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동네 사람들
‘뭐, 내가 큰돈을 벌자고 시작한 건 아니었으니까. 빚을 갚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너무 욕심 부리지 말자. 그리고 분식점이 잘돼서 온종일 손님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음식만 만들어 파는 것도 별로인 거 같고. 오늘 수한이도 미용실 아가씨도 새롭게 알았고. 이게 진짜 사람 사는 맛이지.’
경일은 오늘의 매출 2만 원을 가지고 시내로 나갔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떡볶이를 맛봤다.
다음에는 수한이에게 떡볶이가 어묵 국물보다 더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여러 군데의 떡볶이 맛을 보고 집으로 돌아간 경일은 곧장 장롱을 열어 게이트로 들어갔다.
내일 출근 시간까지 던전에서 30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새 던전에서의 삶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부분이 되어 있었다.
던전에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의지였다.
한없이 게을러지려고 하면 끝없이 게을러질 수 있었다.
숲이랑 개울에는 늘 먹을 것이 있었고, 잠은 텐트에서 자면 그만이었다.
또 다르게는 바쁘려면 한없이 바빠질 수도 있었다.
던전은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원시 자연 그 자체였다.
당장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경일이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집이었다.
매일 나무를 베고, 벤 나무를 힘으로 옮기다 보니 그의 몸에 근육이 자리 잡았다.
나무를 끌고 가는 그의 등 근육이 화난 듯 꿈틀거렸다.
이미 적당한 곳에 집터를 마련해 두었다.
시멘트를 부어 땅을 다지고 싶었지만, 굳이 자연을 해치면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뭐, 사실 시멘트를 사고 옥탑방을 지나 던전의 거처까지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고.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바닥에서 살짝 띄워서 집을 짓는 것이었다.
전기가 없는 곳이라 보니 웬만한 일은 전부 직접 해야 했다.
집을 짓는 일의 첫 단계는 기둥을 세우는 것이었다.
일단 기둥이 설 자리의 땅을 파냈다.
파낸 땅에 기둥을 심고 흙과 돌을 덮어 꾹꾹 다졌다.
네 개의 기둥을 세우는 데에만 반나절이 지나갔다.
정말 누군가의 손이 간절했다.
누군가가 약간만 거들어 주면 금방 끝날 일을 혼자 힘들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해 기본 틀을 완성했다.
각자 서 있던 나무가 서로 연결돼 튼튼하게 자리를 잡았다.
단순히 뼈대만 완성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욕심을 부려 큰 집을 지으려 했지만, 만용인 걸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일단 옥탑방보다 조금 크게 지을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혼자 지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집의 뼈대를 완성하자 그 뒤로는 집을 짓는데 속도가 붙었다.
곧게 뻗은 나무를 일일이 반으로 갈라 한쪽 면을 평평하게 잘라 다듬었다.
벽이랑 천장은 나무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 써도 상관없지만, 바닥이 울퉁불퉁하면 아무래도 불편할 거 같았다.
30시간을 꼬박 바닥에 쓸 나무를 손질하는데 보냈다.
경일은 분식점으로 출근하기 위해 옥탑방으로 돌아갔다.
던전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이 달라 처음에는 헷갈릴 때가 많았지만, 점점 적응되어 갔다.
육수에 넣을 민물 새우 가루와 던전 사과즙을 챙겨 분식점으로 출근했다.
시간을 잘못 계산해 조금 늦었지만, 자신이 사장인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오늘은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도 할 겸 떡을 돌릴 예정이었다.
개업 떡은 예정된 시간에 도착했다.
경일은 일회용 접시에 담아 우선 슈퍼부터 갔다.
분식점을 열기 전부터 이용하던 슈퍼라 낯설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경일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슈퍼 사장님인 오선주도 경일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는 뽀글 파마를 한 아줌마였다.
이 동네 아줌마들은 하나같이 뽀글 파마를 했다.
아마 파마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키가 비슷하다면 뒷모습만 보고는 구분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개업 떡입니다. 요 밑에 동네 분식이라고, 새롭게 오픈했습니다.”
“아~ 지나가면서 공사하는 거 봤어요. 젊은 사장님이네. 어머, 이 팔뚝에 근육 좀 봐. 키도 훤칠하니 크고 인물도 좋고. 이 동네 아줌마들 전부 단골 되겠는 걸?”
오선주의 목소리가 간들거렸다.
경일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자, 그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잘 먹을게요, 사장님.”
오선주가 접시를 받아들면서 그녀의 손이 경일의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짓궂은 장난에 경일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아, 네. 그럼 맛있게 드세요”
경일이 급하게 인사를 하고 나오자 뒤에서 오선주의 간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만간 한 번 먹으러 갈게, 잘생긴 총각. 호호호!”
분식점과 가까운 곳의 장삿집은 모두 떡을 돌렸다.
이제 오고 가며 자주 볼 얼굴들인데,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미용실이었다.
오픈 첫날 맛있다고 해 준 손님이라 특별히 다른 곳보다 넉넉히 떡을 담았다.
“어서 오세요.”
미용실 문을 열자마자 이미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경일을 보더니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어머, 분식점 사장님.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경일은 입을 열 새도 없이 미용실의 소파에 앉았다.
이미순은 떡을 챙기고 언니를 불렀다.
“언니, 언니.”
“손님 오셨어?”
안쪽의 방에서 이미순과 닮은 여자가 나왔다.
“아니, 여기는 어제 오픈한 동네 분식 사장님. 오늘 개업 떡을 가지고 오셨어.”
“어머, 안녕하세요. 저는 미자 미용실 사장 이미자예요.”
상대가 이름을 밝히고 인사를 하자 경일도 같이 인사를 했다.
“네. 저는 동네 분식을 오픈한 김경일입니다.”
“안 그래도 미순이가 맛있다고 해서 오늘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사장님~ 커피 드세요.”
이미순이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다 감사하죠. 사장님 어묵 국물은 해장계의 신이에요.”
“어휴~ 저걸 그냥. 나이도 어린 게 벌써 술에 빠져서.”
“언니, 내 나이가 벌써 23이라고. 어리긴 뭐가 어려. 그리고 내가 처음 술을 배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언니야. 언니가 술 취해 집에 온 날, 어른한테 술 배워야 한다면서 나에게 억지로 술 먹인 거 기억 안 나?”
“야, 내가 언제? 너 내가 술에 취하면 필름 끊긴다는 걸 알고 말 지어내고 그러는 거, 진짜 야비한 짓이다.”
“아이 억울해. 그때 사진이라도 하나 찍어 놨어야 하는데. 겨우 술 한 잔에 뻗어 버리는 바람이.”
“억울? 누가 진짜 억울한 건지 모르겠네? 너 오늘 미용실 청소했어? 어휴~ 저 봐. 머리카락이 그대로 있잖아. 언니가 미용실에 머리카락 보이게 하지 말라고 했지. 바닥에 머리카락이 있으면 얼마나 지저분하게 보이는지 몰라?”
“치사해. 자기 불리하면 일 가지고 트집 잡고. 저런 게 언니라고.”
“저런 게? 이게 죽으려고. 내가 너랑 몇 살 차이가 나는데, 네년이 오늘 정녕 단매에 맞아 죽고 싶구나!”
“이 언니는 대체 언제 적 사극을 흉내내는 거야.”
경일은 어색한 자세로 현실 자매의 대화를 지켜봤다.
그때, 미용실에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두 자매는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그럼 전 이만.”
경일은 조용히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조금 이따가 봐요~”
나가는 경일을 향해 이미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분식점으로 돌아가는데 왠지 모를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부럽다. 나도 저런 가족이 있었으면…….’
못 사는 동네라 다들 각박할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은 정이 느껴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경일은 분식점으로 돌아와 빠르게 모든 준비를 끝냈다.
첫 번째 손님은 어제 온 꼬마 손님 수한이었다.
“아저씨, 오늘 또 왔어요. 어제 너무 맛있어서 오늘은 친구도 데리고 왔어요.”
수한이 뒤로 두 명의 개구쟁이들이 보였다.
“수한아, 정말 맛있는 거 맞아? 난 용돈이 적어서 아껴 써야 한단 말이야.”
“진짜 맛있다니까! 내가 어제도 먹고, 오늘 또 온 거 보면 몰라?”
“수한아, 나는 매운 거 잘 못 먹어. 엄마가 김치를 물에 씻어서 준단 말이야.”
“나도 매운 거 잘 못 먹지만, 여기 건 매운데 먹을 수 있어. 음~ 매운데, 매운 건 맞는데 음~ 어쨌든 맛있어.”
수한이는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는지 말하는 도중 고민을 했다.
두 명의 아이는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데, 수한이의 말을 막 무시하지는 못하는 거로 봐서는 수한이가 이들의 대장인 듯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경일에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동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도 힐링 되는 기분이 들었다.
경일은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정말 오래간만에 봤다.
아이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고, 먹고 살기 바빠서 관심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수한이와 그 친구들의 깜찍한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부모가 부러웠다.
“수한이 오늘 또 왔네?”
“네, 아저씨.”
수한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저씨가 들어 보니까, 떡볶이가 매울까 봐 걱정이 되는 거지?”
경일에게 아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럼 아저씨가 조금씩 맛을 보여 줄게. 먹어 보고 맛있으면 사 먹고, 매우면 안 사 먹어도 돼.”
“진짜 그래도 돼요?”
수한의 친구가 물었다.
“그럼 당연히 되지. 그리고 아저씨 떡볶이 정말 맛있거든. 먹고 나면 계속 먹고 싶어질 걸?”
경일은 앞 접시에 떡볶이 하나를 담아 삼등분 해서 놓았다.
젓가락질을 잘하지 못할 거 같아 포크도 잊지 않고 같이 올려 두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수한이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친구들한테 얼른 먹어 보라고 권했다.
자신이 만든 떡볶이를 저렇게나 칭찬을 해 주니 아주 흐뭇했다.
수한이 친구들은 포크로 떡볶이를 찍었다.
얼마나 맛있기에 수한이가 저러는지 궁금해하며 떡볶이를 입에다 넣었다.
떡이 입에 들어가자 양념이 먼저 혀에 닿았다.
매운 향이 입속에 확 번지지만 혀가 아프진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고급스러운 단맛이 확 치고 올라와 매운맛과 어울렸다.
꼬마들의 눈이 커졌다.
경일은 솔직하게 놀라 하는 꼬마들의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특히 어제 떡볶이를 먹어 본 수한이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아저씨! 어제보다 훨씬 맛있는데요? 와~”
수한이가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공부한 보람이 있네.’
어제 분식점을 마치고 여러 군데의 떡볶이를 먹어 보고 자신의 부족한 맛을 채웠다.
기존의 맛에 사과즙을 더 넣어 단맛을 보강했다.
시중의 설탕을 넣은 일차적인 단맛이 아니라 던전 사과의 상큼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단맛은 입에 긴 여운을 남겼다.
먹어 보니 첫날의 떡볶이보다 훨씬 맛있었다.
자신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일부러 단맛을 줄였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역시 떡볶이는 매콤하면서도 달달해야 제맛이었다.
“아저씨 떡볶이 두 개만 주세요!”
“나도요, 나도요!”
“아저씨, 나도 두 개요!”
떡볶이를 먹어 본 아이들이 작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천원을 내밀었다.
경일이 소중하게 아이들의 돈을 받아 돈 통에 넣었다.
“잠깐만.”
경일은 떡볶이를 세 개씩 담아 주었다.
“어~ 아저씨 난 두 개만 시켰는데요?”
수한이가 말했다.
“하나는 아저씨 선물. 원래 가게 오픈하면 손님들한테 사은품도 주고 하거든. 아저씨는 분식이니까 떡볶이를 사은품으로 주는 거야.”
수한이는 사은품이란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용은 대충 알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수한이가 싹싹하게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꼬마들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어서 먹어. 어묵 국물도 같이 먹고.”
경일이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떠서 앞 접시 옆에 두었다.
“수한아! 진짜 맛있는데?”
“거봐~ 내가 맛있다고 했잖아.”
수한이가 한껏 가슴을 펼치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신의 떡볶이를 이렇게나 좋아해 주다니 감동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