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일단 움직이자
‘…뭐, 뭐, 뭐지? 유대? 무…슨 유대? 존재감? 던전이 사라진다고? 나, 나의 영혼 같, 같은 던…전이 사라진다고?’
경일은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넘어지려는 순간, 급하게 싱크대를 잡고 버텼다.
“새 주인?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던전의 주인은 나, 바로 나, 김경일이라고.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경일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싱크대를 잡은 손의 떨림이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한참을 정지하듯 서 있던 경일은 겨우 물을 잠그고 의자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유체 이탈을 한 듯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것이 마치 시체 같았다.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축 늘어진 채로 그렇게 한참을 넋을 잃고 있었다.
지금 삶의 원천은 던전이었다.
던전이 있기에 이렇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던전은 손과 발처럼 그냥 그의 몸의 일부분인 거처럼 자연스러웠다.
던전이 사라질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게이트니, 던전이니 하는 단어는 뉴스만 틀면 나오는 아주 흔한 단어였다.
던전은 계속해서 생겨났지만, 지금까지 저절로 사라졌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던전이 사라진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던전 핵을 깨뜨리지도 않았는데도 사라질 수가 있다는 거야?”
헌터가 던전의 핵을 깨뜨려 폐쇄하지 않는 이상, 던전은 계속해서 존재했다.
그건 이 시대의 상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일은 한 번 열린 던전이 사라질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던전의 핵을 깨뜨릴 일이 없는데, 도대체 왜 사라진단 말인가?
가만 생각해 보니 장롱 안에서 게이트가 생겼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게이트를 통해 들어간 던전은 너무나 평온했고, 아름다웠다.
마치 신이 산다는 천상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자신이 지금까지 들었던 던전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 이건 내가 알고 있는 보통의 던전이 아냐?’
경일은 자신이 너무나 안일에 젖어 시간을 보낸 것을 인정했다.
분명 기존의 던전과 다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기존의 던전과 같은 잣대로 판단했다.
그는 꼼꼼히 메시지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복기했다.
‘분명 나와 던전의 유대가 약해지고 있다고 했어. 그 이유가 나의 존재감과 관련이 있고. 나타난 메시지로만 판단하면 나의 존재감을 높이면 던전과의 유대가 다시 깊어진다는 뜻이야. 그럼, 존재감을 높이는 방법은 뭐지? 지금까지 내가 놓치고 있던 게 뭘까?’
경일은 혼잡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되돌아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게이트를 발견하고 혼비백산해 달아났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 그땐 정말 놀랐지. 아주 하늘이 무너져 내린 줄 알았다니까. 풋.’
최고의 보물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던 자신이 생각나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때, 까딱 잘못 생각했으면 천고의 보물을 그대로 남 줄 뻔했어. 게이트에 들어간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야.’
경일은 게이트를 처음 발견한 순간부터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두려움을 이겨 내고 던전을 탐험한 일.
어느 순간부터 던전이 전혀 무섭지 않고 친숙하게 다가온 일.
던전 사과를 처음 발견하고 먹은 일 등등.
‘던전 사과를 처음 먹었을 때는 정말 맛있었고 기뻤어. 마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지. 이 던전 안에 또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자다가도 깨어날 정도였으니. 처음 개울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었을 때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매일 라면만 먹고 살던 때라 더 맛있었지.’
생각은 자연히 시장으로 던전 사과를 팔러 갔을 때로 이어졌다.
‘던전 사과를 처음 팔아 50만 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을 때는 미칠 거 같이 기뻤지. 돈이라는 게 이렇게도 쉽게 벌 수도 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허무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그때는 하루하루가 신이 났다.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았던 터라 행복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린 일도 있었지만, 슬기롭게 빠져나왔다.
‘거점에 집을 지을 때는 정말 열심히 일했지. 덕분에 꿈에 그리던 집도 가지고. 직접 만든 황토 벽돌로 만든 멋들어진 아궁이까지. 분식점을 처음 개업했을 때는 또 얼마나 기뻤어. 음식의 맛에 도움될 만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 실행하고. 던전 고춧가루를 넣은 떡볶이 정말 맛있었지. 내가 만든 맛에 내가 반해 버렸잖아.’
던전 민물 새우를 잡아 말려 가루를 내어 천연 조미료를 만들고, 파를 심고 키우고, 자신이 한 일이 필름처럼 순차적으로 지나갔다.
한 번은 이틀 동안 한 방향으로 꾸준히 걸어가며 던전을 탐험한 적도 있었다.
‘하~ 그러고 보니 던전에서 많은 일을 했구나. 그리고 또 뭘 했지? 그래 휴식. 며칠간 휴식을 취하기로 했지. 휴식을 취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뭘 했더라?’
생각이 이어지지가 않았다.
갑자기 생각이 단절된 기분이 들었다.
다음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려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난 쉬었고, 또 쉬었고 잠을 잤지. 아주 편안한 잠을 매일 즐겼지. 설마?’
경일의 머리에서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내가 던전에서의 활동이 없어서 그런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쉬기만 했네.’
던전을 발견했을 때는 열심히 던전에서 활동을 했지만, 집과 아궁이를 지은 뒤로 휴가에 들어갔다.
말이 휴가였지, 그냥 모든 걸 손 놓고 안일과 나태의 생활을 했다.
휴가를 계획하던 날짜가 지나도 경일은 여전히 쉬었다.
기껏 활동이라고 해 봐야 고추를 따서 햇빛에 말려 고추가루를 만든 것이랑 민물 새우를 잡고 새우가루를 만든 것뿐이었다.
한번 흐트러진 생활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단출한 메뉴뿐이지만 분식점은 잘 돌아가고 있었고, 장사의 소소한 재미도 느꼈다.
지금의 생활에 아무런 불만이 없던 터라 새로운 노력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설마, 내가 던전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아서 이런 메시지가 온 건가? 맞구나. 내 생활이 달라진 거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그럼 던전에서 내 손이 탄 곳이 늘어날수록 나의 존재감이 강해진다는 뜻이구나. 그럼, 존재감이라는 것이 내가 던전에서 행한 생산적인 활동을 의미한다는 것이겠지? 내가 메시지 내용에 너무 강한 충격을 받아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그렇지, 실제로는 조금만 생각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었어. 그럼 나는 지금부터 뭘 해야 할까? 그래, 던전에서 활동을 하면 돼. 그럼 던전과 나의 유대감은 더욱 강해질 거야. 그런데 혹…시 이게 답…이 아니면 어떡하지?’
순간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숨 막히는 불안과 근심이 온몸을 감쌌다.
‘만약, 이게 답이 아니라면 난 던전을 잃고 말 거야.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도 몰라. 틀린 답을 정답이라 믿으며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면 어떡하지? 나에게 남은 기회는 단 한 번일 수도 있는데,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할수록 몸에서 삐질삐질 땀이 나고, 손이 붉게 변했다.
가슴이 꽉 막혀 숨 쉬는 것이 불편해졌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경일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던전이 걸린 문제였다.
던전을 만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던전은 또 하나의 영혼이었다.
영혼을 잃고 껍질만 남은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불안함에 생각이 길어졌다.
“사장님, 퇴근 안 하세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생각에 빠진 경일을 일깨웠다.
이미순이었다.
“어… 어, 네. 해야죠. 퇴근.”
경일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하하하, 사장님도 혀가 꼬이는 거 보니 한잔했구나. 나도 친구들이랑 한잔하고 집에 가는 중인데. 아~ 지금 들어가면 언니한테 맞아 죽겠지? 사장님도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세요. 그럼 내일 뵈요.”
이미순이 혀 꼬인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이런, 몇 시지?”
시계는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1분 1초가 아쉬운 지금,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세 시간이나 보내다니. 그냥 멍청하게 앉아서 던전을 포기하고 있는 거잖아. 미쳤구나, 미쳤어. 정신 차려야 해. 두렵다고 현실을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어.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해봐야 해. 메시지가 정답을 가르쳐 주지 않는 이상, 내가 정답을 알아낼 수 있는 문제가 아냐. 일단 움직이자. 뭐든지 하면서 생각하자. 지금은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부터 해보자.’
배부른 베짱이처럼 지내던 경일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분식점의 문을 닫고 경일은 집으로 빠르게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쉬지 않았다.
“헉, 헉, 헉, 헉.”
계단을 뛰어오르자 폐가 터져 나갈 듯했다.
옥탑방으로 뛰어든 그는 곧바로 장롱을 열었다.
평소 신경을 쓰지 않아 몰랐지만, 오늘 보니 게이트의 색깔이 많이 엷어져 있었다.
이미 던전은 메시지를 보내기 전부터 자신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경일은 자신을 책망했다.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태어나게 해 준 너무나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타성에 젖어 살았다.
던전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행동했다.
소중한 것일수록 더욱 신경 쓰고 아껴야 하는 건데, 게이트 색깔이 이렇게 달라져 있는 동안 눈치를 못 채다니.
경일은 크게 반성하며 던전으로 들어갔다.
던전에 들어간 경일은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쉬는 동안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실행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언젠가는 해야 할 여러 가지 계획은 이미 세워 놓았다.
분식점에 추가시킬 메뉴에 대한 구상이나, 지금 살고 있는 거점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방법 등, 계획해 놓은 건 많았다.
그의 생각 속 거점은 자연을 활용한 멋진 별장이 지어져 있을 정도였다.
일단 경일이 가장 먼저 하기로 한 건 물의 확보였다.
지금까지 생활에 필요한 물은 개울에서 길어다가 썼다.
이건 상당히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었다.
사실 이미 집으로 물을 끌어들일 방법을 모두 생각하고 있었는데, 게을러서 실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마나 엔진 톱을 어디에 뒀더라?”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가장 중요한 공구인 마나 엔진 톱을 둔 장소가 기억나지 않았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처음부터 일이 막히니 멘붕이 왔다.
“정말 나도 한심하게 살긴 했구나. 머릿속에서 빠진 나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네.”
한참을 헤멘 끝에 마지막으로 잘랐던 나무 옆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마나 엔진 톱을 찾았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체인 날에는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혹시 고장 난 것이 아닐까 걱정스런 마음으로 마나 엔진 톱을 작동시켰다.
다행히 마나 엔진 톱은 힘 있게 잘 돌아갔다.
경일은 마나 엔진 톱을 챙겨 그동안 게이트와 집을 오가며 봐 두었던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대나무는 곧게 하늘을 뚫을 듯이 쭉쭉 뻗어 있었다.
녹색 빛으로 물든 대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살랑살랑 춤을 추었다.
장관이었다.
마음이 급한 경일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싱그러움이라니, 정말 신선하구나. 아주 그냥 생명력이 넘쳐흐르네. 괜히 대나무를 자르려고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야.”
경일은 자연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적당한 대나무를 골라 잘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