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8화 (8/300)

[8화] 위로

“음~ 오늘은 어느 시장으로 가지. 여기는 저번에 간 곳인데. 에이~ 귀찮은데 오늘만 여기로 가자.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경일은 아무 생각 없이 이전에 한 번 사과를 팔았던 시장으로 갔다.

한 번 갔던 곳이라 자리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번과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사과를 꺼내 놓았다.

한참 배낭에서 사과를 꺼내는데, 누군가가 경일을 보고 반색했다.

“어머, 총각, 드디어 만났네. 내가 총각을 찾으려고 얼마나 시장에 자주 왔는지 알아?”

경일을 보고 반가워하는 여자는 바로 신화 길드 5팀장의 부인이었다.

“아~ 그동안 다른 시장에 다녔거든요.”

경일은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그녀는 길드에서 사과 장수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남편에게 시달렸다.

매일 남편과 함께 끌려 나가다시피 아침부터 시장에 나가야 했다.

계속해서 닦달하는 남편의 성화 때문에 요령 한 번 피우지 못하고, 시장이 파할 때까지 사과 장수를 찾아 헤매야 했다.

일주일이나 그 짓을 하고 나서야 남편은 자신을 놓아주었다.

남편은 다시 길드로 출근을 시작한 자신이 없더라도 사과 장수를 꼭 찾아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남편의 출세가 걸려 있다는 것을 안 그녀는 이전처럼 온종일 시장에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시장에 들렀다.

그러다 오늘 드디어 경일을 발견한 것이었다.

“총각, 모습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네? 이렇게 이쁜 사과가 아니었으면 못 알아볼 뻔했어. 근데 무슨 일 있었어? 한참을 안 보이더니.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전화 한 통만 하고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꼭 기다리고 있어야 해. 사과는 내가 두 배 가격으로 전부 살 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고!”

5팀장의 와이프는 경일에게 신신당부한 다음 남편에게 사과 장수를 찾았다고 전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남편은 혹시라도 사과 장사를 찾으면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자신에게 알리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경일은 그녀가 전화하기 위해 허둥대며 가는 모습을 보자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다급하게 말하는 모습이나, 사과 값을 두 배로 쳐준다면서 꼭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는 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자신의 예감이 틀릴 수도 있으나, 계속해서 자신을 찾았다는 말이 왠지 섬뜩하게 들렸다.

경일은 배낭에서 꺼내던 사과를 이제는 도로 집어넣기 바빴다.

순식간에 사과를 챙기고, 그 길로 곧장 시장에서 빠져나갔다.

5분도 지나지 않아 5팀장 부인이 다시 왔을 때는 경일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런, 어디를 간 거야? 남편한테 찾았다고 이미 말했는데… 도대체 어디를 간 거지? 큰일 났네.”

5팀장 부인은 곤란해하며 경일을 찾으러 시장을 돌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5팀장뿐만 아니라 부길드장까지 시장으로 찾아왔다.

헌터들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시장을 헤집고 다니자, 시장의 손님들이 불편해하며 시장을 떠났다.

5팀장 부인은 남편뿐만 아니라 길드의 높은 사람까지 시장에 오자, 쩔쩔매며 상황을 설명했다.

신화 길드는 그녀의 설명에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시장을 옮겨 가며 장사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장을 옮겨 다니며 계속해서 장사할 정도로 던전 사과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곽마권은 이번 사건으로 경일을 꼭 찾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먹었다.

* * *

경일은 그동안 죽을힘을 다해 빚을 갚아 왔고, 이제 천만 원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정말 힘들었다. 가족같이 믿었던 인간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더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던전 사과를 판 돈으로 마지막 남은 빚을 정리할 계획이었다.

10년을 넘게 자신을 괴롭혀 왔던 빚에서 해방될 날이 머지않았다.

경일의 시장 투어는 계속되었다.

느낌이 안 좋았던 아줌마와의 만남이 찝찝하긴 했지만, 빚을 지고 있는 상태이다 보니 계속 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한 번 간 시장은 절대 가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예 다른 지방에 가서 사과를 팔 때가 많았다.

처음 간 시장이라도 던전 사과는 어렵지 않게 팔 수 있었다.

그 결과, 빚을 다 갚고도 삼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장에서 던전 사과를 파는 일을 그만두었다.

던전 사과를 계속해서 팔고 싶었지만, 더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틀 전이었다.

평소와 같이 과일을 팔러 시장을 들렀다가 수상한 무리를 발견했다.

시장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남자들이 급하게 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들의 험악한 분위기에 시장에 온 손님이나, 상인들은 눈치를 보기 바빴다.

눈치 빠른 손님과 상인은 곧바로 시장을 나가거나, 장사를 포기하고 가게를 닫았다.

‘헌터가 틀림없어. 재래시장에 어울리지 않는 비싸 보이는 옷차림에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걸 보면 틀림없을 거야.’

경일은 저들이 분명 헌터일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신체 능력이 일반인과 같긴 해도 자신도 각성한 헌터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시장을 돌아다니며 시장 상인을 신문하듯이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물으며 유심히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꼭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이렇게 많은 헌터가 이런 재래시장에 나타날 일이 뭐가 있지?’

불현듯 얼마 전 자신을 계속 찾았다는 아줌마가 떠올랐다.

‘혹시 나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

경일은 아줌마가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을 그냥 흘리지 않았다.

던전 사과를 팔 때부터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 사과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도 있을 거라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정도 품질의 사과는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엄청난 수량의 던전 사과를, 그것도 헐값에 파는 자신을 보고 군침을 흘릴 것은 뻔했다.

‘그래, 틀림없어. 저들은 분명 나를 찾고 있는 거야.’

경일은 재빨리 배낭을 숨기고 시장에 온 손님 행세를 하며 장을 보는 척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하성아, 찾았어?”

상급자인 듯한 짧은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아니요, 팀장님. 우리가 찾던 사과 장수는 안 보입니다.”

“여기 시장으로 온 게 아닌가? 이 새끼는 한 군데서 팔지, 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장사를 해 사람 귀찮게 만들어. 이건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야? 사람 쉬지도 못하고 귀찮아 미쳐 버리겠네. 길드장님이 직접 챙기는 일이라 대충할 수도 없고… 도대체 이런 지저분한 시장을 며칠째 돌아다니는 거야. 씨발, 잡히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다.”

경일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사과 장수라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이런 날이 올 거 같아 조심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자신을 찾는 남자들의 고압적인 분위기를 보니 엮여서 좋을 게 없어 보였다.

“휴, 다행이다. 사과 판매를 중단했어야 했는데… 그놈의 욕심 때문에. 그래도 변장을 철저하게 하고 다녀서 망정이지. 과한 욕심이 화를 부를 뻔했구나.”

경일은 그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시장을 벗어났다.

사과 장사는 오늘로 끝이 났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던전이 있는 한, 먹고 사는 건 걱정이 없었다.

이미 다음 계획을 세워 둔 상태이기도 했고.

빚도 다 갚았고, 예전처럼 아등바등하며 죽어라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작은 분식점을 열 생각이었다.

이 동네는 자신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런 산동네에 헌터들이 올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경일은 고아로 자라며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그런지 돈을 모으면 꼭 작은 식당을 열고 싶었다.

힘들기만 했던 유년 시절, 그에게 딱 하나 따뜻한 기억이 있었다.

배고픈 자신에게 늘 음식을 베풀어 주던 작은 식당이 있었다.

‘그때 참 따뜻했지. 그 아주머니 덕분에 위로도 많이 받았고.’

작은 친절이었지만, 경일에겐 힘든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큰 용기가 됐다.

그래서 자신과 같이 배가 고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돈이 없어 잃지 않아도 될 것을 너무 많이 잃은 탓이었다.

‘그때 만났던 작은 식당의 아주머니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으면, 어릴 때 내 삶이 훨씬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던전에 음식 재료가 널렸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식점이 딱이었다.

삼천만 원을 모았으니, 이제 작은 식당을 열 종잣돈은 충분했다.

경일은 던전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장롱 속의 게이트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게이트는 자신이 던전을 들어간 뒤로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희미해졌다.

그동안 던전을 탐험했지만, 새로운 생명체를 본 적은 없었다.

마음먹고 제법 먼 곳까지 돌아다녀 봤지만, 끊임없는 자연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본 건 던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곳이 기존의 던전과 매우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크기부터 차이가 났다.

자신이 알고 있는 던전은 이렇게 크지 않았다.

기존에 던전을 폐쇄하는 것처럼 이곳에서 던전의 핵을 찾는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이곳은 광활했다.

던전을 다 둘러보려면 몇 년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든 이후로 탐험할 생각을 버렸다.

그중 가장 이상한 건 몬스터의 유무였다.

지금까지 몬스터의 흔적을 본 적이 없었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경일은 시냇물 옆에 거점으로 정한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텐트였다.

던전 사과를 팔고 번 돈으로 가장 먼저 구매한 물건이었다.

경일은 이곳에 집을 지을 생각이었다.

공터의 한구석에는 나무가 가득 쌓여 있었고, 나무를 가공하기 위한 작업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울퉁불퉁한 땅을 가다듬어 평탄 작업을 한 집터도 보였다.

여기저기 그동안 그가 노력한 흔적들이 보였다.

경일은 오늘도 톱을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이왕 짓는 거 튼튼하고 어느 정도 넓게 지을 생각이었다.

겨우 네 평짜리 옥탑방은 지긋지긋했다.

부앙, 부앙.

조용한 숲에서 엔진 톱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시동이 걸린 엔진 톱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휘발유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단순한 구조의 엔진 톱은 던전에서도 무리 없이 돌아갔다.

엔진 톱이 거침없이 나무의 밑동을 잘라 갔다.

엔진 톱을 들고 있는 경일의 팔에 제법 근육이 붙어 있었다.

유약해 보이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팔뚝에 자리 잡은 멋진 근육이 보였다.

“넘어갑니다~”

경일의 기분 좋은 외침과 함께 그가 의도한 방향으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경일은 나무의 가지를 모두 잘라 냈다.

그러자 일자로 곧은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일은 공구가 다하는 거지.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톱으로 직접 잘랐으니깐, 나도 참 미련했지.”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이제부터는 자른 나무를 오로지 힘으로 옮겨야 했다.

처음에는 지금 나무보다 더 굵은 나무를 이용해 집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한 번 옮겨 보고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무를 거점까지 옮기지도 못하고, 얼마나 용을 썼는지 며칠을 몸살로 앓아누웠다.

경일은 자른 나무에 밧줄을 감았다.

어깨에 밧줄을 걸고 두 손으로 단단히 밧줄을 쥐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처음 당길 때가 가장 힘들지, 나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조금 수월했다.

“이건 뭐, 중세 시대의 노예랑 다를 게 없네.”

온종일 나무를 베고 가지를 다듬고 공터까지 옮기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조금씩 늘어가는 나무를 보면 얼굴에서 웃음이 새어 나았다.

식당을 여는 것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옥탑방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을 얻었다.

대략 열 평 정도로, 혼자서 운영하기 딱 좋은 크기였다.

삼천만 원으로는 목이 좋은 곳의 자리를 얻을 수는 없었다.

경일은 크고 좋은 식당에 대한 기대감이 애초에 없었기에 이곳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가 믿는 건 역시 던전이었다.

던전의 최고급 재료로 사용하면 요리 경험이 없더라도 기본 이상의 맛을 낼 자신이 있었다.

식당의 자리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맛이었다.

처음에는 직접 인테리어를 해서 돈을 아끼려고 했으나, 곧 생각을 접었다.

가겟세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인테리어를 하고 장사를 시작하는 게 나아 보였다.

역시 돈이 좋았다.

던전에서는 직접 해야 할 일이 넘쳐흘렀지만, 여기서는 모든 게 돈으로 해결되었다.

전문가의 솜씨는 달랐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깔끔한 식당으로 변신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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