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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31화 (31/300)

[31화] 이타심

보일 가문은 오랫동안 스탄다비아 지방을 다스려 왔다.

영지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윤택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자애가 넘치는 귀족이었다.

역대 영주들은 최선을 다했고, 나라에서 손꼽는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영지와 맞대고 있는 숲에서 몬스터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몬스터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일가는 최선을 다해 몬스터의 침공에 맞섰다.

침입해 오는 몬스터를 죽이고 또 죽였지만 몬스터의 침공은 끝이 없었다.

피해가 조금씩 늘어나고 쌓여 갔다.

결국,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영지의 외곽으로 밀려났다.

대부분의 영지는 몬스터의 서식지가 되었고, 스탄다비아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귀족의 지위는 점점 낮아져 지금의 자작 지위도 겨우 유지 중이었다.

그렇게 100년이 흘러 지금의 자포리자가 영주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의 스탄다비아 땅은 너무 척박했다.

아무리 노력한들 한계가 있었다.

보일가에는 하나의 전설 같은 가문의 유훈이 내려오고 있었다.

언젠가 영주의 방에 게이트가 열릴 것이고, 게이트와 연결된 던전에 스탄다비아를 도와줄 선인이 존재할 거란 내용이었다.

어느 날, 자포리자는 자신의 방에 게이트가 열린 것을 확인한 순간, 가문에 전설처럼 내려오던 유훈이 드디어 실현된 걸 느꼈다.

그는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망설이지 않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던전에 들어가자 과연 가문의 유훈처럼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자포리자 영주는 망설이지 않고, 일평생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남자를 향한 존경의 표시였으며 충성의 맹세이기도 했다.

경일은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몇백 년 동안 이어진 유훈이 실현된 날이다.

자포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선인이 매우 궁금했지만, 이마를 땅에 대고 묵묵히 기다렸다.

경일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세요.”

자포리자는 깜짝 놀랐다.

아주 자연스러운 자신들의 언어였다.

분명 다른 세계의 사람인데, 토착민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언어로 말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경일을 바라봤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드문 까만 머리에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자신들의 옷과 매우 달랐지만, 한눈에 봐도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이 선명한 색깔이었다.

자포리자는 감탄을 흘리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선인이시여. 만나서 영광입니다. 제 대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런 미천한 저를 선택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부디 저희를 가엽게 여기시어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자포리자는 무한한 공경심을 담아 경일에게 인사했다.

경일은 극존칭에 당황하면서도 그의 처지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방금 받아들인 정보에서 그가 얼마나 영지민을 사랑하는 영주인지 알 수 있었다.

영지민을 위해 희생하고, 조금이라도 잘살게 하려고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이는지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경일의 마음에서 이타심이 생겨났다.

그는 기꺼이 스탄다비아의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스탄다비아를 도울 준비가 되었습니다. 스탄다비아와의 유대가 강해집니다. 스탄다비아가 앞으로 발전할수록 당신 또한 강해집니다.]

‘강해진다고, 내가?’

경일은 강해진다는 말에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레벨 0

힘 (11/12)

민첩 (12/13)

체력 (10/12)

마나 (10/10)

[스킬]

식물 찾기 (Lv.2)

[특성]

스탄다비아다비아와의 동조가 이루어짐

놀라운 일이 또 하나 벌어졌다.

스탄타비아의 동조가 이루어지면서 레벨이 표시된 것이다.

지금까지 물음표로 표시된 레벨에 숫자가 써진 것이었다.

경일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0레벨의 헌터는 지금껏 들은 적이 없었다.

각성하는 순간 1레벨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의 신체 능력이 다른 헌터에 비해 왜 이리 약한지 알 수 있었다.

비록 0레벨이긴 하지만, 레벨이 표시됐다는 것은 앞으로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얼마든지 다른 헌터들처럼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특성도 새롭게 생겼다.

‘스탄다비아와의 동조라.’

[스탄다비아가 앞으로 발전할수록 당신 또한 강해집니다.]

이 부분의 메시지에서 어떻게 해야 강해질지 대충 감이 왔다.

던전에서 활동을 할수록 던전과의 유대가 깊어진 거처럼, 스탄다비아의 발전에 이바지할수록 강해진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경일은 누군가가 깔아 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따라 어느 정도 걸어가면 늘 이벤트가 일어났다.

처음 길에 들어서면서 일어났던 첫 번째 이벤트는 던전 사과를 먹었을 때였다.

던전 사과를 먹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 뒤로 던전의 여러 식물을 먹었고, 놀라운 맛과 효능을 직접 경험했다.

그것은 그가 던전과 지구에서 좀 더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의욕을 주었다.

실제로 던전에 집을 짓고, 분식점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두 번째 이벤트는 경고였다.

나태해진 경일이 길을 걷는 것을 멈췄을 때 나타났다.

던전과 단절될 수도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나타나자 그 뒤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활동했다.

그 길을 걷는 속도의 조절은 분명 자신이 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 길을 걷는 것을 멈췄을 때, 책임져야 할 결과를 뼈저리게 한 번 느꼈다.

경일은 던전과의 유대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성과를 이루었다.

던전과의 유대가 높아지고, 스킬이 생기고, 자연히 던전 탐험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게이트가 눈앞에 생성됐다.

게이트에서 나온 자포리자 영주를 만났고, 그 순간 스탄다비아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스탄다비아의 힘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타심을 가지자마자 가장 중요한 헌터로서 발전해 나갈 방법을 알게 됐다.

계속해서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해 준 건 이타심이었다.

만약 경일이 스탄다비아의 힘든 사정을 외면했다면 헌터로서의 삶은 시작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것은 던전이 요구하는 길을 이탈했다는 뜻이고, 그와 함께 던전을 소유할 자격을 잃었을 것이다.

경일은 흔쾌히 자포리자의 도움에 손을 내밀었다.

자포리자는 선인이 자신들을 도와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더욱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자포리자 성주가 게이트로 돌아가자 게이트가 사라졌다.

오늘 너무나 많은 일을 겪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생각을 정리하다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던전의 아침은 여느 날과 같이 화창했다.

하지만 경일의 얼굴은 많이 복잡해 보였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스탄다비아를 도와야 한다는 명제는 알고 있는데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뭘 도와야 하는지 머릿속이 깜깜했다.

그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탄다비아의 현황을 보시겠습니까? (Y / N)]

경일은 메시지가 이끄는 길로 순순히 따랐다.

YES라고 생각하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탄다비아와 동조에 성공했습니다.

[스탄다비아의 현황을 볼 수 있습니다.]

[스킬 스탄다비아의 현황 관찰이 생겼습니다.

[언제든지 스탄다비아의 현황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스킬이 생김과 동시에 자포리자 영주와 연결이 가능해지고, 또한 스탄다비아 영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마치 머릿속에 거대한 영화관이 생긴 거 같았다.

경일이 원하면 자포리자 성주가 보는 것을 자신도 볼 수 있었다.

곧바로 자포리자와 동조를 희망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보이는 장면은 전쟁이었다.

사람들이 몬스터를 맞아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자포리자 영주가 허름하게 쌓아 올린 성에서 몰려오는 몬스터를 막아 내고 있었다.

몬스터는 경일도 잘 알고 있는 고블린이었다.

고블린은 지구에 게이트가 생기고, 가장 먼저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였다.

사람들이 몬스터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때, 엄청난 고블린 무리가 게이트를 통해 지구에 나타났다.

고블린은 사람들을 향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했다.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먹이로 삼으며 고블린은 막대한 참사를 일으켰다.

지금은 각성한 헌터들의 레벨 업 재료로 전락했지만, 그 당시 고블린을 처음 접한 인류에겐 악몽, 그 자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는 가장 약한 몬스터인 고블린에게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고블린의 흉측한 얼굴이 경일의 눈앞에 가득 찼다.

이건 영화를 보는 느낌이 아니었다.

고블린이 풍기는 살의, 입에서 나는 썩은 피비린내, 칠판을 긁는 듯한 신경을 거스르는 목소리.

모든 게 직접 경일에게 느껴졌다.

전장의 축축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경일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한 번도 몬스터에게 직접 노출이 되어 본 적이 없는 터라 그 충격이 상당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이 삼켜지고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건 경일이 느끼는 감정일 뿐, 자포리자는 달랐다.

그의 무거운 롱소드가 거침없이 공기를 베고 나아가 고블린의 몸을 유린했다.

단 한 수였다.

단 한 수에 고블린의 상체가 사라져 버렸다.

고블린의 짧고 굵은 다리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듯 바닥에 두 발을 강하게 디디고 서 있었지만, 허리 위는 뻥 뚫려 있었다.

허리 위의 상체가 바닥에 처박혀 온갖 내장이 튀어나오고, 흘러내린 피가 자포리자의 발을 적셨다.

“우엑!”

이 소리는 경일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고블린의 내장이 흘러나온 생생한 모습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몬스터 부산물 공장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비위가 강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살아 있는 고블린의 뜨거운 피가 튀고, 후덥지근한 비린 피 냄새와 내장의 징그러운 모습은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잔인한 광경이었지만 이 정도로는 고블린의 사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또 다른 고블린이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포리자에게 뛰어들었다.

그의 롱소드가 공기 중의 가벼운 깃털처럼 춤을 추었다.

분명 가벼운 몸놀림이었지만, 그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에게 달려오는 여러 고블린은 하나의 육편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물러서지 말라. 우리는 승리한다!”

온갖 소음으로 시끄러운 전장임에도 자포리자의 묵직한 목소리는 성벽 위의 모든 사람에게 전달됐다.

동료가 고블린에게 유린당해 반쯤 이성을 잃은 사람도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귀에 메아리쳤다.

사람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블린에게 맞섰다.

“내가 감히 장담한다. 내일부터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지금처럼 수세에 몰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옛 우리 선조들의 영광이 다시 시작되는 날임을 확실히 말한다. 오늘의 승리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이 그의 말에 함성을 질렀다.

축축했던 전장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자포리자는 단지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경일을 굳게 믿었다.

간접적이나마 영지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경일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괜히 쑥스럽기도 하고,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는 자포리자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경일의 시선은 하늘로 떠올랐다.

원하는 곳의 일정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마치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사람들과 고블린의 전투가 한눈에 들어왔다.

약 200마리 정도의 고블린이 성벽을 기어올라 공격했다.

크기가 제각기인 돌로 쌓아 올린 성벽을 체형이 비해 긴 팔로 쉽게 올라갔다.

울퉁불퉁한 성벽은 잡을 곳이 많았고, 어느 정도의 힘만 있으면 올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고블린의 머리 위로 어른 머리만 한 돌이 떨어졌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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