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감동의 눈물
경일이 보내 준 고철은 강한 무기로 탈바꿈했다.
고물상에서 산 고철이라고 하나, 현대의 철은 모두 강철이었다.
이 시대의 제련술로는 절대 만들 수 없다.
강철은 이 시대의 철보다 최소 몇백 년 이상 앞선 기술로 만들어졌고, 몇십 배는 더 강한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자포리자 성주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검도 강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일이 보내 준 고철로 녹여 만든 창을 보고 자포리자도 자신의 칼을 버리고 강철 창날로 된 나무창을 들었다.
가신들은 영주의 칼을 새로 만들기를 원했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자신의 칼을 만들 정도의 양이면 창날을 다섯 개나 더 만들 수 있었다.
이는 다섯 명의 영지민을 더 무장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였고, 다섯 명의 목숨을 지킨다는 말과도 같았다.
자포리자의 노력 덕에 지금 고블린을 마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영지민은 강철 창날로 된 창을 들고 있었다.
고블린은 긴 팔로 돌로 만든 성벽을 잘도 타고 올라왔다.
돌 사이의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몸에 비해 과도하게 긴 팔을 이용해 거침없이 성벽을 타고 올랐다.
그런 고블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정거리가 긴 창이었다.
아투는 성벽을 넘어오는 고블린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창을 내질렀다.
묵직한 창날이 공기를 가르고 고블린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케에엑!”
아투는 빠르게 창을 회수했다.
간단한 두 동작만으로 고블린은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성주의 호언장담은 허풍이 아니었다.
통짜 강철로 된 창날은 너무 쉽게 고블린의 몸을 뚫고 들어가 오히려 자신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창의 긴 사정거리는 안전을 보장해 주었고,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사람들의 뇌리에 이건 전투가 아니라 오히려 사냥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성벽을 올라온 고블린을 향해 창을 찔러 넣는 건 너무 쉬웠다.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는 고블린에게 가족과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아, 지금까지의 복수다. 모두 죽엇!”
창을 내지르는 일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은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지긋지긋했던 고블린이 죽어 나가자, 영지민들의 가슴이 통쾌함과 희열로 가득 찼다.
승리의 함성이 성벽을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고블린은 동료가 죽어 나가든 말든 상관없이 끝까지 덤벼들었다.
평소라면 몬스터 특유의 공격성에 질려 겁을 먹었겠지만, 오늘은 전혀 달랐다.
굳이 쫓을 필요 없이 고블린이 알아서 와 주니 오히려 기쁠 지경이었다.
성벽 위에 고블린의 시체가 켜켜이 쌓여 갔다.
200마리가 넘는 고블린을 한 시간 만에 모두 죽였다.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는 대승에 자포리자 성주가 가장 기뻐했다.
영지민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들의 두 눈에서 진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승리였던가.
통쾌한 복수였으며 앞으로 삶의 희망을 되찾은 날이기도 했다.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빛을 맞이하듯, 그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을 맞이한 날이었다.
* * *
경일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벅찬 감동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전해졌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경일의 발걸음이 씩씩해졌다.
“나의 작은 노력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다니. 이건 정말 굉장한 일이야.”
우스스.
등 뒤에 작은 소름이 일어나더니 굉장한 희열로 번져 갔다.
뇌 속에 아드레날린이 순식간에 터져 나온 듯 일평생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흥분과 행복이 온몸을 감쌌다.
“내 노력에 비해 열광적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니, 오히려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야.”
조금 전까지 리어카를 끌면서 짜증을 내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많은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에 그의 가슴이 뿌듯함으로 미어터질 거 같았다.
육체의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늘 그는 새로 태어나는 기분을 맞보았다.
세상을 바라보든 좁고 편협한 시야를 새롭게 개안했다.
말로만 듣던 고승들의 깨우침처럼 그도 이 순간 다시 태어났다.
고물상을 갔다 온 후 분식점의 문을 열었다.
오늘의 첫 손님은 이미순이었다.
“어휴, 사장님. 오래간만이에요. 사장님이 오해하실까 봐 이야기하는 건데, 오래간만에 보는 건 내 의사가 아닌 점을 분명히 밝혀요.”
이미순은 의자에 앉자마자 수다를 시작했다.
말이 많은 건 평소와 같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건 평소와 달랐다.
“사장님은 바빠서 모르시겠지만,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한 거 알아요? 그런데 우리가 왜 오래간만일까요? 하~ 슬퍼. 처음에는 사장님 장사가 잘돼서 오랫동안 이 자리에 계셨으면 했는데… 이건 잘돼도 너~무 잘되잖아요. 도대체가 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사장님 음식을 먹어 보는 것이 아닌데. 행복을 주고 뺏어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나요? 사장님. 맛있어도 적당히 맛있어야죠. 이렇게 작은 분식점에 이런 어마 무시한 맛이라니. 이건 밸런스가 너무 안 맞잖아요. 이런 맛을 아무 예고도 없이 내놓으면 어쩌란 거예요. 매일 먹고 싶은데, 먹을 수가 없잖아요. 점심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줄을 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오늘을 아예 일찍 나온 거예요. 사장님보다 제 출근 시간이 두 시간이나 느린 거 알고 계시죠. 잠을 포기하고 먹을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슬퍼요. 이곳은 분명 나만의 것이었는데… 억지로 강탈당한 듯한 이 상실감은 어떡하란 말이에요.”
이미순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듯 크게 한숨을 쉬며 슬픈 얼굴로 수다를 떨었다.
분명 자신만의 연인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만인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
경일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상대가 슬퍼하는데 바로 앞에서 웃는 건 큰 실례라.
“저기, 미순 씨? 일단 주문부터.”
경일이 조심스럽게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사장님, 이게 또 문제예요. 보통 메뉴를 늘리면 한 가지씩 늘리잖아요.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메뉴를 늘이니까 선택 장애가 생겨 버렸어요. 다 먹고 싶은데, 하나를 어떻게 고르란 말이에요. 내 배는 한계가 있는데. 혹시 전 메뉴 맛보기 그런 음식은 없어요? 아~ 오래간만에 오긴 왔는데, 뭘 먹을지 모르겠어요.”
이미순이 울상을 지었다.
“하하하, 그럼 오늘은 순두부찌개 드세요. 우울할 땐 얼큰한 게 괜찮죠.”
“네. 사장님, 그럼 순두부찌개 주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경일이 금방 순두부찌개를 만들어 왔다.
이미순이 뜨거운 순두부찌개를 급하게 입으로 넣었다.
“앗, 뜨거워.”
“조심하세요.”
경일이 빠르게 차가운 물을 가져다주었다.
“입천장을 데었어. 그런데 왜 이리 맛있지?”
“여기 찬물 좀 드세요.”
이미순이 물을 마셔 입안을 식혔다.
“미순 씨가 동네 분식의 소중한 단골이시잖아요. 그것도 첫날부터 오신 진성 단골이신데. 오늘은 미순 씨 좋아하시는 거로 몇 가지 포장해 드릴게요. 친구분들이랑 같이 드세요.”
“진짜요? 사장님 감사해요! 안 그래도 포장 판매가 없어져서 슬펐는데. 너무 감사해요.”
“제가 바빠서 소중한 단골분들을 신경 못 썼네요. 미순 씨는 귀한 단골이시니까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지 포장해 드릴게요.”
“역시! 우리 사장님이 최고라니까~ 제가 줄 건 없고, 소개팅 한 번 시켜 드릴게요. 사장님은 어떤 타입 좋아하세요? 저 같이 작고 이쁘고 귀여운 타입?”
이미순이 턱에 손 받침을 하고 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마치 초등학생이 끼를 부리는 듯한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절로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스탄다비아도 그렇고, 동네 분식도 그렇고 요즘은 모든 것이 더없이 좋았다.
김만복은 계산대에 앉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의 얼굴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다정 분식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히스테릭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일하는 직원들은 그의 곁에 가지 않으려 했다.
김만복이 평소에도 좋은 사장은 아니었지만, 경일에게 당하고 매출까지 떨어지자 그 스트레스를 모두 직원들에게 풀고 있었다.
밤잠을 자지 않으며 더 좋은 재료로 맛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노력 때문인지 빠져나가기만 하던 손님의 이탈이 멈췄다.
옛날에 비하면 어림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점심시간에 홀의 반이 차는 정도의 손님은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의 결과는 그의 노력에 관한 보상이 아니었다.
약간의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실제로는 동네 분식이 손님을 받을 수 있는 한계에 따른 결과였다.
동네 분식에서 식사가 힘들어진 손님들은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다정 분식으로 돌아갔다.
그의 노력보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까웠다.
손님의 반이 줄고, 좋은 재료로 음식을 업그레이드한 덕에 그의 수입은 형편없었다.
저번 달은 식당 직원보다 자신의 수입이 더 적었다.
자신의 인건비를 생각하면 적자였다.
“하~ 음식 맛을 높이면 당연히 손님들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처음의 계획은 맛을 높여 동네 분식의 손님을 모두 뺏어 올 생각이었다.
그런 후 동네 분식이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으면 손님들이 눈치 못 채게 조금씩 기존의 값싼 재료로 만든 음식을 팔 생각이었다.
“설마 이 방법이 안 통할 정도로 그 생초보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다니…….”
김만복은 아들이 싸 온 동네 분식의 음식을 맛보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꿈일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히 애꿎은 허벅지만 피멍이 들도록 꼬집지 않았던가.
이 방법은 그의 요식업 인생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필승의 전략이었다.
비록 마진이 줄어들긴 했지만, 경쟁 식당이 문을 닫으면 나중에 몇 배로 벌 수 있었다.
그를 가장 기분 좋게 하는 건 망해 가는 식당 사장의 얼굴을 보는 거였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침울해지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었다.
대부분의 식당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오픈하는 경우가 많아 그들의 힘들어하는 표정은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 회심의 수가 동네 분식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건 마진을 포기하고, 아니, 적자를 감수하고 최고급 재료로 쓰더라도 이길 수 있는 맛이 아니었다.
엄청난 실력의 셰프를 데리고 온다고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염병,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으면 좋은 재료를 쓰지 말걸. 괜히 식당 수입만 박살 났잖아.”
그렇다고 이전 맛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만약 이전 맛으로 돌아간다면 그나마 남은 손님들이 다 떨어져 나갈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피 같은 돈이 들어갔는데, 동네 분식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 게 너무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이 피 같은 돈은 숨만 쉬어도 계속 들어갔다.
여기까지 온 이상 하루라도 빨리 동네 분식을 망하게 하는 게 그나마 손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동네 분식을 망하게 할 방법을 찾기 위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번쩍 무언가가 그의 뇌리를 강하게 쳤다.
“이거다, 이거! 푸하하하하하! 난 역시 천재야. 그것도 아주 사악한 천재. 그럼 내가 그 녀석보다 더 산 세월이 얼만데, 이대로 무너지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지. 이제야 눈에 박힌 가시를 뽑을 수 있겠어!”
김만복은 이날부터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썼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힐 만큼 워드를 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 키보드를 보고 쓴 글을 확인한 순간, 어느샌가 눌러진 한영 키로 모니터엔 알파벳만 가득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마다 분통이 터졌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키보드를 눌렀다.
쓴 글의 오타를 고치고, 글 내용을 다듬고, 1분에 겨우 20타를 넘는 실력으로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