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헌터의 능력이야말로 농사짓기에 딱 이지
경일은 분식점을 마치고 던전으로 갔다.
그런 그가 밭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던전 땅이 너무 비옥하다 보니 이런 문제도 생기는구나. 이거 오늘 땀 좀 제대로 흘리겠는데.”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고구마를 심은 밭이었다.
땅이 비옥해 고구마가 너무 잘 자라 문제였다.
이건 고구마 밭만 놓고 보면 완전 원시림이었다.
눈앞에 싱그러운 녹색이 쫙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잘 자랐는지 고구마 줄기에 가려 땅이 아예 안 보일 지경이었다.
“이거 시작할 엄두가 안 나는데. 아니야,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이들이 굶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걸 봤잖아. 무슨 아프리카 난민보다 못하다니. 얼른 힘내서 일하자.”
경일은 낫과 호미를 들고 고구마 밭으로 들어갔다.
그의 낫이 빠르게 움직였다.
낫의 움직임에 따라 고구마 순이 숭덩숭덩 잘려 나갔다.
그동안 농사일을 열심히 한 것을 증명하듯 낫질하는 폼이 제대로 올라가 있었다.
고구마 순과 함께 자란 잡초들도 같이 잘려 나갔다.
쪼그리고 앉아 호미로 흙을 걷어 내자 자주색의 고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뿌리에 거의 스무 개 정도의 고구마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자라 있었다.
수확량이 지구보다 두 배 이상이었다.
경일은 수확한 고구마를 하나 잘라서 즉석에서 맛을 보았다.
적당히 단단한 식감에 고급스러운 단맛이 느껴졌다.
“역시 맛있네. 생고구마도 이렇게 맛있는데, 조리해서 먹으면 또 얼마나 맛있어질까? 오늘 저녁은 오래간만에 군고구마에 맛있는 김치를 곁들여 먹어야겠다. 이거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잖아. 동치미도 있으면 딱 인데. 안타깝게도 동치미가 없네. 내일은 동치미를 한 번 담가 봐야겠어. 열심히 해서 빨리 일 끝내고 맛있게 먹어야지.”
경일은 자신이 심은 고구마가 잘 자란 것도 모자라 맛까지 좋자 마음이 뿌듯했다.
만약 잡초까지 솎아 주면서 고구마 농사를 지었으면 수확량이 얼마나 늘어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곧 머리를 흔들어 궁금증을 날려 버렸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였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작물을 하나라도 더 심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잡초를 솎아 낸다고 해도 수확량은 별 차이가 날 거 같지는 않았다.
워낙 던전의 땅이 비옥해서 잡초가 있다고 한들 고구마가 자라는데 영향이 있었을 거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고구마도 잡초도 잘 자라는 던전은 모든 것을 품어 주는 어머니와 같았다.
“이거, 신체 능력이 안 올랐으면 수확하다가 쓰러질 수도 있었겠어. 왜 다들 헌터가 되고 싶어 하는지 이제 알겠네. 사람이 이렇게 강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야!”
경일은 드디어 레벨이 생겼다.
지금까지 0레벨이었는데, 1레벨이 된 것이다.
각성한 지 6개월 만에 남들이 각성하면 곧바로 얻는 능력을 얻었다.
이제야 같은 출발점에 섰다.
1레벨이 됐다고 해서 특별히 기쁘고 하지는 않았다.
“무슨 내가 다른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잡을 것도 아니고. 농사짓는데 도움이 되니 그건 좋긴 하네. 아마 레벨이 오른 건 더 열심히 농사를 지으라는 이야기일 거야.”
그저 신체 능력이 늘어나면서 기존보다 많은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기쁠 뿐이었다.
경일의 인벤토리에 고구마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헌터들의 스킬 중의 하나인 인벤토리는 물건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경일은 자신의 인벤토리는 헌터들과 다르게 스탄다비아에 물자를 보내기 위한 통로로 쓰이고 있었다.
“혹시 인벤토리 기본 기능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텐데.”
경일이 이용하는 게이트의 폭은 가로세로 1m도 되지 않았다.
지구에서 물건을 가지고 들어오려고 해도 입구가 너무 좁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많은 물자를 남의 눈을 피해 일일이 옥탑방으로 옮기는 것도 불가능했고.
만약 인벤토리를 이용해 필요한 물건을 던전으로 가지고 올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지금까지는 스탄다비아로 물건을 보내는 통로로만 이용했지, 인벤토리 원래의 기능을 실험해 본 적은 없었다.
이에 간단한 실험을 했다.
고구마 중의 하나를 알아볼 수 있게 표시를 해 두고 내 것으로 생각하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벤토리에 넣은 고구마가 사라졌다.
스탄다비아로 안전하게 도착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딱 하나의 고구마가 남아 있었다.
경일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넣어 놓은 고구마였다.
“하하하하, 역시 인벤토리는 이래야지. 이제부터는 지구의 물건을 쉽게 옮길 수 있겠어. 반대로 던전의 물건도 지구로 쉽게 가져갈 수 있고. 인벤토리 스킬을 가진 헌터가 확실히 대접받는 이유가 있었네. 이건 생각만으로도 엄청나게 편리한걸. 앞으로 지구의 자재를 쓸 수 있으니 일이 무척 편해지겠어.”
경일은 인벤토리를 쓸 수 있어 매우 기뻤다.
안 그래도 밭이 넓어지면서 새로운 수로를 건립해야 하는데 파이프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일일이 대나무를 잘라 다듬고 옮기고 하는 노가다가 필요 없어졌다.
노동량이 반 이상 줄어든 것이었다.
경일이 꾸준히 노력한 만큼, 스탄다비아는 느리지만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스탄다비아는 경일이 보내 준 자원으로 몬스터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영지의 모든 힘이 몬스터 방어에 집중되다 보니, 다른 부분이 발전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강력한 무기가 주어지자 몬스터 방어에 필요한 인력 일부분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농사를 짓고, 일부는 숲에서 사냥을 했다.
몬스터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먹고 사는 문제가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안전해졌을 뿐, 먹고 사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쌓일수록 분명 영지민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었다.
경일이 스킬을 이용해 스탄다비아를 관찰했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영지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방법을 고민했다.
농사와 사냥만 가지고는 발전이 너무 느렸다.
아니, 거의 발전할 수 없다고 봐야 했다.
‘농사와 사냥을 해 본들 자기들 먹기에도 모자라.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해.’
영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이 필요했다.
그는 어떤 것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스탄다비아를 관찰하는 도중,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었다.
지구의 시간과 던전의 시간의 흐름이 다르듯이 스탄다비아의 시간의 흐름 또한 달랐다.
정확히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탄다비아의 시간이 훨씬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스탄다비아와 연결된 지 던전의 시간으로 한 달 정도가 됐을 뿐인데, 그곳은 벌써 한 번의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아이들이 자란 게 보였고, 산의 색이 달라져 있었다.
덕분에 경일의 신체 능력이 빠르게 늘어날 수 있었다.
스탄다비아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사람들이 살기 좋은 비옥한 땅은 모두 몬스터의 차지였다.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척박해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영지민들은 무수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척박한 땅은 그런 사람들의 노력을 배신했다.
계속된 농사로 땅의 지력은 나날이 쇠하여 흉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위험한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숲에서 동물을 사냥하거나, 여러 가지 식물들을 채집했다.
고블린의 수가 줄어들어 이전보다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몬스터의 숲은 고블린만이 아닌 여러 몬스터가 존재했다.
몬스터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하는 비참한 죽음은 늘 일어났다.
하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몬스터의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경일이 느끼기에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였다.
인간은 멸망 직전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더욱 한심한 건 왕의 외면이었다.
몬스터의 숲과 국경을 마주한 귀족에게 모든 방어를 맡기고, 자신들은 안전한 내륙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었다.
만약 몬스터의 숲과 마주한 영지 한 곳이 무너지는 순간, 몬스터가 내륙으로 들어갈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베르아스 왕국은 자포리자 영주와 같은 몬스터의 침공을 목숨 걸고 막고 있는 몇몇 영주들 덕에 명맥을 이어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경일은 며칠을 꼬박 고구마 수확에 매달렸다.
그나마 캔 고구마를 곧바로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어 이 정도 시일이 걸렸지, 고구마를 옮기고 보관하는 작업까지 했으면 최소 두 배 이상의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경일은 고구마와 감자를 특히 많이 심었다.
다른 작물에 비해 성장 속도도 빠르고, 식사 대용으로도 충분했으며 영양분도 뛰어났다.
경일은 자신이 보낸 농작물이 굶주린 영지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며칠 전, 스탄다비아의 영지민과 시야를 공유할 때 올해도 농사가 흉년이라 한숨짓는 소리를 들었다.
경일이 보기에도 농사는 형편없었다.
잘 자란 고구마를 캐는 자신이 미안할 정도였다.
자신은 별 노력 없이 엄청난 양의 작물을 수확하는 반면, 스탄다비아 영지민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지만, 노력에 비해 결과가 너무 미약했다.
“농사가 왜 저리 안 되는 걸까? 이유가 뭐지? 어떻게 도움을 줄 방법이 없을까?”
경일은 일을 끝낸 후 대부분 시간은 스탄다비아의 농지를 관찰하며 보냈다.
오늘도 그는 던전의 밝은 햇빛 아래 농사일에 열중해 있었다.
그는 몸은 고구마를 수확하면서도 머리는 스탄다비아의 농사에 대해 생각했다.
“확실히 농사 기술이 부족하긴 해. 농부가 아닌 내가 봐도 답답할 정도니. 땅도 쉬어 줘야 하는데. 하긴, 그들로서는 땅을 놀릴 수는 없겠지. 지력을 높이려다 오히려 사람들이 굶어 죽을 판이니. 퇴비라도 많이 줘야 할 건데, 그런 모습도 안 보이고. 설마, 이거 아직 퇴비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니야?”
경일은 부지런히 고구마를 캐면서 생각을 이어 갔다.
“퇴비라… 내가 퇴비를 보내 주면 도움이 될 거 같긴 한데. 저 넓은 땅을 살리려면 얼마나 많은 퇴비가 필요할까? 이건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무슨 방법이 없을까?”
경일은 던전 흙을 헤치며 잘 자란 고구마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의 손에는 던전의 고운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열심히 움직이던 경일의 몸이 멈췄다.
그는 흙이 잔뜩 묻은 손을 보고 있었다.
“설마? 이거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 던전의 비옥한 흙이 충분히 퇴비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지금 확실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쓸 여유가 있나? 차라리 그 시간에 땅을 개간해서 농작지를 조금이라도 더 늘여 가는 것이 더 나을 거 같은데.”
경일은 한참 고민하다 결국은 던전의 땅을 보내기로 했다.
솔직히 밑져야 본전이었다.
매일 하는 게 노동인데, 조금 더 한다고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그리고 그가 또 하나 의도한 건, 자신의 생각대로 된다면 퇴비가 농사에 얼마나 중요한지 영지민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날부터 경일은 하루 한 시간, 따로 시간을 내서 인벤토리에 던전의 흙을 담았다.
이왕 하는 거 집 뒤의 산에 가서 흙을 퍼 담았다.
낙엽 등이 오랜 기간 쌓여 부숙한 것이 흙에 듬뿍 섞여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땅에 좋은 성분이 가득 차 보였다.
경일은 간단한 메모와 함께 인벤토리에 흙을 담아 보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