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턱도 없다
“제발, 죽이지 마세요. 길드장님, 준서 한 번만 살려 주세요. 앞으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길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하지호가 친구를 위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 모습에 이다은은 창백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봤다.
순식간에 변한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여기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살려 줄 놈이 아니야. 최준서는 안타깝지만 무시하고 우리끼리라도 공격해야 해.’
이건우는 상황을 냉정하게 보려 노력했다.
이들 중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는 그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음을 터뜨리는 하지호의 모습에 최준서를 무시하고 공격하자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 가장 먼저 결정을 내려야 할 2팀장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이건우는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허태윤을 노려봤다.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한눈에 보기에도 허태윤의 모습은 이상했다.
조금 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지금은 거의 폐인 같았다.
그의 얼굴엔 절망이 떠올라 있었다.
짧은 시간에 그의 얼굴은 확연히 늙어 보였다.
순간,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곽마권한테 복수할 수 있다면 지옥의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 수 있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떨고 있었다.
억지로 자신의 몸을 통제해 보려 하고 있지만, 그의 동공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과 분노로 점철된 그의 찌푸린 얼굴은 모든 번뇌를 짊어진 듯 복잡해 보였다.
푹, 푹, 푹, 푹, 푹!
순식간이었다.
곽마권이 최준서의 몸 여기저기에 칼침을 놓은 건.
“커억!”
최준서의 입이 떡 벌어지고 진득해 보이는 새빨간 피가 입을 타고 울컥울컥 넘어왔다.
털썩!
그가 생기 없는 얼굴로 쓰러지자 곽마권이 재빨리 그의 칼을 들고 허태윤을 향해 뛰었다.
“뭐 해? 공격해!”
이건우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 어, 어, 어, 어.”
그는 붕어처럼 입만 뻐금거렸다.
허태윤의 복잡해 보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단 한 가지 감정만 떠올랐다.
당혹감이었다.
챙!
그는 본능적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지 말라는 뜻이 담긴 약자의 작은 반항일 뿐이었다.
곽마권은 최준서의 칼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았다.
그에게 제대로 된 무기가 쥐어진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자 곽마권은 장검의 날을 따라 자신의 칼을 밀면서 재빨리 허태윤의 품에 파고들었다.
키킥킥키기킥!
철판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칼날이 부딪치며 작은 불꽃이 튀었다.
허태윤과 거리가 불과 1m도 남지 않았을 때, 그의 왼손에 들린 단검이 움직였다.
“헉!”
허태윤의 입에서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곽마권이 갑옷의 한 점에 힘껏 단검을 찔러 넣었다.
손에 갑옷의 저항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곽마권이 전신에 힘을 실으며 찌른 단검은 단단한 갑옷을 뚫고 들어와 허태윤의 배에 깊숙이 박혔다.
“으아아아아악!”
불에 지지는 듯한 강렬한 통증에 허태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처음으로 곽마권의 입가에 아주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그 웃음을 본 허태윤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날, 그를 벌레 밟듯 밟고 나서 보여 주던 그 웃음이었다.
이대로 멍청하게 가만히 있으면 분명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의 몸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막다른 곳에 몰린 고양이 앞의 쥐 같이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의 이성은 허태윤에게 움직이라고 끊임없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에 몸에 심어진 그날의 공포는 이성의 명령을 거부해 버렸다.
이 모습에 가장 놀란 건 이건우와 이다은이었다.
하지호는 친구의 죽음에 망연자실해 있었고, 이 둘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달아날 준비를 했다.
먼저 움직인 건, 이 상황에서 가장 겁을 먹고 있던 이다은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땅을 박차고 뛰었다.
그 모습에 흥분해 있던 이건우가 정신을 차리고 달아났다.
하지만 짧은 거리에서 자신보다 10레벨 이상 차이 나는 헌터의 손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악!”
이다은이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등에는 어느새 날아온 단검이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단검을 던진 후, 곽마권은 곧바로 이건우의 앞을 막아섰다.
“제기랄!”
이건우의 입에서 자조적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곽마권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제법이야. 이 상황에서도 반항할 생각을 하다니.”
“흥! 네놈은 절대 우리를 살려 줄 놈이 아니야. 넌 내가 멍청한 저놈처럼 빌기를 원하겠지만, 난 절대 빌지 않겠어. 죽더라도 네놈의 팔다리 하나는 꼭 가지고 갈 테니,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건우는 비참하게 죽은 최준서와 죽어 가는 허태윤과 이다은을 흘깃 쳐다보고는 강하게 다짐했다.
“네놈이 지금 왜 상처 하나 없이 서 있는 줄 알아? 내가 저년에게 단검을 던지고 너를 쫓아온 이유를 잘 알 거야. 넌 이대로 몸 성히 돌아갈 기회가 있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곽마권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 이건우를 협박하듯 단번에 하지호의 목을 베었다.
몸과 떨어진 하지호의 머리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더러운 땅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이건우는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곽마권의 눈빛에 서린 살기를 봤기 때문이다.
그의 스킬은 관찰이었다.
전투에서 크게 도움이 되는 스킬은 아니었다.
가끔 던전 속에 설치된 함정을 파악하거나 할 때 도움이 되고 했으나, 그가 주로 다니는 F, E급 던전에서 함정을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이 관찰이라는 스킬은 오히려 일상생활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상대의 변화를 빠르게 알아챈다거나, 몽타주로 경일을 알아본 거 같은 그런 일에 도움이 되었다.
이건우가 경일을 본 건 동네 분식과 가까운 시장이었다.
경일이 던전에서 가져온 재료 외에 필요한 걸 사기 위해 가는 시장이었다.
만두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시장에 갈 일이 잦아졌다.
신선한 돼지고기를 사기 위해서였다.
이건우가 경일을 본 날은 그의 기분이 무척이나 안 좋았다.
급한 일이 생겨 시장에 가는 것을 빼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욕뿐이었다.
결국, 길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시장 수색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돼지고기를 사는 경일을 봤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몽타주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찰이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그는 몽타주와 경일의 얼굴을 한 부분, 한 부분을 떼서 비교했다.
전체적인 느낌은 달랐으나, 부분 부분은 모두 일치했다.
그리고 들었던 대략적인 그의 키와 몸무게 등 모든 것을 대입해 본 결과, 경일이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찾았다.”
이건우는 경일을 찾은 순간 기뻤다.
보고하기 위해 핸드폰을 드는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 내가 왜 저놈을 찾은 것을 보고해야 하지?’
머릿속으로 강하게 밀려드는 생각이었다.
‘길드장이 뭐가 예쁘다고 보고를 하냐? 오늘 아버지가 다쳐서 병원에 가는 것도 막은 놈인데. 뭐, 안 죽었으니 시장 수색을 마치고 가라는 놈한테 내가 왜 좋은 일을 시켜 주지?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구나. 지금까지 시장 수색에 불려 나와 밥 한 번 얻어먹은 적도 없는데, 괜한 짓을 할 뻔했어. 그냥 이대로 시간이나 때우고 들어가야겠다.’
그는 경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외면해 버렸다.
경일은 방금 자신이 죽었다 살아나는 행운을 누렸다.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억지로 끼어 맞추면 이건우는 경일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반면 곽마권의 입장에서는 그가 그렇게 바라던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꼴이었다.
평소 길드원들을 조금이나마 인간적으로 대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날 시장 수색은 평상시와 같이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끝이 났다.
이날 이후로 이건우는 길드장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이 경일을 봤다고 외치고 싶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길드장이 사사로운 일에 자신이 동원될 때마다 그는 직접 그의 귀에다 대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온갖 잘난 체하는 그놈의 귀에다 직접 말하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겠지? 아~ 입이 간지러워 미치겠네.’
그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속에 담아 두었다.
그러다 오늘 기회가 온 것이었다.
곽마권의 바로 앞에서 이 사실을 전하는 순간,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에 전율을 할 지경이었다.
특히 곽마권이 궁지에 빠진 이런 퍼펙트 한 순간에서 말하자 쾌감은 배가 되었다.
오랜 기간 짝사랑하던 첫사랑의 여인과 처음 잠자리를 가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쾌감이었다.
처음 이 일에 참여하자는 최준서의 요청에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곽마권의 앞에서 말할 기회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참석한 것이었다.
“사과 장사를 어디서 봤는지만 말해 주면 넌 이대로 보내 주겠다. 길드에서도 몸 멀쩡하게 나가게 해 주지. 어때, 이 정도면 너도 충분히 만족할 거 같은데.”
곽마권이 망설이는 이건우에게 다시 한번 확답을 주었다.
사실 곽마권은 이건우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싸우기 전 이건우가 자신을 약 올리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치욕을 당하고도 살려 줄 정도로 그는 호인이 아니었다.
“흥! 내가 네놈의 말에 속을 거 같냐? 말은 달콤해도 네놈의 눈 속에 이글거리는 살의를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해? 시장에 끌려가서 난 한 번도 사과 장수를 찾으려고 한 적이 없었어. 그런 내가 그 사과 장수를 어떻게 발견한 줄 알아? 관찰이라는 내 스킬 때문이야. 그런 내가 네놈의 삼류 배우 같은 쓰레기 같은 연기에 넘어갈 거 같아? 어림도 없다.”
“제법이네. 여긴 멍청한 새끼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똑똑한 놈도 한 놈 있었네. 그래, 네놈 말대로 살려 줄 생각은 1도 없어. 아니, 정확히는 곱게 죽여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네놈의 비아냥에 이번엔 나도 제대로 열을 받았거든. 시간이 없으니 나도 이번에 거짓말하지 않으마. 저 새끼들 보이지?”
곽마권이 허태윤과 이다은을 가리켰다.
“저놈들은 분명 죽을 거야. 내가 찌른 곳이 그런 곳이거든. 그런데 또 이게 쉽게는 안 죽을 거야. 죽을 때까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다. 심정은 또 얼마나 복잡하겠어. 한편으로는 너무 아파 죽고 싶은데 죽지도 못하고, 한편으로는 살고 싶은데 방법은 안 보이고. 넌 최소한 이런 고통은 안 겪게 해 주지. 이 정도면 내가 네놈에게 아주 큰 은혜를 베푸는 거야. 그러니 이만 말하고 고통 없이 죽어라.”
한 줄기 바람이 불어 이건우의 몸을 감쌌다.
아주 약한 바람인데 뒷머리가 쭈뼛 서며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이건우는 곽마권의 살기에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개소리 작작 지껄여. 네놈이 뭐라도 되는 양 착각하지 마. 넌 그냥 너밖에 모르는 욕심 많은 돼지 새끼야. 뭔가 베풀어 준다는 듯한 말은 집어치워. 가르쳐 달라고 빌어도 될까 말까 하는 판국에 오히려 잘난 척을 해? 턱도 없다.”
이건우가 칼을 들어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하! 이런 가소로운 새끼.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겠다면 그렇게 해 주지.”
곽마권의 눈이 파랗게 빛이 났다.
“흥! 네놈의 뜻대로 될 거 같으냐?”
이건우가 곽마권을 겨누던 칼을 자신의 목에다 갖다 댔다.
그 모습에 곽마권이 움찔 놀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