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강해진 던전과의 유대
“뭐 해?”
과장이 눈치를 주었다.
김 주임은 차라리 공무원을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머릿속에 들끓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 세상에서 최고의 직업 중 하나인 공무원을 때려치운다고?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작은 착오가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경일의 얼굴에 분노가 확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김 주임? 지금 그걸 사과라고 하는 거야? 작은 착오? 오늘 정녕 네놈이 죽고 싶어?”
호통은 구청장에게 나왔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야?”
김 주임을 노려보는 구청장의 눈에서 시퍼런 귀기가 보일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이건 전적으로 구청의 실수입니다. 모든 공무원이 이렇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하는 공무원들을 위해서 한 번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과장이 깊숙하게 머리를 숙였다.
김 주임은 공식적으로 비리 공무원이 되었다.
그것도 경일의 바로 앞에서.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하지만, 자신과 일해 온 세월이 얼만데 이런 수모를 주다니.
이 상황이 너무 분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힘없이 머리를 떨구었다.
경일이 김 주임을 한 번 노려봤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10년은 늙은 듯 보였다.
“알겠습니다. 구청장님 얼굴을 봐서 이번 일은 여기서 덮기로 하겠습니다. 대신 다른 공무원들이 욕먹지 않게 저런 비리 공무원에게 확실한 징계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한테 찾아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입니다. 이 점 꼭 유념해 주세요.”
김 주임은 자신의 면전에서 비리 공무원이라고 딱 꼬집어 말하는 경일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경일은 그런 김 주임의 앞을 쌩 지나쳤다.
“휴~”
구청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각오하고 있어.”
구청장이 자신의 머리를 숙이게 만든 김 주임에게 이를 갈며 나가 버렸다.
경일은 이 일로 김 주임이 잘리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의 잘못으로는 기껏해야 징계를 받고 끝날 것이다.
대신 그는 단단히 찍혔다.
아무리 공무원 사회가 끈끈하다 해도 비리 공무원이라고 낙인 찍힌 그를 보듬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한 번 무리에서 쫓겨난 그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은 절대 만만치 않을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주위 동료들의 비호가 사라진다면 지금까지 그가 저질렀던 일은 언젠가는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가 저지른 비리의 증거를 경일이 가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경일이 마음을 바꾸면 이 일이 공론화될 수도 있었다.
그는 코뚜레에 꿰인 소와 같은 신세가 됐다.
앞으로 절대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된 그를 가까이하고 싶은 이는 없었다.
김 주임은 지금까지 누렸던 많은 것들을 내려놔야 했다.
경일이 다녀간 이후로 그는 구청에서 공식적인 왕따가 됐다.
그에겐 생각보다 무거운 징계가 내려졌다.
구청장의 괘씸죄가 추가된 탓이다.
김 주임은 주위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꿋꿋이 버텼다.
하지만 김 주임이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은 금방 퍼졌고, 그에게 당한 식당 주인들의 민원은 계속해서 들어왔다.
그는 매일 감사를 받아야 했다.
아무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폭탄은 제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샤워할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뭘 먹어도 입맛이 없었다.
밥을 씹는 건지, 모래를 씹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하루하루 말라 갔다.
살이 빠지자 광대뼈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짙은 다크서클까지 생겼다.
의욕이 꺾인 그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잘 씻지도 않아 근처에만 가도 냄새가 났다.
늘 갑의 위치에서 큰소리치며 대접을 받고 살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쪼그라든 처지가 된 지금의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버티지 못했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업 중인 하나인 공무원에서 결국 잘린 것이다.
김만복은 이번 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김 주임이 화풀이할 사람은 김만복밖에 없었다.
그는 김만복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고, 제법 많은 돈을 뜯어냈다.
김만복은 만만히 봤던 경일에게 당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경일이 망하는 것을 봐야 이 억울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릴 거 같았다.
‘내가 이대로 당하고는 억울해서 못 살지. 내가 어떤 놈인데. 이렇게 힘든 세상에서 돈 한 푼 없이 오로지 악으로 깡으로 이만큼 성공한 사람이 나란 인간이야. 개 같이 벌어서 헌터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집을 마련한 사람이 나란 말이야. 이번 일로 도대체 얼마나 손해를 본 거야. 그 새끼가 망하는 걸 봐야 이 울화가 풀어지겠지. 그 새끼는 내가 꼭 쫓아내고 만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김만복의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더운 숨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지금까지 본 식당 사장 중 가장 만만하게 본 놈에게 당했던지라 그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식당을 괴롭혀 왔다.
김 주임을 보내 자잘한 꼬투리를 잡던지, 심하면 누명을 씌워 영업정지를 받게 했다.
식당으로서 영업정지는 최악이었다.
경일은 김만복 가진 비장의 수를 방어만 한 것이 아니라 한 방에 깨부수어 버렸다.
또 다른 공무원을 포섭할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동네 분식을 건드릴 간 큰 공무원은 없을 것이었다.
김만복은 동네 분식을 망하게 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웃고 있을 경일을 생각하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 * *
경일은 여느 때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분식점 장사를 마치면 던전에 들어가 일을 했다.
새로운 작물을 발견하면 옮겨 심었다.
밭은 점점 넓어졌다.
만약 지구에서 짓는 농사였다면 혼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농기계의 도움 없이 모든 걸 손수 해야 하는 농사인 만큼 힘들고 많은 일을 해야 할 테지만, 실상은 그리 바쁘지 않았다.
작물은 심기만 하면 알아서 잘 자라 솎아 내기나 잡초를 제거하는 등의 잡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수확할 때까지 손이 갈 일이 없었다.
다른 작물을 심기 위해 밭을 늘이고, 던전을 탐험했다.
밭에는 여러 가지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경일은 개울에 민물새우를 잡으러 갔다.
민물새우는 분식점의 운영에 없어서는 안 될 재료였다.
라면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민물새우도 이전보다 훨씬 많이 필요했다.
그 덕에 던전에 들어올 때마다 매번 민물새우를 잡아야 했다.
경일은 수초의 밑동을 발로 꽉꽉 눌러 밟았다.
그러자 민물새우들이 튀어 오르며 족대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양이 좀 되네.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처음에는 민물새우를 잡는 게 재미있었는데, 이게 일이 되니 이것도 지치네.”
그는 잡은 민물새우를 양동이에 넣었다.
“에게~ 두 시간이나 잡았는데 아직 이 정도밖에 안 돼? 오늘은 영 실적이 안 좋은걸.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이 잡아서 그런 건가? 오늘 던전 탐사도 해야 하고, 수확할 것도 좀 있어서 여기서 시간을 많이 뺏기면 안 되는데.”
분식점에서 사용하는 민물새우의 양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필요한 양만큼 잡으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워낙 크기가 작아 말려서 가루를 내면 그 양은 더욱 줄어들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나?”
그에게는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 이러면 되겠다.”
한참을 고민 끝에 낸 아이디어는 바로 민물새우 양식이었다.
경일은 오늘 일정을 모두 미뤘다.
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집 뒤의 적당한 곳을 고르고 삽질을 시작했다.
일단 민물새우가 지낼 연못부터 만들어야 했다.
“아이고 죽겠네.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나.”
그의 손에는 삽에 쓸려 제법 큰 물집이 생겼다.
한 번씩 큰 돌이 나올 때가 가장 곤란했다.
그럴 땐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돌을 치워야만 했다.
“헥헥헥, 도저히 안 되겠다. 조금 쉬었다 하자.”
경일은 대나무를 따라 흐르는 물에 머리부터 집어넣었다.
시원한 계곡물이 열이 오른 얼굴을 식혀 주었다.
물을 마시고 적당한 바위에 앉아 쉬었다.
“던전의 경치는 도저히 질리지가 않는구나. 얼핏 보면 그대로인 거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그게 아니란 말이지. 지는 꽃도 있고, 새로 피어나는 꽃도 있고, 새롭게 발견되는 이름 모를 풀까지. 가만히 있는 듯해도 그 안에 숨어 있는 역동을 알고 나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삽질은 거의 이틀을 꼬박하고서야 끝이 났다.
연못의 바닥은 축축한 진흙이었다.
보통은 방수포를 연못 바닥에 깔아 주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연못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곳은 굳이 방수포를 깔지 않아도 연못을 만들 수 있었다.
계곡의 물을 끌어다 연못에 채웠다.
물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흐르게 해야 했다.
경일은 연못의 옆에 작은 웅덩이를 파고 둘을 연결하는 물길을 냈다.
연못이 넘치면 물길을 따라 작은 웅덩이로 흘러 들어갔다.
연못을 만드는 것은 힘들었지만, 만들어 놓고 보니 뿌듯했다.
민물새우를 양식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건 수초였다.
개울에서 수초를 채집해 심었다.
그 뒤, 민물새우를 잡아 연못에 풀어 놓았다.
수초들은 잘 자랐다.
수초가 자라는 것을 봐서는 민물새우도 잘 자랄 거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울에 민물새우를 잡으러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던전에 경일의 손길이 점점 늘어갔다.
경일이 거처로 삶은 곳은 이제 거의 작은 농장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분식점의 장사가 잘되자 번 돈으로 던전에 소형 마나 발전기를 설치했다.
던전에서 가장 불편한 게 아무래도 밤에 전등을 켤 수 없는 거였다.
지금까지 양초를 이용했는데, 전등에 비하면 너무 불편했다.
마나 발전기를 설치하고, 전선을 연결해 전등을 달았다.
던전에 밤이 찾아오자 경일은 전등을 켰다.
환한 빛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던전에 어둠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이 일찍 잠을 자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어졌다.
경일은 해가 지고 나면 식물에 관한 공부를 했다.
작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산나물이나 약초, 버섯까지 공부하는 중이었다.
어느새 경일은 던전을 탐험하면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여러 식물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던전과의 유대가 강해졌습니다. 던전의 환경이 발달해 새로운 식물이 자라납니다.]
경일은 오래간만에 보는 메시지가 반가웠다.
꼭 던전이 지금까지의 노력을 칭찬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식물이라~ 어떤 식물을 이야기하는 걸까?”
지금 경일의 식물 찾기 스킬의 레벨은 2였다.
꾸준히 밭에 키울 작물을 찾다 보니 어느 날 레벨이 올랐다.
하지만 이 스킬은 단점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아는 식물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찾고자 하는 식물을 머릿속에 떠올려 강하게 염원하면 식물이 있는 곳이 떠올랐다.
두 번째는 한 번이라도 가 본 장소만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필요한 식물이 경일이 가 본 적이 없는 곳에 있으면 찾을 수 없었다.
새로운 식물이 어떤 식물인지 알 수가 없으니 스킬은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직접 돌아다녀서 찾아야 했다.
“새로운 식물이라… 과연 어떤 식물인지 궁금해지네. 가만 보면 메시지를 보여 주는 존재가 누군지 알 순 없지만, 내가 꾸준히 던전을 탐험하기를 원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 이렇게 멋진 곳을 나에게 선물했는데, 당연히 던전을 열심히 돌아다니겠습니다.”
경일은 메시지를 받은 날부터 더 열심히 던전을 탐험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