니 별 필요는 없겠네. 그나저나 무슨 복숭아가 이렇게 맛있는 거야? 단맛과 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구나. 적당히 단단한 게 씹히는 식감도 좋고. 과일에서 이렇게 깊은 맛이 난다고? 혹시 손오공이 훔쳐 먹은 선도 복숭아? 하하하하!”
늘 얼굴을 찌푸리고 살았는데, 지금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경일의 손에 있던 복숭아가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러곤 작은 나뭇가지에 손질한 물고기를 끼워 모닥불 옆에 꽂았다.
기름기가 얼마나 많은지 물고기가 익어 가면서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소리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어릴 때 고아가 되어 배운 것도 없이 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삶이었는데, 이곳은 힐링 그 자체였다.
잘 익은 물고기는 프라이팬에 구운 것과 또 다른 진미였다.
지방이 가득한 물고기는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났다.
희미한 과일 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든든하게 먹은 후에 움막에 앉았다.
바로 앞에서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타고 있었다.
모닥불의 따뜻한 온기를 즐기며 멍하게 불을 바라보고 있으니, 모든 잡생각이 사라졌다.
어둠이 왔지만 경일은 크게 무섭지 않았다.
진짜 무서운 건 오히려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도 많았지만,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한 자신을 무시하고 이용하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사람을 믿는 바람에 힘들게 모은 돈을 모두 사기당해 빚까지 짊어졌다.
열심히 살았던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 덕에 이 나이를 먹고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삶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이젠 최소한 먹고 살 걱정은 덜었다.
늘 자신은 운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냥 행복도 아닌 어마어마한 행복이 찾아왔다.
너무 행복해 미칠 거 같았다.
그러자 머릿속에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사기를 당하고 멀어진 친구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밀어낸 친구도 있었다.
친구에게까지 신세를 지기 싫어 연락을 끊고 산 지가 몇 년이 지났다.
“내가 그동안 외롭기는 많이 외로웠구나. 먹고 살 방법이 생기자 친구들부터 떠오르는 걸 보니.”
경일은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며 밤을 지냈다.
다음 날, 아침.
배낭의 남은 공간을 사과로 모두 채워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탐스러운 사과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조금 쉬었다가 시장에 가서 사과를 팔아야겠어. 근데, 얼마를 받아야 하지? 던전 사과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데.”
던전의 자원은 비싸게 팔렸다.
던전 과일 같은 경우, 그 맛이 지구의 과일보다 훨씬 뛰어나 인기가 좋았다.
더군다나 경일의 사과는 활력을 높여 주는 효능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걸 던전 사과라고 증명할 방법도 없고. 최소한 헌터 라이선스라도 있으면 사람들이 믿어 줄 거 같긴 한데…….”
문제는 경일은 헌터 라이선스를 취득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헌터 라이선스를 받으려면 어느 정도의 힘을 증명해야 하는데, 자신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 같았다.
자신이 헌터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에이~ 그냥 팔자. 널린 게 사과인데. 맛있는 사과니 금방 팔릴 거야.”
경일은 시장에 갈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확인했다.
“어, 이상한데?”
핸드폰의 날짜가 이상했다.
분명 하루가 지났는데, 핸드폰의 날짜는 어제를 표시하고 있었다.
“이런, 고장 난 거야? 하필 이럴 때 고장이 나고 그러냐. 하긴, 너도 이 정도면 오래 버텼다.”
경일은 컴퓨터를 켰다.
핸드폰이 고장 났으니 컴퓨터로 시간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오래된 컴퓨터가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켜졌다.
윈도우 화면이 켜지고, 오른쪽 아래 끝에 시간이 떠올랐다.
“어……?”
경일의 입이 벌어졌다.
“이거… 이상한데? 컴퓨터가 고장 난 건 아닌 거 같은데, 왜 핸드폰 날짜랑 컴퓨터 날짜가 같은 거지? 시간까지 똑같은 걸 보니, 핸드폰이 고장 난 거 같지는 않은데…….”
핸드폰과 컴퓨터를 번갈아 보며 몇 번을 확인해도 날짜랑 시간이 똑같았다.
“내가 분명 하루를 보내고 나왔는데, 어떻게 게이트로 들어간 날짜인 거지?”
이미 시장에 갈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혹시 던전과 지구의 시간의 축이 다른 거야?”
경일은 핸드폰을 챙겨 게이트를 통과하려다가 멈췄다.
“이런 바보. 던전에서는 지구의 전자 제품이 기능을 안 하잖아. 음… 그럼 어쩐다.”
태엽 시계라도 하나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에겐 태엽 시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 시간의 축만 다르다는 걸 확인하는 건데, 굳이 시계를 가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경일은 그대로 게이트를 넘어 던전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숲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게 바로 산림욕이구나. 숲과 같이 호흡을 하니 정말 좋네.”
의외로 숲을 산책하며 보내는 시간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숲의 평화로움에 빠져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대충 두 시간 정도 지난 거 같으니, 이만 돌아가 볼까.”
경일은 게이트를 통과해 방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대박인데?”
던전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 나왔지만, 시간은 겨우 4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우와, 이보다 좋을 수가 없구나. 그렇다면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거잖아?”
입에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너무 큰 행복이라 오히려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일단 게이트는 무조건 숨겨야겠어. 이런 보물을 누군가가 알아차리면 큰일 날 거야. 가난이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이 동네는 훔쳐 갈 게 없어 좀도둑도 얼씬거리지 않으니까.”
경일은 한참의 시간을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썼다.
그런 뒤 사과가 든 배낭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모자를 깊게 쓰고 최대한 얼굴의 노출을 피했다.
“돈이 없어 사과를 팔기는 하지만, 이런 사과는 금방 소문이 날 거야. 그러니 최대한 조심해야 해.”
경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부러 옥탑방과 아주 먼 시장으로 갔다.
시장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가지고 온 이불 위에 사과를 올렸다.
구석진 자리였지만, 사과의 향기에 끌린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어머, 저 사과 좀 봐. 색깔이 어떻게 저렇게 예쁘지?”
사과를 본 한 아줌마가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 경일에게 다가왔다.
“사과가 너무 좋네요. 얼마에요?”
“하나에 만 원요.”
경일은 시중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불렀다.
이 정도의 맛이라면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어머. 아저씨, 사과가 좋은 건 인정하겠는데, 너무 비싸잖아요.”
“이건 제 친구가 특별히 기른 사과라 맛으로 보장합니다. 잠시만요.”
경일이 빠르게 사과를 껍질을 벗기고 작게 잘라 아줌마에게 내밀었다.
“안 사셔도 되니 일단 맛을 보고 판단해 주세요.”
맛있어 봤자 얼마나 맛있겠어 라는 생각을 하며 아줌마는 사과를 입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줌마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의구심 가득하던 얼굴에 환희가 떠오르는 건 금방이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던전 사과를 먹었습니다. 몸의 활력이 높아집니다.]
경일은 아줌마의 머리 위에 떠오른 메시지에 놀랐으나, 최대한 표정을 숨기고 그녀를 관찰했다.
만약 저 글자가 아줌마에게도 보인다면 이런 시장에서 사과를 파는 것을 재고해야 했다.
던전에서 나온 사과를, 그것도 뛰어난 맛에 효능까지 있는 것을 자신이 판다고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어머~ 사과가 너무 달콤해서 그런지 기분까지 좋아지네. 막 몸에 힘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사과가 너무 맛있어서 그런 건가? 아저씨 말대로 정말 맛있네요. 이 사과 전부 사죠. 총 얼마에요?”
경일은 아줌마의 말에 그녀에게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과의 효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확실히 적용된다는 것도 확인했다.
“총 50개고요. 오십만 원입니다.”
아줌마는 지갑을 꺼내 곧바로 현금을 건네주었다.
경일은 준비해 온 비닐봉지에 사과를 담았다.
“혼자서 못 들고 갈 거 같은데, 차 있는 데까지 옮기는 것 좀 도와주세요.”
“그럼요.”
경일은 기분 좋게 사과를 옮겨 주었다.
시장에 온 지 30분도 안 되어 50만 원을 벌었다.
몬스터의 피비린내를 맡으며 5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약간의 수고만으로 번 것이다.
시장에 오기 전부터 충분히 팔 자신은 있었지만, 실제로 돈을 손에 쥔 기분은 또 달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