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김만복
“역시~ 이 집은 국물이 예술입니다. 라면 국물도 그렇고, 어묵 국물도 그렇고. 맛도 맛이지만, 국물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해서 오늘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좀 많이 했네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수한이 아버님.”
경일은 뭔가 위로의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없어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이거, 오늘 너무 잘 먹었습니다. 우리 아들 잘 챙겨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가 비록 스캐빈저라고 불리는 레벨 10짜리 헌터이지만, 제 능력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돕겠습니다. 그럼, 사장님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이길호는 꾸벅 인사를 하고 분식점을 나갔다.
‘힘내세요, 수한이 아버님. 인생이란 게 롤러코스터라 하셨으니, 언젠가는 다시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경일은 무거워 보이는 그의 발걸음을 보며 속으로 위로를 건넸다.
테이블을 치우고, 그릇을 설거지하고,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중에도 이길호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짧은 시간의 대화였지만, 그 속의 이야기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한 남자의 묵직한 인생 이야기가 경일의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겼다.
* * *
누군가가 자신이 한 일을 알아준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길호의 인사뿐만 아니라 분식점에 자주 오는 아이들의 부모님은 한 번씩 경일에게 감사의 마음을 건네 왔다.
못 사는 동네다 보니 아이들을 따로 학원에 보낼 여유가 없는 집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끼리 서로 어울려 놀았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서로 봐주며 공동육아를 하는 것처럼 돌봤다.
못 사는 동네라 삭막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정이 넘치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도 기분 좋게 장사를 하고 있는데 전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김만복이었다.
그는 지금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다.
이틀 전.
김 주임과 연락이 끊어진 후, 김만복은 직접 그를 찾아 나섰다.
구청에 여러 번 찾아가 봤지만, 갈 때마다 그는 부재중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나를 피하는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이 김만복은 구청 앞에서 그의 퇴근을 기다렸다.
구청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초조하게 서 있는 그를 힐긋 쳐다보며 지나갔다.
“이게 무슨 꼴이야.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길바닥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냐고. 그냥 가 버려?”
김만복은 자존심이 상해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발은 강력 접착제라도 붙은 듯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자 구청의 공무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김만복은 퇴근하는 공무원들을 일일이 확인했지만, 김 주임은 없었다.
“뭐야? 퇴근 시간인데, 왜 안 보여? 공무원 하면 칼퇴근이잖아, 칼퇴근. 그런데 왜 안 나오는 거야?”
김만복은 이미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구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도 아프고, 배는 고파 오고, 온갖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거 오늘 출근 안 한 거 아냐?”
한참이 지나도 김 주임이 나오지 않자 속이 시커멓게 탔다.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익숙한 체형의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김만복이 그렇게나 만나고 싶어 하던 김 주임이었다.
김 주임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 그의 앞을 막았다.
“김 주임,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아니, 이유도 말 안 해 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사람 속 터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김만복이 화를 벌컥 냈다.
그는 김 주임에게 화를 낼 처지가 아니었다.
이 둘의 관계에서 아쉬운 건 자신이었으니.
그런데도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낸 건 자신이 김 주임을 만나려고 한 고생이 생각나서였다.
“아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냅니까? 미쳤습니까? 사람 뒤통수를 친 것도 모자라 이게 뭐 하는 겁니까?”
김만복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김 주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벌게진 김 주임의 얼굴을 보자 김만복은 아차 싶었다.
“아니, 내가 화를 낸 게 아니고. 하하하, 길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일단 커피숍으로 가서 시원한 거라도 한잔합시다.”
김만복이 비굴하게 웃으며 김 주임의 팔을 잡아끌었다.
김만복이 먼저 숙이는 모습에 김 주임은 못 이기는 척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김 주임, 내가 장사도 못 하고 며칠을 찾아다닌 줄 알아요. 이거 무슨 오해가 있었나 본데,
그렇다면 말을 해 줘야 내가 사과를 하든지 할 거 아닙니까?”
김만복이 자신보다 어린 사람한테, 그것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김 주임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건 그에겐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김 주임은 김만복의 숨겨진 무기였다.
동네 분식 자리에서 전에 장사하던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데엔 김 주임의 힘이 아주 컸다.
김만복에게 김 주임은 대체 불가한 존재였지만, 김 주임에게 김만복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김만복과 같은 이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다.
“김 주임이 좋아하는 게 달달한 캐러멜 마키아토였지? 잠시만 기다려, 내가 얼른 가지고 올게.”
김만복은 김 주임을 앉혀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나이에 커피 심부름이나 하다니. 아무리 지가 화가 났어도 내가 커피를 가져오겠다고 했으면 사양하며 자기가 곧바로 일어나야 하는 거 아냐? 공무원이라는 놈이 저리 싸가지가 없으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
김만복은 커피를 가지러 가면서 끊임없이 구시렁거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캐러멜 마키아토 하나씩 해서 저 자리로 가져와.”
김만복이 카드를 내밀고 아르바이트생에게 거만한 투로 말했다.
“손님, 여긴 셀프서비스입니다.”
명령조로 말하는 김만복에게 짜증이 났지만, 아르바이트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커피 값은 더럽게 비싸게 받으면서 이런 기본적인 서비스도 안 해 주는 거야?”
김만복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손님, 저희 집 커피가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나가셔도 됩니다.”
“어휴~ 내가 참는다, 참아. 얼른 커피나 줘.”
성질대로라면 침을 한 번 뱉어 주고 나가고 싶었으나, 김 주임이 있으니 그럴 수는 없었다.
“손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며 웃으며 커피를 내밀었다.
“내가 다시는 이 집에 오나 봐라. 이따위로 장사해서 앞으로 자~알 되겠다.”
김만복은 끝까지 악담을 퍼부으며 커피를 가져갔다.
애꿎은 아르바이트생에게 화풀이한 그는 김 주임 앞에서는 나긋한 웃음을 띠며 이야기했다.
“김 주임. 일단 이거 시원하게 한잔해요.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거 마시고 이야기 좀 해 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내가 김 주임에게 실수할 리가 없잖아.”
김만복은 김 주임을 살살 달랬다.
대화하기 싫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있던 김 주임이 입을 열었다.
“아니, 김 사장님. 일을 부탁하려면 확실히 알아봐야 할 거 아닙니까? 김 사장님 때문에 내가 어떤 모욕을 받았는지 압니까? 그 어린놈한테 90도로 머리를 숙이고 빌었다고요. 그 일만 생각하면 내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는데, 사장님 때문에 머리카락이 얼마나 빠진 지 압니까? 여기 스트레스성 땜빵이 생겼다고요.”
김 주임은 김만복에게 머릴 숙여 보여 주었다.
‘씨발, 무슨 땜빵이야. 머리털도 얼마 없는 놈이.’
김만복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니, 김 주임.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줘야 내가 알아듣지요. 그렇게 단편적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얘기해 봐요.”
“김 사장님, 동네 분식에 꼬투리 잡을 게 많다고 분명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놈은 생초보라니까. 장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놈이야. 단순하게 음식 만들어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놈이라고.”
김만복은 김 주임이 따지는 듯한 말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아니, 누가 장사 초보가 아니랍니까? 장사 초보 맞아요, 맞아.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분식점 안을 제대로 보긴 했습니까?”
김만복의 말에 지지 않고 김 주임이 더 크게 말하며 따졌다.
“분식점 안?”
김만복은 생각도 못 한 김 주임의 말에 당황했다.
“네, 분식점 안 말입니다. 아니, 무슨 분식점에 먼지 한 톨 없는 곳은 처음 봤습니다. 괜히 사장님 말만 믿고 갔다가 얼마나 망신당한지 압니까? 그리고 분명 멍청한 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멍청하지, 그것도 아주 멍청한 놈이지. 오픈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의욕이 꺾여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놈이야. 김 주임도 봤잖아. 입구 매대 반이 놀고 있는 거. 노력도 안 하고 그저 매대 뒤에 앉아서 멍한 눈으로 하루를 보내는 게 다인 놈이야. 그저 얘들 코 묻은 돈이나 노리는 그런 하찮은 놈이라니까.”
“하~ 김 사장님. 또 교묘한 말로 사람을 속이네요.”
“아니, 내가 무슨 교묘한 말로 김 주임을 속여?”
김만복은 김 주임에 말에 놀라 펄쩍 뛰었다.
“그놈이 장사 초보인 건 맞아요. 하지도 않을 튀김 설비로 매대의 반이 놀고 있는 것도 맞고요. 근데 그놈이 멍청하다니요? 눈빛이 아주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던데, 뭐가 멍청합니까? 그놈 눈빛이 무슨 사자 눈빛입니다. 그런 놈을 보고 멍청하다니요. 김 사장님, 내가 바보로 보입니까?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아니라니까. 내가 김 주임한테 왜 엿을 먹여요. 내가 지금까지 김 주임 도움받은 게 얼만데. 절대 그런 오해는 하지도 말아. 내가 만약 김 주임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면 이렇게 다시 찾아왔겠어?”
“그건 모르죠. 사람 마음 풀어놓고 다음에 또 한 번 뒤통수치려고 수작을 하는 건지.”
“아니, 김 주임.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김만복은 절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억울해했다.
‘흥~ 내가 당신이 얼마나 음흉한 사람인지 아는데,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지금까지 남의 가게에 누명이나 씌우던 사람이 자신은 결백하다고 믿어 달라니. 그게 말이나 돼?’
김 주임은 김만복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인상 하나 바꾸지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아니, 문제 있는 식자재가 많았을 거잖아. 설마 김 주임, 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 안 한 건 아냐? 내가 그놈한테 재료비 아끼는 방법을 가르쳐 준 적도 있거든. 장사도 안 되는 놈이니 분명 오래된 식자재들이 많았을 거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어허, 헛소리라니. 내가 김 주임보다 훨씬 나이도 많은데, 그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김만복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르며 최대한 점잖게 말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냉장고에 있는 걸 전부 빼서 확인했습니다. 딸랑 떡볶이랑 어묵탕밖에 없는 집이라 일반 가정집보다 식자재가 더 없더군요. 모든 식자재가 유통기한이 넉넉하게 남아서 다른 거라도 꼬투리 잡으려고 봉투에 적인 상품 상세 설명까지 하나하나 다 읽었습니다. 채소는 아침에 딴 것처럼 싱싱하고, 상온에 보관 중인 건 라면밖에 없고,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십니까? 오죽했으면 내가 흰 장갑을 끼고 가게 먼지를 체크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그놈이 구청에 가서 따진다는 거 겨우겨우 달랬습니다. 그 와중에 내가 그 어린놈한테 몇 번이나 머리 숙인지 압니까? 김 사장님이 나 엿 먹이려고 보낸 거 아니라고 한 번 말해 보세요. 미리 알지 않고서는 어떻게 식당에 먼지 하나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김 주임이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