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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32화 (32/300)

[32화] 새롭게 해야 할 일

쩌억!

힘입게 던진 돌이 고블린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한참 성벽을 기어오르던 고블린이 손을 크게 휘저으며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터억!

바닥으로 떨어진 고블린의 몸이 땅과 부딪치며 다시 튀어 올랐다.

고블린에게 돌을 맞힌 사람은 이 모습을 보고도 전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적대로 일이 실행됐는데 아무런 표정이 없자 보고 있는 경일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케헤엑!”

숨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힌 고블린이 머리를 흔들며 다시 일어났다.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이 정도의 공격으로는 고블린을 죽이지는 못했다.

대단한 내구성이었다.

거의 5m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고블린은 자력으로 일어났다.

입에서 진득한 피를 뿜어내면서 고블린은 다시 성벽에 매달려 올라갔다.

고블린의 끈질긴 모습에 질릴 만도 한데, 사람들의 표정은 익숙한 듯 변함이 없었다.

그저 기계처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실행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보기에도 조악해 보이는 무기로 최선을 다해 성벽 위로 올라온 고블린을 상대하고 있었다.

병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손에 든 무기는 대부분 몽둥이였다.

고블린이 들고 있는 이가 나간 녹슨 칼보다 못 해 보였다.

어려 보이는 병사가 고블린의 칼을 피하며 머리를 향해 몸뚱이를 내려쳤다.

퍼억!

강맹한 힘이 실린 몽둥이가 고블린의 정수리를 그대로 강타했으나, 의외로 터져 나간 건 몽둥이였다.

당황한 병사의 움직임이 순간 굳어 버렸다.

고블린은 쓰러지지 않았다.

휘청이긴 했지만,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병사를 향해 녹슨 칼을 휘둘렀다.

고블린의 힘을 이기지 못한 칼이 휘어져 버렸다.

“아악!”

병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도가 약한 고블린의 칼이 휘어지긴 했지만, 병사의 허리를 베고 지나가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 빠진 칼날에 당한 상처는 베어진 것보다 뜯겨 나간 듯이 보였다.

너덜거리는 살이 벌어져 피가 흘렀지만,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발밑에 준비해 둔 또 다른 몽둥이를 들어 고블린과 맞섰다.

나이 어린 병사는 조금 전 운이 없었다.

나무 몽둥이의 강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몽둥이는 겉은 멀쩡해 보였지만, 안에는 썩어 있었다.

정확하게 고블린의 머리를 타격했지만, 오히려 몽둥이가 부러졌다.

“키에엑!”

잔뜩 화를 내며 고블린이 병사를 향해 덤벼들었다.

거칠게 내려친 칼이 휘어지며 병사의 정수리를 노리고 다가왔다.

병사는 칼을 피하고 싶었으나, 옆구리의 상처 때문에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제기랄!”

나직하게 욕을 내뱉고는 몽둥이를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았다.

퍽!

칼과 몽둥이가 부딪치자 칼이 몽둥이를 파고들었다.

병사는 몽둥이를 회수하고 싶었지만, 고블린의 칼에 박힌 몽둥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보다는 고블린의 힘이 훨씬 강했다.

고블린이 칼을 몸 쪽으로 확 하고 당겼다.

“어, 어, 어.”

당겨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는 휘청거리면서 몽둥이를 놓쳤다.

그 순간, 고블린은 칼에 박힌 몽둥이째 그대로 병사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복부를 짓이기듯 들어간 칼이 내장을 갈랐다.

“윽!”

어린 병사는 터무니없는 고통에 제대로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으나, 그의 눈에는 분명 분함이 서려 있었다.

촤악!

고블린은 인정사정없이 복부를 찌른 칼을 회수했다.

우둘투둘한 칼날에 내장이 끼어 딸려 왔다.

새빨간 피가 튀고, 어린 병사는 고통 속에 죽어 갔다.

그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지는 모습에 경일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경일보다 더 마음이 아픈 건, 같이 싸우는 동료들이었다.

여기저기서 동료들의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그들의 가슴이 슬픔과 분노로 타올랐다.

경일은 그들의 분하고 슬픔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뜨겁게 부풀어 오른 눈자위가 벌겋게 충혈되었다.

어느새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몽둥이를 후려치면 부러지기 일쑤였다.

이런 열악한 상황인데도 병사들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내지르는 비명이 들려도 그들의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지쳐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이들은 빠르게 지쳐 갔다.

이들의 키는 같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체격은 비슷했다.

모두 깡말라 있었다.

체력을 짜내려고 해도 저 몸에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이들에게 삶이란 것이 얼마나 무겁고 잔인한지 마음속 깊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싸움은 성주와 병사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지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고블린과 싸우고 있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겨우 200마리의 고블린과의 전투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영지민들이 동원됐다.

이건 영지의 재정 상태가 바닥이라는 얘기였다.

병사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었다.

그 비용이 충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영지민들이 세금을 낼 돈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전투만으로도 스탄다비아가 얼마나 가난한 영지인지 짐작이 되었다.

그들은 가죽 갑옷도 없는지 일상복을 입은 그대로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다.

이제 겨우 아이를 벗어나 보이는 사람과 노인까지 모두 나와 고블린과 맞섰다.

전투는 치열하면서도 처절했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어 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고블린을 막아 내는 이들의 삶이 애달프고 구슬펐다.

자포리자 성주는 싸움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시도 쉬지 않고 고블린과 싸웠다.

영지민들을 독려하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것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경일은 겨우 고블린 따위에게 사람들이 죽어 가는 모습에 화가 치솟았다.

저들의 손에 몽둥이가 아닌 단단한 칼을 쥐여 준다면?

허름한 갑옷이 아닌 제대로 된 갑옷을 입고 싸운다면?

경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들이 필요한 걸 줘야 했다.

이 모든 일을 보는데 겨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고블린과의 전투는 몇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경일은 이 모든 일을 단지 10초 안에 볼 수 있었다.

마치 컴퓨터가 받아들인 정보를 순식간에 읽어 내듯이 경일의 머릿속에 들어온 스탄다비아의 현황을 짧은 시간에 모두 볼 수 있었다.

[스킬 인벤토리가 생깁니다.]

[인벤토리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인벤토리는 자포리자 영주의 인벤토리와 연결됩니다.]

경일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일과 자포리자 영주에게 인벤토리가 생겨났다.

“인벤토리를 이용해서 물자를 보낼 수 있구나. 앞으로 저런 처절한 죽음을 막는 게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겠지.”

인벤토리 스킬은 일부의 헌터들만이 가진 희소성 높은 스킬이었다.

어느 길드에 가더라도 환영받는 스킬이었다.

인벤토리를 가진 헌터가 있고 없고는 던전 공략에서 난이도가 달라질 만큼 가치 있는 스킬이었다.

특히 공략이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부 고등급의 던전일 경우,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의 참여가 더욱 중요했다.

“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긴 했지만, 보상도 적지 않구나.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이런 삶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보상으로 내 레벨도 올리고.”

경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할 일이 많았다.

그는 우선 거점의 밭에서 농작물을 수확했다.

그동안 농작물들은 무럭무럭 자라 처지가 곤란할 정도로 많이 자라 있었다.

분식점에 아무리 가져다 써도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급한 대로 수확을 하다 보니 대부분이 채소인 걸 알았다.

“이러면 영양분이 맞지 않는데. 탄수화물이 들어간 건 고구마뿐이구나. 앞으로 쌀과 밀도 심어야겠어. 던전에 쌀과 밀도 있을까?”

경일이 새로운 작물을 생각하자 어떤 장소가 떠올랐다.

“그래, 있을 줄 알았어. 한 달 전에 생각했을 때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니, 이번에 던전과의 유대가 깊어져서 나타난 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으니 아마 새로 나타난 거겠지.”

경일은 쌀과 밀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지금은 농작물 수확이 더 급했다.

이번 스탄다비아의 영지민과 몬스터의 싸움에서 본 건, 그들의 열악한 무기만이 아니었다.

영지민들의 바싹 마른 몸을 봤고, 경일은 지금 당장 할 수 있은 일을 떠올렸다.

여러 가지를 지원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가 가진 것은 밭에 기른 작물들밖에 없었다.

“앞으로 한없이 바빠지겠어. 던전이 내게 많은 선물을 줬으니, 보답을 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빚에 허덕이던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일했던 때였지. 어디 그때처럼 한번 열심히 해 보자. 이미 한번 해 봤는데 두 번 못 할 게 어딨어?”

경일은 머릿속에 여러 계획을 세우며 수확한 작물을 차곡차곡 인벤토리에 넣었다.

수확은 금방 끝이 났다.

자신이 먹을 것과 분식점에 필요한 만큼 농사를 지어서 종류는 많았지만, 생각보다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밭을 더 늘이는 건데.”

스탄다비아에 농작물을 조금밖에 보내지 못해 안타까웠다.

“던전 식물을 다시 팔아 볼까? 아니야, 마음이 급하다고 위험한 길로 갈 수는 없어. 내가 잘못되면 스탄다비아가 그대로 무너질 수도 있어. 그러니 최대한 안전하게, 오랫동안 그들을 돕는 방향으로 가야 해.”

경일은 던전 사과를 팔 때 자신을 찾던 수상한 무리가 떠올랐다.

만약 그들에게 잡혀 게이트의 위치가 알려지면 자신은 버려질 것이 빤했다.

아니,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해 곧바로 죽여 버릴 것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되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으니. 그나저나 농사만으로 한계가 있겠어. 앞으로 돈도 많이 벌어야겠어.”

목표가 생기자 경일은 활발하게 움직였다.

* * *

신화 길드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곽마권의 철혈정치가 시작되고, 반항하던 헌터 몇 명이 본보기로 병신이 되어 쫓겨났다.

길드의 압박이 심해지고 희생만 강요하자 많은 헌터가 이를 갈았다.

“씨발, 길드장 새끼 미친 거 아냐?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3팀의 헌터 최준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의 동료 하지호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니, 총무과에서 호출이 왔길래 가 보니 서류 한 장을 내밀고 사인하라는 거야.”

“서류? 무슨 서류?”

“하~ 씨발, 내가 어이가 없어서.”

최준서가 짜증이 나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짜증만 내지 말고 확실히 말을 해 봐. 무슨 서류를 내밀었다는 거야?”

“그게 말이지, 씨발, 계약서더라.”

“계약서? 혹시 길드 들어오면서 했던 계약서 말하는 거야?”

“그래.”

“너 아직 계약 기간이 한참 남았잖아. 근데 무슨 계약서를 내밀어?”

“이것들이 계약서에 기재된 한 군데를 고치고 나보고 사인하라네. 처음 들어올 때 길드와 계약했던 수익 분배 조건을 7대3에서 4대6으로 하잔다.”

“4대6? 확실해? 진짜 4대6? 네가 4 길드가 6?”

하지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몇 번을 되물었다.

“그래 4대6.”

“미친 거 아냐? 아니, 자기들이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이딴 조건을 내밀어? 이 조건은 신입 헌터에게나 통할 조건이지! 아니, 요즘은 신입도 4대6은 안 하겠다. 완전 미쳐 돌았구나. 고생은 우리가 하고,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합법적으로 돈을 뜯어 가겠다는 거잖아. 거기다가 매일 사과 장순가 하는 새끼 찾는다고 온갖 시장에 뺑뺑이를 돌리면서. 이건 완전 개새끼네. 너 설마 사인하지는 않았지?”

하지호의 질문에 최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담배만 벅벅 피워 댔다.

최준서는 23레벨 헌터였다.

D급 던전에서 활동이 가능한 헌터로, 이 정도면 어디 가도 7대3 정도의 계약은 무난히 할 수 있을 수준의 헌터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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