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던전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그는 자신이 불리할 만한 이야기는 모두 뺐다.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무례하게 행동한 것이나, 멀쩡한 식자재를 바닥에 늘어놓고 냉장고에 넣지도 못하게 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 경일이 폭발한 이유는 자신의 무례한 행동 때문일 수도 있는데, 그런 건 그의 안중에 없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자기중심적인 건 둘 다 똑같은 인간이었다.
김 주임은 오로지 자신이 머리를 숙인 게 화가 났고, 이 모든 건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김만복 탓이었다.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커피숍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하지만 김만복이나, 김 주임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아니, 애초에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은 저 진상들이 빨리 나가 주기만을 바랐다.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저 멍하게 앉아 시간만 흘려보내는 놈이라고. 내가 자신을 놀리는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웃고만 있던 놈인데… 그런 놈이 김 주임을 위협했다고? 더군다나 위생 점검에 걸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이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금 잘못을 나에게 덮어씌우는 겁니까?”
김 주임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김만복을 노려보았다.
김만복은 김 주임이 저렇게 흥분하는 것을 보아하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결국, 이 일은 자신이 제대로 확인도 안 한 탓이 됐다.
그날 김만복은 김 주임을 제대로 접대해야 했다.
비싼 양주에 여자까지 붙여 주었고, 용돈까지 두둑하게 챙겨 줘야 했다.
생각지도 않은 돈이 나갔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이걸 모두 경일의 탓으로 돌렸다.
어느새 경일은 그의 원수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얼마가 깨진 거야? 건방진 놈에게 작은 교훈 한 번 내려 주려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김 주임, 이 새끼는 거지새끼도 아니고, 기회 한 번 잡았다고 그 비싼 술을 물처럼 처마시다니. 그놈 비위 맞춘다고 그 비싼 술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아이고, 아까워라.”
김 주임과 술을 마신 다음 날, 곧바로 동네 분식에 가서 김 주임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술병이 나서 꼬박 하루를 앓아누웠다.
김만복은 움직일 만큼 회복되자 곧바로 동네 분식을 찾아갔다.
‘저놈의 새끼가 어리바리한 놈이 아니라 제법 성깔도 있다는 거지? 꼴에 완전 멍청한 놈은 아니란 건데. 제기랄, 그러고 보니 은근히 재수가 없는 놈이라니까. 뺀질뺀질한 게 말도 더럽게 안 들어 처먹게 생겼네.’
한 번 꼴 보기 싫어지자 경일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김만복은 속마음과 다르게 웃으며 경일에게 다가왔다.
“어이, 김 사장. 여전히 장사가 잘되는가 보네.”
김만복은 손님이 라면을 먹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얼굴은 분명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한 번씩 경일을 쳐다보는 눈에서 언뜻언뜻 분노가 일었다.
“거봐, 내가 전문점처럼 나가는 게 괜찮다고 했지? 이런 못사는 동네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가려면 한 가지라도 제대로 된 걸 파는 게 낫지. 음식 재고도 줄일 수 있고 말이야. 난 괜히 이거 저거 메뉴만 많이 해서 앞에서 벌고 뒤에서 밑진다니까. 낭비되는 음식 재료가 장난이 아니야. 나도 김 사장처럼 메뉴를 확 줄여 볼까 싶기도 해.”
경일은 늘 김만복의 말에 등장하는 못사는 동네란 단어가 듣기 싫었다.
이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면서 동네를 무시하는 태도가 영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사장님 분식점은 장사가 잘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애로점이 있었네요.”
경일은 생각을 숨기고 적당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나, 표정 연기는 경일이 훨씬 위였다.
적당히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 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야…….”
김만복이 매대에 바짝 붙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며칠 전에 구청에서 식당 위생 점검 나오지 않았나?”
김만복은 김 주임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그건 김 주임의 일방적인 이야기일 뿐이었다.
김 주임이 김만복을 믿지 못하고 그를 의심했듯이 김만복도 김 주임을 믿지 못했다.
어차피 필요에 의해 뭉쳐진 사이라 둘 사이에 믿음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면 경일의 이야기도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걸 사장님이 어떻게 아시죠? 신고를 받고 왔다고 하던데, 혹시 사장님이 신고를…….”
경일이 일부러 김만복을 떠보았다.
“에잇, 이 사람아.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이 식당을 하는 사람끼리 그게 무슨 망발인가? 우리 식당에도 마침 위생 점검이 나와서 한 이야기인데,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김만복이 생각 이상으로 펄쩍 뛰었다.
경일의 눈에는 꼭 그 모습이 제 발 저린 도둑 같았다.
한 번 더 약을 올릴까 하다가 참았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밟을 것이 아니면 쓸데없이 상대의 화를 돋워 괜한 경계심을 높여서 좋을 게 없었다.
“사장님 분식점도 위생 점검이 나왔구나. 그런 줄 몰랐죠.”
“흠, 흠.”
김만복은 가볍게 쥔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김 사장은 처음 위생 점검을 받았을 텐데, 어땠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공무원이 제일 피곤한 존재거든.”
오늘 김만복이 경일에게 온 이유가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뭐, 별거 없던데요. 제가 공무원 눈치 볼 이유가 없잖아요. 여기서 돈 버는 것도 아니고, 여차하면 문 닫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리고 겨우 메뉴가 세 개인데, 걸리려도 걸릴 게 없죠. 라면은 요 앞 슈퍼에서 사 와서 끓이기만 하면 되는 거고. 떡볶이나 어묵도 팔리는 양이 적으니 많이 사다 놓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둘 다 들어가는 재료가 워낙 간단하잖아요. 냉장고를 괜히 큰 걸 사서 지금 후회 중이에요. 괜히 전기세만 나가는 거 같아서. 뭐 어쨌든, 텅텅 빈 냉장고를 무슨 수로 단속하겠어요. 그 공무원, 아마 속으로 당황 좀 했을걸요. 가게야 인테리어 한 지 얼마 안 돼서 특별히 신경 안 써도 깨끗하잖아요. 뭐, 손님이 거의 없으니 더러워질 일도 없고. 그러니 공무원 할아버지가 오든 말든 신경 쓸 이유가 없죠.”
“역시 전문점을 하니까 이런 좋은 점도 있군 그래. 바쁜 거 같으니,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네.”
김만복은 웃는 얼굴로 돌아섰다.
하지만 경일을 등지는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이건 모두 내 실수야! 내가 너무 생각 없이 김 주임을 보냈어. 다른 방법으로 교훈을 줘야 하는데, 저놈이 워낙 장사 초보라 너무 쉽게 생각했어. 그런데 왜 갈수록 저놈을 보면 기분이 나쁘지? 하는 짓은 여전히 멍청해 보이는데, 은근히 기분 나쁜 느낌이 든단 말이지.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김 주임의 말이 맞았네. 저 새끼가 똑똑해서 일부러 김 주임을 엿 먹인 건 아닌 거 같고. 여하튼 저놈 때문에 피 같은 내 돈만 날렸네. 이대로 넘어가려니 짜증이 나서 미치겠어, 아주. 그렇다고 기분 풀자고 다른 방법을 쓰자니 그것도 또 돈 들어갈 테고. 저 새끼를 어떻게 하지? 아예 크게 한 방 먹여 망하게 만들어서 쫓아내 버릴까? 아니야, 아까 저놈 말하는 거 들었잖아. 지금 가게 닫아도 아쉬울 거 하나도 없다고. 괜히 힘들게 작업해서 분식점 문 닫게 했는데, 저 새끼가 전혀 억울해하지 않으면 내 속만 더 뒤집히는 거잖아. 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디서 저런 초보가 장사한다고 나타나서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
김만복은 씩씩거리며 자신의 분식점으로 돌아갔다.
이날따라 평소보다 장사가 안 돼 그는 더욱 짜증이 났다.
* * *
경일은 던전에 있었다.
지금의 생활은 힐링, 그 자체였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가끔은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겁이 나곤 했다.
행복에 젖어 있는데 문득 자신의 인생을 한순간에 지옥에 처박아 버린 놈이 생각났다.
‘그 새끼는 나에게 사기 친 돈으로 잘살고 있겠지.’
경일은 고아가 된 이후로 줄곧 치열하게 살아왔다.
죽을 고생을 하며 겨우 살 만해졌는데 믿었던 사람에게 전 재산을 사기당했다.
더군다나 경일의 명의로 온갖 곳에서 대출까지 당겨 사라지는 바람에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돈을 갚아야 했다.
그 억울함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매일매일 돈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에 시달렸고, 깡패가 직접 자신을 찾아와 협박할 때도 많았다.
‘하~ 그때 진짜 힘들었지. 매일같이 깡패 새끼들이 찾아오고. 그러고 보니 맞기도 많이 맞았구나.’
그때는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죽으면 이 모든 고통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때부터 경일은 이를 악물고 죽어라 일을 했다.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그에게 정상적인 일자리가 생길 리 없었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인데, 빚까지 지고 있는 그를 채용해 주는 곳은 없었다.
경일이 지금껏 빚을 갚기 위해 한 일은 누구나 꺼리는 더럽고 힘든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 죽을힘을 다해 일만 했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자지도 못하고 한 푼이라도 아껴 빚을 갚았다.
빚을 거의 다 갚아 갈 때쯤, 게이트가 나타났다.
던전은 그에게 천국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스트레스를 받을 일 자체가 없었다.
던전에서 자란 것은 모두 맛있었고,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다.
경일은 집을 짓고 아궁이를 만든 이후로 던전에서는 휴식만 취했다.
그는 마음먹고 멍을 때렸다.
힘든 삶에 치여 지친 뇌를 쉬게 하고 싶었다.
책도 보고 가끔은 요리를 연습했다.
그가 가장 많이 한 것은 잠을 자는 거였다.
경일은 오랜 기간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돈을 벌려면 잠을 줄여야 했다.
하루에 많이 자면 다섯 시간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잠을 자도 몸은 늘 피곤했다.
만성 피로에 허덕이던 경일은 늘 잠에 대한 간절한 욕구가 있었다.
현실과 시간의 흐름이 다른 던전은 잠을 자기 최적의 환경이었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도 지구에서는 겨우 서너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장사도 순조로웠다.
음식에 들어가는 식자재 중 일부를 던전에서 공수했고, 가겟세도 워낙 싸서 유지비가 크게 들지 않았다.
‘걱정 없는 삶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
가끔 똥파리(김만복)가 한 번씩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만, 파리란 게 대충 손만 휘저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던전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분식점을 개업한 지 2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여전히 분식점은 오픈 때의 모습과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손님이 좀 늘기는 했지만, 늘 한가했다.
오늘도 꼬마 손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라면을 먹으러 오는 단골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어느새 동네의 어둠이 깔리고 분식점을 닫을 시간인 여덟 시가 다가왔다.
아무 생각 없이 분식점을 정리하던 중 경일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던전과의 유대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던전에서 당신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순간, 던전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날 수도 있습니다. 던전과의 유대를 강화하세요.]
떡볶이를 만들었던 사각 스텐 팬을 설거지 중이던 경일은 석상처럼 그대로 굳어졌다.
싱크대의 수전에서 계속해서 물이 흘렀지만, 경일은 시간이 멈춘 듯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매우 놀라 한없이 커진 눈은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몸은 석상처럼 굳은 반면,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