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20화 (20/300)

[20화] 분식점 일도 열심히

몇 시간을 꼬박 대나무를 자르자, 주변에 수백 개가 넘는 대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지금 하려는 일은 대공사였다.

거의 집을 짓는 정도의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경일이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은 이유였다.

적당한 크기로 다듬은 다음 얇은 대나무를 굵은 대나무 속으로 집어넣어 마디를 제거했다.

그러자 대나무가 하나의 파이프로 재탄생했다.

그가 하려는 일은 단차를 이용해 계곡물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었다.

전기 모터가 있었으면 개울에서 간단하게 물을 빨아들여 썼을 테지만, 던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계곡과 집까지 대나무를 연결해야 했다.

집 뒤의 산에서 발견한 계곡으로 일일이 대나무를 옮겼다.

오래간만에 일을 하다 보니 금방 지쳤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던전 사과였다.

사과를 하나 먹자 갈증도 가시고 몸에서 힘이 났다.

[던전 사과를 먹었습니다. 몸의 활력이 높아집니다.]

경일의 눈앞에 메시지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역시 노동에는 사과가 최고라니까. 말라 버린 입안을 상쾌하게 해 주고, 단맛은 곧바로 나에게 에너지를 주잖아.”

사과는 던전 생활의 시작을 알린 과일이었다.

그래서 경일에겐 더욱 뜻깊게 다가오는 과일이기도 했다.

일일이 대나무를 직접 나르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평소 같으면 적당히 쉬기도 하고 게으름도 부려가면서 일을 했겠지만, 던전과의 유대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긴급한 상황에서 꾀를 부릴 수는 없었다.

경일은 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계속해서 대나무를 옮겼다.

땀을 흘리며 일을 하면 할수록 던전이 말한 존재감이라고 짐작했던 것이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내 생각이 맞았어. 땀을 흘릴수록 던전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만지고 냄새까지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게 바로 던전이 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어 가자 경일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하나의 대나무를 옮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비된 길도 아니고, 굴곡이 심한 숲에서 긴 대나무를 옮기는 건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

대나무를 옮기는 도중 방향이 바뀔 때마다 다른 장애물에 부딪히기 일쑤였고, 운이 없으면 대나무가 큰 상처를 입어 지금까지 한 일이 헛수고가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지만, 지금은 실의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힘내자고. 쉬운 게 어디 있어? 난 지금 무시무시한 시험 속에 빠져 있다고. 여기에 걸린 것이 나의 영혼과 같은 던전이야.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야.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건데, 그럴 때마다 실망하지 말자고.”

경일은 자신을 다독거리며 일을 이어 갔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이미 처음의 색과 형태를 잃어버렸다.

대나무를 옮길 때마다 여기저기에 쓸려 찢어지고, 어떤 부분은 떨어져 나갔다.

피부 역시 여기저기 쓸린 상처로 가득했다.

흐르는 땀이 상처에 스며들 때마다 짜릿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오히려 느껴지는 아픔이 지금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명 같아 마음이 편해지는 부분도 있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분식점으로 출근할 시간이 다가왔다.

‘한동안 분식점을 닫고 던전에서 계속 일만 해야겠다.’

늘 자신을 찾아 주는 분식점의 손님들도 중요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던전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던전에서의 활동이 중요하듯이 지구에서의 활동도 중요하지 않을까? 던전에서의 활동만 중요하다면 굳이 게이트가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만약 던전에서의 활동만 필요했다면 내가 던전에 들어온 순간, 게이트가 사라졌을 거야.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으면 나는 던전에서 살아가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일을 했겠지. 던전의 입장에서는 그게 훨씬 나와의 유대를 빨리 쌓는 방법이니까.’

경일은 고민이 되었다.

던전과의 유대에 관한 메시지는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답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깊은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분식점으로의 출근이었다.

아무리 던전이 소중하지만, 자신의 뿌리는 엄연히 지구였다.

그리고 분명 지구에서의 활동도 여기 못지않게 중요할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경일은 지금 하는 일을 대충 정리한 다음 게이트를 넘어갔다.

옥탑방으로 돌아와 게이트를 보니 들어갈 때보다 색깔이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아~ 게이트가 답을 주는구나.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던전에서의 활동이 답이었네.’

답을 찾자 크게 안심이 되었다.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일단 급한 불을 끄는 데는 성공했어. 이제 남은 건, 지구에서의 활동이 던전에 미치는 영양이구나. 혹시 지구에서도 열심히 활동하면 게이트의 색깔이 더욱 짙어지지 않을까?’

경일은 자기 생각을 확인하려면 분식점에서 열심히 일해야 했다.

분식점으로 출근한 다음, 평소와 같이 떡볶이와 어묵탕을 만들었다.

워낙 간단한 음식이라 만드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출근해서 겨우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할 일이 없었다.

‘이제부터 열심히 할 거라 다짐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30분 만에 끝이 나다니.’

경일은 마음속에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와~ 진짜 게으르게 살았구나. 던전이 나를 버릴 만하네. 아예 던전만 믿고 기본도 안 하고 살았구나. 다정 분식 사장만 욕 할 것이 아니었네. 그 사람이 나를 만만하게 본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의 눈에 그동안 신경 쓰지 않던, 매대에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튀김 솥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 분식에서 가장 부족한 건 역시 메뉴였다.

재료 자체의 맛만 가지고도 맛있는 맛을 끌어낼 수 있으니 어느 순간 타성에 빠져 버렸다.

솔직히 지금의 장사가 유지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노력은 1도 들어 있지 않았다.

떡볶이나 어묵탕도 연구 하나 없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흔한 레시피로 만든 것이었다.

‘휴~ 반성은 해도 해도 끝이 없으니, 그만하고 움직이자.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경일은 분식점을 닫고 시장으로 갔다.

가장 먼저 추가해야 할 메뉴는 역시 튀김이었다.

이미 분식점에 설비가 다 되어 있으니, 재료만 있으면 곧바로 만들 수 있었다.

일단 튀김의 종류를 결정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요리책을 꾸준히 봤다는 것이다.

공부를 위해 요리책을 봤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손에서 놓았을 것이다.

경일은 어릴 때부터 작은 식당을 여는 것이 꿈이어서 요리책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에 요리책을 보던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리책에 쓰인 튀김에 대한 부분을 떠올렸다.

간단하게 뭉텅 그려 튀김이라고 말하지만, 튀김의 종류는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일단 분식점 하면 떠오르는 가장 기본적인 튀김부터 해 보자.’

튀김에 필요한 재료를 사고 분식점으로 돌아왔다.

‘먼저 튀김 솥부터 닦아야겠지.’

평소 매대의 튀김 솥을 닦아 놓긴 했지만,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다시 한번 깨끗이 솥을 닦았다.

솥에서 이제야 자신을 써 주냐는 듯한 원망이 들리는 듯했다.

우선 사 온 재료부터 다듬었다.

오늘 만들 튀김은 분식점 튀김의 기본인 고구마튀김과 야채튀김 그리고 고추튀김이었다.

이것들을 시작으로 튀김이 익숙해지면 메뉴를 늘여 갈 예정이었다.

커다란 고구마를 새 수세미로 박박 씻었다.

굳이 껍질을 제거할 필요가 없어 3~4밀리로 적당히 잘라 물에 담가 두었다.

이제 튀김의 가장 기본이 될 튀김 반죽을 만들어야 했다.

밀가루와 감자 전분과 고구마 전분을 섞어 놓고 물은 붇지 않았다.

고구마의 묻은 물기를 제거하고 재료 준비를 마쳤다.

튀김의 생명은 바삭함이다.

바삭함을 위한 경일의 비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글루텐의 생성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밀가루는 물과 만나면 글루텐이 생성된다.

글루텐을 튀기면 바삭한 것이 아니라 쫄깃함이 강해진다.

경일은 최대한 숙성을 지연시키기 위해 얼음을 준비했다.

만들어 놓은 튀김 가루에 얼음물과 1대1 비율로 섞어 생밀가루가 남아 있도록 대충 저었다.

반죽보다 물에 가까운 묽기였다.

두 번째 방법은 튀김 반죽에 식용유를 섞는 것이었다.

반죽에 섞인 식용유가 공기층을 만들어 튀김이 더 바삭해지도록 했다.

튀김 반죽을 완성하자 곧바로 고구마에 묻혀 튀겼다.

이미 기름 온도는 170도에 맞추어 놓은 상태라 고구마가 들어가자 곧바로 맛있는 소리를 내며 튀겨졌다.

분식점을 오픈하고 드디어 첫 튀김이 완성되었다.

너무 뜨거울까 봐 살짝 식혀 입안에 넣고 씹었다.

얇게 입혀진 튀김옷이 바사삭하고 깨지는 소리와 함께 고구마가 같이 씹혔다.

튀김 자체의 고소함과 고구마의 단맛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하모니를 만들어 냈다.

‘처음 한 것 치고는 괜찮은데? 하긴, 신발도 튀기면 맛있는 게 튀김이니까. 그래도 튀김옷이 딱딱하지 않으면서 바삭한 건 아주 마음에 드는 걸.’

튀김이 생각보다 맛있게 나와 기분이 좋았다.

경일은 튀김 반죽에 들어갈 재료의 비율을 다르게 하며 더욱 맛있는 맛을 찾으려 노력했다.

강황 가루를 섞자, 노란빛의 튀김이 더욱 입맛을 자극했다.

야채 튀김 역시 맛있었다.

‘일반 재료로 해도 맛있는데, 던전의 재료가 들어가면 얼마나 맛있어질까?’

상상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손이 많이 가는 고추 튀김까지 세 가지 튀김을 만드는 데에만 오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전처럼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장사를 하는 경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에 비해 결과물은 소박했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뭐~ 계속 연습하다 보면 음식을 만드는 속도가 늘어나겠지. 첫술에 배부르길 바라는 건 만용이지.’

던전이 있는 이상, 누구보다 빠르게 실력을 늘릴 자신이 있었다.

고추 튀김에 들어가는 야채 소 덕에 텅 빈 선반에 간장과 참기름 등 여러 조미료가 자리 잡았다.

텅 빈 냉장고에도 여러 신선한 재료들이 들어찼고, 이제야 조금 분식점다운 모습이 되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네. 뭔가 보람찬 일을 한 듯해서 기분이 참 좋아.’

늘 반쯤 비어 있는 분식점의 매대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내 입맛에는 맛있긴 한데, 나보다는 손님들의 입맛이 더 중요하지.’

경일은 튀김을 시식해 줄 단골손님을 기다렸다.

“어머, 사장님. 드디어 튀김을 시작한 거예요? 걸어오는데 어디서 고소한 냄새가 나길래 궁금했는데, 분식점에서 나는 냄새였네요. 매일 튀김 솥이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불쌍했는데, 정말 잘됐네요!”

가장 먼저 찾아 준 건 이미순이었다.

그녀의 말에 가슴이 찔렸다.

손님도 알고 있는 걸 주인인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니.

“하, 하, 원래라면 오픈 때부터 해야 했는데, 그동안 너무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이제부터 분식점다운 분식점이 될 예정입니다. 튀김 말고도 메뉴가 늘어날 예정이니, 많이 응원해 주세요.”

경일이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튀김 말고도 여러 음식을 하신다고요? 그럼 저야 좋죠. 누구나 끓일 수 있는 라면도 그렇게 맛있는데, 다른 음식은 어떤 맛일까 무척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라면 먹을 때마다 살짝살짝 물어봐도 늘 외면하셔서 마음이 상했는데, 오늘로써 용서해 드릴게요.”

“하하, 감사합니다.”

경일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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