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스캐빈저
“캬~ 사장님 라면은 예술입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요? 시원하면서도 얼큰하고, 속도 부대끼지 않고, 소화도 잘되고.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면 세상 근심이 모두 날아가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이길호는 일이 없는 날이면 동네 분식에 와서 꼭 라면과 소주를 시켰다.
그에게는 이 시간이 자신의 삶에서 허락된 유일한 여유였다.
“하하하, 입에 맞으셔 다행입니다.”
“아니에요. 정말 맛있다니까요. 이렇게 자주 먹어도 전혀 질리지 않고 먹을 때마다 맛있어요. 특히 소주 한잔에 라면 국물 한 모금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하하하, 많이 드세요.”
경일은 김치가 빈 것을 보고 얼른 채워 넣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겨우 김치를 가져다준 것뿐인데, 이길호가 과하게 인사를 했다.
“사장님이 우리 수한이를 많이 예뻐해 주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제가 능력이 없어서 맛있는 것도 하나 못 사 줘서 늘 마음이 무거웠는데, 사장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장님도 이 동네에서 장사하실 정도면 사정이 넉넉하지 않을 건데, 정말 감사합니다. 수한이가 요즘 잘 먹고 다녀서 그런지, 혈색도 더 좋아지고 볼살도 포동포동하게 올랐어요. 표정도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져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길호가 깍듯하게 경일에게 인사를 했다.
“이러지 마세요. 제가 뭘 했다고. 너무 과한 인사입니다. 제가 한 거라고는 떡볶이랑 어묵 몇 개 더 챙겨 준 거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수한이에게 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수한이 아버님. 수한이가 제1호 단골입니다. 제 음식을 먹고 제일 처음 맛있다고 말해 줬지요. 그때 얼마나 뿌듯하던지. 그때의 감동이 지금도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가끔 힘들 때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수한이가 친구들까지 많이 데리고 와서 오히려 매상도 많이 늘었습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만 봐도 얼마나 행복한데요. 아이들의 웃음이야말로 저한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힐링입니다. 그러니 겨우 떡볶이 몇 개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장님이야말로 진정한 대인이시군요… 삭막하기만 한 동네였는데, 분식점이 생긴 이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늘었습니다.”
이길호가 잔에 술을 따르려는데 소주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기분 좋게 먹어서 그런지 소주병이 금방 비어 버렸다.
“이거, 너무 맛있어서 금방 다 먹어 버렸네요. 사장님, 어묵탕이랑 소주 한 병만 더 주십시오.”
이길호는 경일과의 대화가 좋았다.
몇 번 오다 보니 얼굴이 익어 많이 편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챙겨 주는 것도 고마웠다.
그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아마 아들이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면 지금도 몰랐을 것이다.
경일은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그에게 소박하지만 맛있는 안주에 정감 있는 분식점은 어느새 그의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소주병 속의 소주가 빠르게 비워졌다.
술기운이 올라오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장님, 제가 말이죠. 헌터입니다, 헌터. 그것도 아주 별 볼 일 없는 10레벨 헌터. 스캐빈저라고 사장님도 잘 아시죠?”
‘스캐빈저…….’
경일은 자신도 모르게 이길호가 말한 단어를 입속에서 되뇌었다.
헌터가 최소한 한 사람의 몫을 하려면 최초의 마의 구간인 10레벨은 넘겨야 했다.
하지만 10레벨까지 빠르게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레벨 업의 방법은 간단했다.
몬스터의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 가장 많은 경험치가 쌓였다.
한 명의 헌터를 키우려면 두어 달은 기존의 헌터가 붙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만 했다.
몬스터를 사냥해 목숨 줄만 붙여 초보 헌터에게 넘겼다.
이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몬스터의 목을 한 번에 끊는 게 쉽지, 목숨 줄만 붙어 있게 작업하는 건 몇 배의 힘과 노력이 들어갔다.
초보 헌터를 육성하는 동안은 자신의 레벨 업도 포기해야 했다.
그러니 길드 입장에서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길드가 수용할 수 있는 초보 헌터의 수는 정해져 있었다.
길드에 못 들어간 초보 헌터들은 자신의 돈으로 기존의 헌터를 고용하거나, 초보 헌터들끼리 모여 최하급 던전에서 목숨을 걸고 레벨 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각성을 하고도 헌터의 삶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자신이 가진 잠재력이 얼마인지 확인도 못 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억울한 측면이 많았다.
이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직업 중의 하나가 헌터였다.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직업이 헌터였고, 사회에서 가장 대접받는 직업도 헌터였다.
일단 각성하면 무조건 레벨 업을 위해 도전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레벨 업의 잠재력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가장 비참한 헌터들이 생겨났다.
바로 처음의 마의 구간인 10레벨에 멈춘 헌터들이었다.
이들도 10레벨까지 신체를 강화한 초인이긴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나마 이들이 활동 가능한 최하급 G급 던전이 충분히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헌터 협회로서는 성장이 멈춘 이들에게 기회를 줄 이유가 없었다.
G급 던전이 열리면 대부분 길드에 배정되어 길드에 속한 초보 헌터들의 성장에 쓰였다.
그럼, 여기서 성장이 멈춘 10레벨 헌터들은 무엇을 하느냐.
그들은 던전의 여러 부산물을 줍는 일을 했다.
던전의 핵을 깨고 나면 게이트 대부분은 여섯 시간 뒤에 사라졌다.
공략대가 이미 한 번 쓸고 간 던전을 샅샅이 뒤져 돈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나왔다.
사람들은 이들을 천시하는 의미로 청소부 동물이라는 뜻이 붙은 스캐빈저라고 불렀다.
던전에서 발견된 처음 보는 자원에서 이능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가끔 나오곤 했다.
새로운 자원을 발견한 스캐빈져는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것이 스캐빈저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게이트가 열린 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대부분 던전 자원의 이능이 밝혀진 상태였다.
지금의 스캐빈저들은 그저 가족을 위해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 뿐이었다.
그들은 오늘도 던전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스캐빈저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났고, 그들 간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더군다나 돈이 되는 것은 던전의 공략대가 대부분 쓸어 가기 때문에 공치는 날도 많았다.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라도 전 남들보다 좀 더 빠르게 각성을 했죠. 그때는 정말 좋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에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았습니다. 전 사람들의 기대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덕분에 좋은 길드에 스카우트돼서 들어가고, 연예인 병 걸린 연예인처럼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지요. 크으~”
이길호는 소주잔에 담긴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의 눈이 추억으로 아련해졌다.
“이 동네 사람치고 어디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없겠지마는, 인생이란 게 참 롤러코스터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내 앞날은 속된 말로 장밋빛 인생, 그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불과 세 달을 넘지 못하더군요. 망할 레벨이 10레벨에서 오르지가 않았습니다. 길드가 남들보다 더 많은 지원을 해 줬는데, 이놈의 레벨이 꿈쩍을 안 하는 겁니다. 죽어라고 몬스터를 사냥했지만, 무슨 태산처럼 전혀 움직이지가 않았습니다.”
이길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의 고통이 전해져 왔다.
지금은 소주 한잔에 털어놓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마음으로 느껴졌다.
경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조금이라도 귀담아듣고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거 참, 세상의 눈이란 것이 무섭더군요. 좋은 길드에 들어갈 때만 해도 앞에서는 그렇게 칭찬하고, 평생 같이 갈 거처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등을 돌려 버리더군요. 뭐, 세상인심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는 저도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이 앞장서서 내 욕을 하고 다니더군요.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는 참 많이 절망했습니다. 나란 존재가 싫었고,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사람들이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운명이란 것이 희한한 게,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떠났는데 딱 한사람이 나를 위로해 줬습니다. 그것도 전혀 생각지 못한 한 사람이. 평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끝까지 나를 위로해 주더군요.”
경일이 조용히 그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 주었다.
“그 사람이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지금도 아내와의 첫 키스를 한 날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저한테는 너무나 과분한 여자였거든요. 그 순간, 이 모든 불행은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만큼 행복했습니다. 헌터에 대한 미련도 깨끗하게 접었습니다. 전 젊었고, 굳이 헌터를 안 해도 세상에 먹고 살 방법은 많았으니까요. 그러다 저의 보물 수한이까지 태어나고, 인생에 부러울 게 하나 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참… 이거 뭐라고 말을 못 하겠군요. 큰 시련을 한 번 겪었으니 앞으로 행복하게 살날만 남았다고 생각한 인생이 한순간에 저를 배신하더군요.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던 아내가 어느 날 던전병으로 쓰러졌습니다. 불행은 교통사고와 똑같더군요. 한순간이었습니다. 손 쓸 수도 없이 한순간에 행복을 빼앗아 가 버리더군요. 그래서 죽어도 쳐다보지 않으려 했던 던전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스캐빈저가 됐죠.”
이길호가 아무리 스캐빈저라고 해도 일반인들의 수입보다는 나았다.
그런 그가 식비를 아끼는 건 아내 때문이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인간에게 끼친 가장 큰 부작용이 바로 던전병이었다.
던전의 대기가 게이트를 통해 지구에 유입되었고, 일부 사람들이 던전병에 걸렸다.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정부의 사회 보장 제도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라 던전병의 모든 치료비는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던전으로 인해 부를 누리는 사람이 있으면 던전으로 어려워진 사람들을 돕는 것이 당연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길호는 한 푼이라도 아껴 아내와 아들을 위해 썼다.
경일은 이미 이길호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동네 아줌마들 못지않게 수다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친해진 이후 미주알고주알 경일에게 모든 이야기를 쏟아 냈다.
경일은 식은 어묵탕을 따로 데우며 던전 민물 새우 가루를 조금 더 섞었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었다.
“이번에 닥친 불행이 무겁고 아프긴 하지만, 나의 마음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절망에 가까운 경험을 겪어서 마음이 단단해진 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아직 나에게는 보석 같은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저보다 더욱 힘들 겁니다. 아내가 앓고 있는 던전병은 두 달에 한 번 발짝이 오는데, 그 고통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지독하거든요.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질 고통을 아내는 저와 수한이를 위해 이겨 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사실 어제 던전에서 아내의 고통을 줄여 줄 던전 식물을 캤거든요.”
이길호는 시원한 어묵 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