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악운
“걱정하지 마. 충분히 내가 대처할 수 있어. 봤잖아. 준서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았어. 그러니 작전대로 하기만 하면 돼.”
허태윤은 당황한 헌터들을 달래며 용기를 주려 노력했다.
“쫄지 마. 저놈을 봐. 벌써 칼침을 두 방이나 맞았어. 우리 공격이 충분히 통한다는 증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우리가 훨씬 유리해. 저놈을 죽이고 좆같은 신화 길드에서 얼른 나가자고.”
이건우가 기합을 다지며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둘의 노력이 통했는지 헌터들의 기세가 조금이나마 다시 올라왔다.
단단한 얼굴과는 달리 이건우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조금 전 곽마권의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싸우기 전 곽마권을 가장 심하게 약 올리고 놀린 게 자신이었다.
특히 사과 장수까지 언급하지 않았는가.
만약 지기라도 한다면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곤란해질 거 같았다.
이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덤벼, 이 새끼들아.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이번 공격에 한 놈은 꼭 죽이고 만다. 이미 네놈들의 전력을 모두 파악한 이상, 한 놈은 분명히 죽는다.”
곽마권의 강한 기세가 이들을 옭아맸다.
그의 눈빛에 단단히 서려 있는 독심은 안정되어 가는 이들의 마음에 지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분명 이기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싸움의 분위기는 곽마권이 잡고 있었다.
자신들의 전력이 훨씬 높았다.
100번 싸우면 100번 다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분명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전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승리한들 자신이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희생으로 이기는 싸움은 곤란했다.
곽마권이 들고 있는 단검이 왠지 더 길어 보였다.
이 중에 유일한 여자이고, 나이가 가장 어린 이다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이들은 처음 계획을 세울 때, 곽마권이 무기가 있을 거란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기도 했고.
그런데 그의 허리춤에서 단검이 나오면서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어 갔다.
분명 자신들이 이기고 있는데, 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겁먹지 마. 저건 다 허세야. 말로 기죽이는 거야. 마음에서 지고 들어가면 절대 안 돼. 여기서 마음 약해지면 다 죽는 거야.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죽고 싶어?”
허태윤이 다시 한번 사기를 북돋으려 노력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죽을 확률이 적은 건 허태윤이었다.
그런 그의 말은 이들의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이건우가 또다시 나섰다.
“우리가 이기고 있잖아. 아무도 안 다치고 이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저놈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겨우 입으로 우리를 기죽이고 있을 뿐이야. 쫄지 마. 얼른 해치우고 시원한 맥주나 한잔하자.”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이건우가 소리치며 성큼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두려웠지만, 승리가 간절해진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확실히 이들의 가슴에 닿았다.
이건우의 용기 있는 모습에 동요된 헌터들이 곽마권을 다시 에워쌌다.
‘씨발, 이건우 저놈이 문제네. 유리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어. 저 새끼는 내가 꼭 입을 찢어 놓고야 만다. 아, 안 되지. 사과 장수를 어디서 봤는지 물어는 보고 찢어야지.’
곽마권은 자신의 의도가 먹히지 않자 화가 났으나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조금 전과 같이 헌터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상처 입은 곳이 화끈거렸다.
그는 잠시 도망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모든 걸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만약 자신이 도망간 게 길드원들에게 알려지면 끝장이었다.
그의 권위가 순식간에 추락할 건 불 보듯 뻔했다.
지금까지 그의 힘에 눌려 있던 헌터들이 모두 들고 일어날 것이다.
이 바닥은 한 번 우습게 보이는 순간 끝이다.
무조건 이놈들을 죽이고, 자신이 살아남아야 했다.
자신이 불리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되든 안 되든 지금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준비해.”
허태윤이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네 명의 헌터들도 허태윤의 지시에 공격 자세를 잡았다.
조금 전과 똑같은 공격 패턴이지만, 파훼법이 없는 이상 곽마권은 계속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응?’
같은 패턴인데 분명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곽마권은 그 점을 빠르게 알아챘다.
“가자.”
곽마권의 정면으로 장검이 날아들었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건 정면이었다.
허태윤의 얼굴에 작은 당혹감이 스쳤다.
설마 자신에게 덤벼들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곽마권이 알아낸 건 다름 아닌 자신과 네 명의 헌터들과의 거리였다.
지금까지 그의 행동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살을 주고 뼈를 취한 공격 방법은 이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었다.
혹시나 자신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에 그들은 조금 전보다 곽마권과의 거리를 더 크게 벌렸던 것이다.
이건 기회였다.
곽마권은 이전 공격 방법이 통하지 않은 이상, 허태윤을 칠 생각이었다.
하늘이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좋은 기회를 잡았다.
“이 새끼야, 죽어!”
곽마권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허태윤에게 일직선으로 달려들며 강하게 고함을 질렀다.
달려드는 그 기세가 하도 흉흉해 허태윤이 살짝 질린 기색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태윤의 귀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이었다.
곽마권을 향해 장검을 내지르던 허태윤이 살짝 움찔거렸다.
안 그래도 평소 쓰는 무기가 아니라서 거북한 느낌이 있었다.
거기다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찰나지만 몸이 굳은 건 아주 커다란 실수였다.
곽마권은 그런 기회를 놓칠 인간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헌터들과 목숨을 건 싸운 경험이 가장 많은 게 바로 그였다.
푸욱!
“아악!”
곽마권의 단검이 허태윤의 팔꿈치 갑옷 이음새 사이를 찔렀다.
그는 순간 장검을 놓칠 뻔했지만, 급하게 손에 힘을 주고 잡았다.
“으윽!”
그 순간 곽마권의 등이 뜨끔했다.
최대한의 감으로 네 명의 헌터들의 공격을 피해 봤으나,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은 이상 모두 피하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상처를 덜 입을 수는 있었다.
등에 칼이 닿는 느낌과 함께 빠르게 몸을 뺐다.
복싱에서 상대 주먹이 얼굴에 닿은 순간 고개를 빠르게 틀어 충격을 줄이는 것과 같은 기술이었다.
곽마권은 재빠르게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들을 모두 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였다.
이번 공격을 성공시킨 이건우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그에 반해 허태윤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방금 곽마권의 공격에 상처를 입긴 했으나, 헌터인 이상 이 정도의 상처는 달고 살았다.
그런데 상처에 비해 너무 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상한데. 저 새끼 조금 전 공격에서 분명 몸을 움찔했어. 거기다가 크게 당황한 듯한 저 모습은 뭐지?’
가장 먼저 허태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건 곽마권이었다.
허태윤은 곽마권의 공격이 자신에게 오자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사정거리가 네 배나 더 긴 장검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훨씬 유리한 싸움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곽마권에게만 집중할 수 있지만, 곽마권은 등 뒤의 공격에도 신경 써야 했다.
굳이 자신은 공격을 성공시키지 않아도 충분했다.
약간의 시간을 벌기만 하면 네 개의 은밀한 칼이 곽마권을 난도질 할 테니.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 상처를 입은 건 허태윤이었다.
이건 공격하는 도중 그의 몸이 움찔거리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태윤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곽마권을 죽이고 싶어 했다.
그런 그가 공격을 망설이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허태윤은 자신이 움찔거릴 수밖에 없던 이유를 곧 알았다.
그는 그 이유를 치열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그의 몸은 더 떨려 왔다.
그 이유는 바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곽마권이 자신에게 내지르는 화난 목소리가 그날의 악몽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그때의 고통과 상처는 그의 영혼에 아로새겨졌다.
가장 오랜 시간 맞은 것도 자신이었고, 가장 많이 맞은 것도 자신이었다.
허태윤은 그날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복수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마음의 상처도 깊었다.
하필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 마음의 상처가 터져 버렸다.
“허태윤 이 새끼야~”
곽마권이 갑자기 피어를 지르듯 허태윤을 향해 소리쳤다.
얼굴이 허옇게 뜬 허태윤이 놀라 또다시 움찔거렸다.
곽마권은 생각이 곧바로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의 얼굴에 진한 웃음이 걸렸다.
“프하하하하하하! 이런 멍청한 새끼. 이러니 네놈이 안되는 거야. 꼭 너 같은 놈이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거든. 이렇게 완벽한 기회를 잡고도 놓쳐 버리다니. 이게 네놈의 한계야. 내가 그날 분명히 말했지. 넌 멍청하다고. 넌 헌터의 자질은 남들보다 뛰어나지만, 네가 가진 그릇은 남들 반도 되지 않아. 그게 네놈의 한계인데. 팀원들이 받들어 주니 네가 무슨 뭐가 되는 양 착각 속에 산 거지. 사자의 탈을 쓴 개새끼라고나 할까. 그냥 살려 줄 때 곱게 이 바닥을 떠났어야지. 꼭 분에 넘치는 짓을 하다 제 손으로 무덤을 판다니까.”
칼을 맞댄 곽마권은 허태윤의 이상행동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움찔하는 순간부터 이상했는데, 겁에 질린 얼굴을 보자 무언가가 떠올랐다.
곽마권은 허태윤과 같은 모습은 평소 많이 봐 왔다.
그에게 심하게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보여 주는 반응이었다.
평소 그런 모습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싸움의 가장 강한 무기가 고장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자신이 다시 한번 버럭 고함을 지르기라도 한다면 허태윤은 오줌을 지릴지도 몰랐다.
네 명의 헌터는 곽마권의 말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 격돌로 허태윤이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상처는 몬스터를 상대하다 보면 늘 달고 살았다.
오히려 곽마권의 등의 상처가 더 깊었다.
그런데도 허태윤은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고, 곽마권은 승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곽마권은 빠르게 움직였다.
승기를 잡은 이상,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가 달려간 곳은 처음 공격에 실패한 최준서였다.
“헉!”
최준서가 놀라 신음을 흘렸다.
그는 느닷없는 곽마권의 공격에 놀라기는 했으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조금 전, 이 상황에서 허태윤이 막아 주지 않았던가.
오히려 자신이 미끼가 되어 곽마권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허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곽마권의 등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 그는 병신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뭐 해? 2팀장, 뭐 하냐고?”
허태윤이 가만있는 모습에 최준서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미친!”
“안 돼!”
“준서야!”
상황을 파악한 하지호, 이건우, 이다은이 죽을힘을 다해 뛰어들었지만, 곽마권을 막지는 못했다.
“이 새끼들아. 다시 한번 그 잘난 주둥이를 한 번 놀려 봐.”
곽마권이 최준서의 뒤에 서서 팔로 목을 조이고 있었다.
최준서가 잡힌 모습에 이들은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거라 이들은 크게 당황했다.
“잠깐만, 잠깐만.”
최준서의 팀 동료이자 친구인 하지호가 급하게 말을 뱉었다.
하지만 곽마권은 하지호의 다급한 외침을 무시했다.
“헉!”
짧은 비명이 터졌다.
곽마권이 최준서의 옆구리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새빨간 피가 단검을 타고 흘렀다.
땡그랑!
목을 잡히고도 놓지 않던 그의 칼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새끼야, 뭐 하는 짓이야. 그 손 놓지 못해?”
곽마권을 가장 심하게 비웃던 이건우가 욕을 하며 그를 협박했다.
“허~ 나 참! 허태윤만 멍청한 줄 알았더니 데리고 온 놈도 똑같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거 보니 이건 더 멍청한 새끼야.”
“아아악!”
곽마권이 옆구리에 박아 넣은 칼을 비틀자, 최준서의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 살… 살려 주…세요. 잘… 잘…못…했…습니…다.
최준서가 고통에 허우적거리며 제대로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이며 빌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