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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33화 (33/300)

[33화] 사과 장수는 어딨는 거야?

“너 설마… 사인을 한 거야? 이런 병신 새끼야. 거기에 사인하면 어떻게 해!”

하지호는 최준서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최준서의 일에 이렇게 과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준서가 시작일 뿐이었다.

이제 조만간 자신에게도 같은 조건을 내밀며 사인하라고 할 게 빤했다.

“씨발, 내가 사인하고 싶어서 했겠어?”

최준서는 자신을 구박하는 하지호에게 고함을 질렀다.

“1팀 팀장이 총무부장 옆에 앉아서 째려보는데, 너 같으면 사인 안 하고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조만간 너도 불려 갈 거 같은데, 어디 한 번 사인하나 안 하나 내가 두 눈 뜨고 지켜본다.”

“하~ 이런 개새끼들. 미안하다. 내가 좀 흥분했다.”

하지호는 곧바로 사과했다.

“개새끼들이 2팀이 사고 친 거 때문에 길드가 힘들어졌으니 같이 고생하자더라. 아니, 그걸 왜 내가 해야 하냐고. 2팀이 사고 친 게 내 탓이야? 아니잖아. 자기들이 관리를 좆같이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거잖아. 그럼 사고 수습도 자기들이 해야지. 그걸 왜 나한테 미루는 거야.”

얼마나 화가 났는지 최준서는 말할 때마다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2팀과 3팀은 애초부터 길드 내에서 유명한 앙숙이었다.

3팀은 2팀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2팀이 사고를 쳤을 때 오히려 고소해했다.

그런 2팀의 사고의 여파가 자신에게까지 오자 더욱 화가 났다.

이들은 같은 길드에 묶여 있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의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신화 길드 헌터들에게 의리를 말하는 것은 웃긴 일이었다.

모두 돈과 권력을 보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서 신화 길드에 들어온 거지, 의리는 옛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케케묵은 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하지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의 찍힌 번호를 본 순간, 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씨발, 나도 총무과에서 전화 왔다. 이 새끼들 다른 일은 졸라 못하면서 이런 일은 더럽게 빠르네.”

핸드폰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괜히 이들에게 개긴다는 인상을 줘 봐야 더 큰 불이익이 올 수도 있었다.

“네, 하지호입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하지호는 전화를 끊은 뒤,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갔다 올게. 조금만 기다려. 같이 소주나 한잔하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총무과를 향했다.

신화 길드는 2팀이 친 사고의 여파를 강력하게 두들겨 맞았다.

곽마권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이건 그들이 손댈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게 던전 브레이크였다.

던전 브레이크가 도심에서 터질 뻔한 사건은 절대 가볍게 넘어갈 게 아니었다.

그나마 2팀의 반이라도 던전에 들어가 던전 폐쇄에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외부 인력만으로 던전 폐쇄를 했다면, 신화 길드는 이미 간판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곽마권은 경일을 잡을 때까지 무슨 짓을 해서도 신화 길드를 지킬 생각이었다.

‘이 사건의 실질적인 원흉은 사과 장수인 거나 마찬가지야. 그놈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이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었어. 이만큼의 손해를 입었는데, 절대 포기할 수는 없지.’

그는 오히려 경일을 더 간절하게 잡고 싶어 했다.

그가 첫 번째로 한 것은 길드의 1팀을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인 일이었다.

자신이 길드에서 가장 강한 헌터라 해도 그는 혼자였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손발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고, 1팀이 그런 역할에 딱 맞았다.

곽마권은 1팀을 수족처럼 거느리며 거슬리는 이들을 숙청했다.

그의 철혈정치에 몇몇 헌터는 본보기로 갈려 나갔다.

나머지 헌터들은 최준서와 하지호같이 희생만을 강요당했다.

이 와중에도 곽마권은 경일을 찾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헌터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자기의 수준에 맞지 않는 던전임에도 길드원들과 함께 들어갔다.

겉에서 보기에 신화 길드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원들이 똘똘 뭉쳐 극복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심각하게 곪고 있었다.

곽마권은 재래시장에 있었다.

오늘만 해도 네 번째로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오늘도 없는 거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암시장에 던전 사과가 풀렸다는 이야기가 없는 거로 봐서는 여전히 재래시장에서 장사하고 있다는 건데. 제길, 5팀장의 마누라가 발견했을 때 잡았어야 했어. 그때 내가 직접 움직였어야 했는데. 부길드장이란 놈이 그런 간단한 일 하나 처리 못 하다니…….”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번 더 시장을 돌았다.

하지만 여전히 사과 장수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때 위협을 눈치챈 건가? 설마 장사를 그만둔 건 아니겠지? 아냐, 절대 그럴 일은 없어. 눈앞에 돈이 있는데 외면한다고? 아직 살면서 그런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쉽게 버는 돈은 쉽게 쓰기 마련이야. 그럼 분명 다시 던전 사과를 팔러 시장에 기어 나올 거야. 하여간 대단한 새끼네. 이 정도로 돌아다녀도 꼬리를 못 잡은 거 보면 무척 운이 좋거나, 아주 치밀한 새끼라는 이야기인데…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더 많았으면 벌써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겨우 이 인원으로 전국의 재래시장을 다 감시할 수도 없고. 미쳐 버리겠네.”

곽마권은 눈을 찡그리고 주위를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2팀 사건이 터지고 길드에 많은 인원이 줄었다.

2팀 전부는 자신이 손수 병신으로 만들었고, 1팀은 자신이 좋은 조건으로 감싸 안았다.

1팀은 경일을 찾는 일에서 제외됐다.

시장 수색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은 이제 겨우 3, 4, 5팀뿐이었다.

던전 폐쇄에 투입된 헌터들을 제외하고 나면 몇 명 되지도 않았다.

적은 인원으로 전국의 시장을 둘러봐야 하는 판국이었다.

오늘 시장 수색을 나온 인원은 자신을 포함해서 겨우 여덟 명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수색에 참여한 헌터들이 열심히 하는가였다.

자신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을 텐데, 이들이 열심히 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힘으로 헌터들을 찍어 누른다고 해도 안 보이는 곳까지 간섭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길드 사정은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는데, 찾는 사과 장수는 보이지 않으니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부길드장, 부길드장!”

시장 중앙에서 곽마권이 큰 소리로 이성호를 불렀다.

그의 큰 목소리가 시장 바닥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라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사람들은 곽마권의 화난 얼굴을 본 순간,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빠르게 자기 갈 길을 갔다.

‘저 미친 새끼가 전화를 하면 되지. 이렇게 사람 많은 시장에서 저게 뭐 하는 짓이야. 못 배워 먹은 거 티내는 것도 아니고.’

이성호는 2팀의 사고 이후, 아예 곽마권의 수행 비서가 되었다.

말만 부길드장이지,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시장을 수색하는 인원은 유동성 있게 바뀌었는데, 그는 고정이었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시도 때도 없이 그의 모든 짜증을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염병할, 내가 무슨 짜증 인형이냐고?’

이성호는 살이 빠져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얼마나 갈굼이 심했는지 그는 하루하루 말라 갔다.

멀리서 곽마권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걷다 곽마권이 자신을 보는 것을 깨닫자 빠르게 걸었다.

“이 새끼야, 왜 이리 꾸물대는 거야. 불렀으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거 아니냐. 보니까 너 일부러 천천히 걸어오다가 내가 보니깐 빠르게 걷던데. 부길드장이라는 놈이 행동을 그따위로 하니까 길드의 기강이 엉망이잖아. 죽고 싶어?”

“아닙니다.”

이성호가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아이처럼 혼나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들어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부길드장이라고 나름대로 대우를 해 줬는데, 이렇게 밖에 못 하겠어? 오늘 제대로 한번 죽어 볼래?”

곽마권이 이성호를 마구 윽박질렀다.

이성호는 부끄러운 마음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어쩌다가 저놈의 꼬임에 넘어가서 이런 개망신을 당하는 거야. 길드에 들어가기 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잘해 줄 것처럼 나를 꼬시더니… 그때 도장을 찍은 내 손을 잘라 버리고 싶다. 나도 나름 큰소리치고 잘 살았는데… 이게 뭐야? 제기랄. 쪽팔려 죽겠네.’

모멸감에 눈가가 촉촉이 젖어 갔다.

그런 이성호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곽마권은 계속해서 폭언을 쏟아 냈다.

“이 작은 시장을 수색하는데 도대체 시간을 이만큼이나 잡아먹는다는 게 말이 돼? 너 때문에 다음 시장에 갈 스케줄이 꼬였잖아. 그놈이 다음 시장에 있을 수도 있는데, 너 어떻게 책임질래? 엉?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곽마권이 이성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계속 밀었다.

그는 한 발짝 뒤로 밀려날 때마다 곽마권의 앞으로 다시 똑바로 서야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논리야? 미리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지금 책임지라니. 뭐, 이런 개 같은 놈이 다 있어.’

이성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의 폭언을 온몸으로 뒤집어썼다.

곽마권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길드의 어느 누구도 그의 곁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길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이리저리 로비하러 다녔다.

던전에도 가고, 시장도 돌고,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게 지냈다.

돈은 갈수록 부족했다.

로비에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았다.

계약을 고쳐 가며 헌터들에게 갈 몫을 짜냈어도 돈은 늘 부족했다.

와장창창창창!

길드장실의 집기가 온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저 새끼, 또 지랄이네.’

길드장실의 문밖에서 대기 중인 이성호는 한심하다는 듯이 길드장실을 쳐다봤다.

곽마권은 나날이 쌓여 가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한 번씩 이런 식으로 폭발했다.

“으아아아아! 이 개새끼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너 잡히면 내가 처참하게 죽여 버릴 테다!”

경일은 곽마권의 마음속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보다 더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화를 주체하지 못해 벌름거리는 코.

누가 봐도 미쳐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경일이 가진 던전에 대한 욕망은 커져만 갔다.

이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를 움직이는 건 경일이 가진 던전에 대한 집착이었다.

길드원들의 불만은 매일매일 커져 갔다.

자신의 친위대로 키운 1팀에서도 서서히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갈수록 나빠지는 상황에 곽마권의 눈은 늘 충혈되어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먼저 쓰러지겠다.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가서 쉬자.”

그는 몸과 정신이 한계가 온 걸 깨닫고 오래간만에 집으로 갔다.

늦은 밤이라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시내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집은 도시 외곽에 있어 거리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한 번의 커브를 돌고 나면 자신의 집이 보일 터였다.

곽마권은 커브를 돌자마자 자신의 차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브레이크의 파열음이 조용했던 거리를 관통했다.

차에 분명 충격이 전해졌으나, 그는 차에 치인 사람은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이 상황이 짜증 날 뿐이었다.

“씨발, 이건 또 뭐야?”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차에서 내리며 소리를 질렀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자신을 화나게 한 것을 찾았다.

차 앞에는 사람 모양의 인형이 터져 모래가 삐져나와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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