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습격
그 모습을 보고 곽마권은 질문할 생각을 버렸다.
아니, 굳이 지금 묻지 않아도 됐다.
몇 분 뒤에 저놈이 스스로 말을 하게끔 할 자신이 있었다.
이건우가 곽마권을 도발하려고 한 말들이 오히려 그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의 눈빛이 냉정함을 되찾았다.
‘내가 먼저 흥분하면 진다. 저놈들이 아무리 만만해도 다섯 명이야. 이 싸움은 무조건 이겨야 하는 싸움이다. 내 생명뿐만 아니라 남은 인생의 미래까지 걸려 있어. 사과 장수의 꼬리를 잡을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잘된 일일 수도 있다.’
곽마권이 침착하게 이들을 살폈다.
누가 더 긴장했는지, 누가 방심했는지, 가장 약한 이는 누군지, 그들의 작은 움직임, 내쉬는 호흡, 풍기는 분위기 등 사소한 거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분석했다.
그의 기세가 달라지자 헌터들이 긴장했다.
자신들의 수가 많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자신들은 한 마리 개였고, 그에 비해 곽마권은 산중의 호랑이였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섯 마리의 개가 흉포한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렇게 자신감을 드러낸 이유는 갑옷과 무기의 유무였다.
이곳이 던전이 아닌 이상, 곽마권은 양복에 맨손 차림이었다.
누구나 입고 싶어 하는 고가의 명품 양복,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붉은 색의 수제 구두는 이곳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에 반해 헌터들은 갑옷에 각자의 무기까지 완벽하게 무장을 한 상태였다.
이들은 이런 조건이라면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다 오늘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곽마권은 맨몸으로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포식자 앞에 던져진 꼴이었다.
그가 헌터들에게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오른손을 허리 뒤로 돌렸다.
다섯 명의 헌터는 그의 행동을 집중해 보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대치했을 때, 싸움은 이미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무기가 없다고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높은 레벨의 헌터이기에 얕잡아 볼 수는 없었다.
그의 주먹은 투구를 으스러뜨리고, 머리를 수박처럼 터뜨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허리 뒤로 간 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 짧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곽마권은 자세히 보라는 듯이 단검을 어깨 앞으로 들어 올리고는 아주 천천히 칼집에서 뽑았다.
날카롭게 날이 선 단검이 예기를 흘렸다.
한눈에 봐도 좋은 칼이었다.
칼날의 길이가 족히 30㎝는 넘어 보였다.
저 정도 길이의 단검이면 자신들의 몸을 관통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단검을 보는 순간, 헌터들이 당황한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거친 삶을 살아온 곽마권은 던전 밖에서도 늘 단검을 옷 속에 숨기고 다녔다.
실제 많은 습격을 받아 온 터라 단검을 들고 다니는 건 그의 오래된 습관과도 같았다.
이들은 곽마권의 정확한 레벨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정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건, 저레벨의 헌터가 레벨 업을 한 걸 자랑한다고 하는 짓이지, 고레벨의 헌터는 절대 자신의 레벨을 밝히지 않았다.
곽마권이 대충 30대 초반 정도의 헌터가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헌터의 손에 작지만 분명한 무기가 쥐어져 있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진정해. 작은 단검일 뿐이야. 저놈이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우리는 다섯 명이야. 그리고 나를 믿어. 내 레벨이 29야. 저놈은 갑옷도 없이 겨우 단검 하나 들고 있을 뿐이고. 저 정도는 충분히 정면에서 막을 수 있어. 내가 막는 동안 뒤에서 저놈을 공격하기만 하면 돼. 저놈이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는 이상 절대 못 막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원래의 계획대로 하면 돼.”
허태윤이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 빠르게 헌터들의 동요를 가라앉혔다.
그의 레벨은 26이었다.
하지만 팀장의 경력이 적지 않은 이상, 싸움에서만큼은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지금도 그의 말에 헌터들은 곧바로 동요를 가라앉혔다.
이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허태윤이 앞에서 곽마권을 상대하는 동안 네 명의 헌터가 사방에서 그를 공격하기로 했다.
누구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곽마권이 생각지도 않은 단검을 꺼내는 바람에 헌터들의 긴장이 높아졌지만, 작전이 변경될 만큼의 위협은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강해도 정면에서 허태윤을 상대하면서 네 명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주 작은 가시에 찔려도 행동에 지장을 받는 게 인간의 몸이다.
갑옷도 없는 맨몸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기 힘들었다.
허태윤이 장검을 들고 곽마권의 정면에 섰다.
양손으로 장검을 잡은 자세가 살짝 어색했다.
장검은 그가 주로 쓰는 무기가 아니었다.
방패와 한 손 검이 그의 주무기였다.
그런 그가 장검을 잡은 것은 곽마권과의 거리를 좀 더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곽마권이 무기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방패가 굳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장검이었다.
허태윤의 지시에 따라 네 명의 헌터들의 곽마권을 둘러싸며 적당한 위치를 잡았다.
“간다!”
기합 소리와 함께 먼저 공격한 건 허태윤이었다.
오른쪽 다리를 힘차게 앞으로 뻗으며 긴 장검을 곽마권의 심장을 향해 내질렀다.
그의 손속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길.”
곽마권은 눈에 빤히 보이는 공격인데 방어하기가 애매했다.
짧은 단검으로 묵직한 장검을 쳐 내기가 망설여졌다.
잘못하다가 단검이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전투 중에 잡생각은 금지였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결과로 그의 팔뚝에 장검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갑옷을 입고 있었으면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을 테지만, 입고 있는 얇은 재킷은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푸하하하하하!”
“호호호호!”
“저 새끼, 쫄았어.”
“졸라 가오 잡고 다니길래 센 줄 알았더니, 별거 아니었네. 겨우 저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일 줄이야. 저거 순 사기꾼 새끼였네!”
고레벨답지 않은 어설픈 몸놀림에 헌터들은 빵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걱정할 거 없다고 했지.”
허태윤은 자신의 공격이 성공하자 한껏 고무되었다.
설마 저런 단순한 공격에 상처를 입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팔뚝에서 피를 흘리는 곽마권을 보며 이들은 마음껏 비웃었다.
단 한 수를 나누었을 뿐인데, 이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곽마권은 화가 난 듯 찢어진 재킷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분명 표정은 흥분한 듯 보였으나, 그의 눈빛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 한 수는 곽마권에게도 의미가 컸다.
비록 당황해서 다치기는 했으나, 허태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파악할 계기가 됐다.
그에 반해 이들은 자신의 정확한 실력을 몰랐다.
그저 머릿속에서 강하다고만 인식되어 있을 뿐이다.
곽마권은 자신의 첫 공격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 다시 시작해 보자.”
자신감이 붙은 허태윤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를 따라 네 명의 헌터가 다시 한번 곽마권을 사방으로 둘러쌌다.
아무리 자신보다 레벨이 한참 낮은 헌터들이라고 해도 느껴지는 압박감은 상당했다.
느리고, 힘이 약하다고 하지만, 이들의 공격으로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
이런 싸움에서 필승의 방법은 한 가지였다.
가장 약한 상대를 먼저 공격해서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이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수를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곽마권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떤 공격이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을지 생각하던 그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준비해라.”
허태윤이 헌터들과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사인을 보냈다.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헌터들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무작정 자신이 공격을 들어가면 남은 헌터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질 확률이 높았다.
그의 말에 네 명의 헌터들이 상체를 살짝 숙이며 자세를 잡았다.
“간다!”
허태윤의 짧은 외침과 함께 곽마권을 향해 다섯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갔다.
곽마권은 오로지 가장 위협적인 허태윤의 공격에만 집중했다.
그의 예상대로 허태윤의 공격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이미 조금 전 타이밍을 읽은 터라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했다.
그 순간, 그는 강하게 바닥을 차면서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헉!”
최준서의 입에서 놀란 신음이 튀어 나왔다.
곽마권이 자신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에 기겁했다.
자신이 공격받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윽!”
곽마권은 자신의 등을 베고 지나가는 칼의 고통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찢어진 셔츠 사이로 길게 갈라진 피부가 보였다.
다행히 깊지 않은 듯 뼈가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이들보다 아예 수준이 다르다고 평가받는 헌터라고 해도 안 보이는 사각의 공격을 감각으로만 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두 명이면 몰라도 네 명의 공격을 모두 피한다는 건 자신이라도 힘들었다.
총 세 개의 공격을 피해 냈으니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최준서는 공격해 오는 곽마권의 기세에 놀라 공격하던 칼을 급하게 멈추고 빠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별 의미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곽마권의 공격을 최준서가 막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곽마권의 단검이 빠르게 최준서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갔다.
평소 쓰던 무기였으면 이미 심장을 관통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단검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 차이일 뿐 최준서의 심장이 뚫린다는 것에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됐다.”
공격의 성공을 확신한 순간 뇌가 경종을 울렸다.
불길함이 엄습한다.
야수의 이빨이 목덜미에 닿는 느낌.
“이런.”
곽마권은 급히 하려던 공격을 멈추고 슬라이딩하듯 몸을 던져 바닥을 굴렀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허태윤의 장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씨발,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아무리 네가 레벨이 높다고 해도 그렇게 훤하게 등을 보이는 건 그냥 죽여 달라는 거잖아.”
곽마권이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깔끔했던 그의 머리카락이 중구난방으로 뻗쳐 있고, 새하얗던 셔츠에 누런 때가 묻어 있었다.
이번 공격은 아주 중요했다.
이들이 자신감이 넘쳐 방심하고 있을 때, 허를 찌르려고 한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자기 생각을 들켰으니 다음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자신의 무기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작은 아쉬움이 들었다.
분명 곽마권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지만, 변수는 어디에도 존재했다.
그의 짧은 단검과 생각보다 빠른 허태윤의 반응에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몸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의 투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이 정도에 마음이 꺾기에는 그가 겪어 온 수라장이 너무 많았다.
경험은 그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무기였다.
곽마권의 공격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태윤을 제외한 네 명의 헌터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기에 충분한 공격이었다.
이들은 단검이 분명 최준서의 심장 바로 앞에까지 도달한 모습을 봤다.
찰나였다.
허태윤의 공격이 0.5초만 늦었어도 최준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상처를 입으면서도 몸을 날리는 곽마권의 용맹한 모습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조금 전과 다르게 이들은 웃지 못했다.
곽마권을 조롱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