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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48화 (48/300)

[48화] 친구

한참 수한이를 떠올리며 매대의 사각 스텐 팬에 떡볶이를 만들고 있는데,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기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작은 키에 덩치가 작은 것이 아이 같았다.

수한이였다.

경일과 눈이 마주치자 수한이 돌아서 갈려고 하는 걸 보고 곧바로 불렀다.

“수한아!”

경일이 큰 목소리로 부르자 수한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수한아, 아저씨한데 와 봐.”

어른이 불렀는데 무시하고 가기가 그런지, 수한이는 쭈뼛거리며 경일에게 다가왔다.

“수한아, 왜 한동안 안 왔어? 아저씨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그게…….”

수한이는 말을 잊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봤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힘없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기죽어 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밝게 웃으며 가끔 친구들 앞에서 허세도 부리고 씩씩하게 행동하는 게 수한이의 원래 모습이었다.

경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밝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저씨가 수한이 올 거 같아서 오늘은 떡볶이를 더 맛있게 만들었어.”

“저기… 아저씨, 오늘은 떡볶이를 못 먹어요.”

수한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옷도 평상시보다 지저분해 보였다.

이길호는 아들에게 좋은 옷을 사 주지는 못해도 늘 신경 써서 깨끗한 옷을 입혔다.

기죽은 모습이나 지저분한 옷을 보니 집에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이길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제대로 신경을 못 쓸 이유는 안 봐도 빤했다.

아마 수한이 엄마의 던전병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이길호는 아내가 걸린 던전병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터였다.

경일은 수한이가 상처받지 않게 어떻게 말할지 잠시 고민했다.

“수한아, 요즘 아저씨 가게에 왜 안 왔어? 공부한다고 바빴어?”

“그게 조금요…….”

수한이 고개를 숙이고 얼버무렸다.

“아저씨는 수한이 많이 보고 싶었는데. 수한이는 아저씨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빠져 있었다.

“수한아, 일단 이거 먹어.”

경일이 떡볶이를 앞 접시에 떠서 수한이의 앞에 놓았다.

“저기…….”

수한이 머뭇거린다.

“엉? 왜?”

“저기 돈이 300원밖에 없어서 못 먹어요.”

수한이가 떡볶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슬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한아, 아저씨는 수한이를 친구로 생각하거든?”

“네?”

어른이 자신을 친구라고 말해 주자, 수한이가 의아했는지 물었다.

“아저씨가 처음 분식점을 오픈하고 힘들었을 때, 수한이가 맛있다고 처음 말해 줬어. 그리고 친구들도 많이 데리고 와서 아저씨 떡볶이 자랑도 막 해 주고. 그때 아저씨가 너무 감동을 받았어. 외롭고 힘들 때 수한이 덕에 아저씨는 용기를 얻었어. 수한이의 도움 때문에 아저씨는 힘을 내서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거야. 그때부터 수한이는 아저씨한테 소중한 친구가 됐어.”

수한이가 고개를 들어 경일을 보며 큰 눈을 소처럼 껌벅거렸다.

“그러니 수한이랑 아저씨랑 친구야. 수한이는 친구 많지?”

“네.”

“그럼 수한이는 친구가 힘들고 외로워하면 어떻게 해? 수한이는 착해서 친구를 외면하지 않고 친절히 대해 주지 않아?”

“네. 저는 친구에게 늘 잘해 줘요. 아빠가 친구를 사랑하고, 늘 잘 대해 주라고 했거든요.”

“그렇지. 수한이가 아저씨가 힘들 때 잘해 줬으니, 이제는 수한이가 조금 힘든 거 같아 아저씨가 잘해 주는 거야. 그게 친구잖아. 그렇지?”

“네.”

수한이가 경일의 말을 모두 이해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힘이 빠져 있던 아이의 눈에 생기가 도는 건 확실했다.

“이건 아저씨 친구인 수한이가 힘이 없는 거 같아 힘내라고 주는 거야. 그러니 그냥 먹어도 돼. 친구 사이는 원래 그런 거거든.”

경일이 수한이의 손에 작은 포크를 쥐여 주었다.

“진짜 먹어도 돼요?”

수한이가 기쁜 듯 말했다.

“그럼~ 먹어도 되지.”

그제야 아이는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경일은 따뜻한 어묵 국물을 종이컵에 떠서 놓았다.

수한이가 좋아하는 각종 튀김도 얼른 만들어 튀겼다.

순식간에 음식이 수북이 쌓였다.

이건 순수한 경일의 마음이었다.

자신의 음식을 먹고 가장 먼저 맛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수한이였다.

친구들을 끌고 와서 자신의 음식을 자랑하던 수한이의 모습은 경일의 마음에 박제되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용기를 주었다.

얼마 전, 김만복의 음모에 빠져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낼 때도 이 기억은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수한이는 평생 잊어지지 않을 소중한 1호 단골이자, 친구였다.

“수한아, 먹으면서 들어. 아저씨랑 수한이는 친구니까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서 먹어도 돼. 친구끼리 중요한 건 돈이 아니야. 중요한 건 수한이의 웃음이지. 이전처럼 씩씩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저씨한테는 행복이거든. 그러니 떡볶이를 미안해하며 먹을 필요가 전혀 없어. 친구인 아저씨를 위해 이전처럼 씩씩하고 웃는 모습을 보여 주면 좋겠어. 수한이가 즐거워야 수한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질 수 있거든.”

“네!”

수한이는 입가에 고추장 양념을 듬뿍 묻히고 웃음 지었다.

아이가 얼마나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웃음을 되찾은 모습이 너무 좋았다.

경일은 사랑스러운 수한이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 * *

비누의 가치는 엄청났다.

자포리자는 단 한 번 써 봤을 뿐인데, 비누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아차렸다.

이건 스탄다비아가 새롭게 도약할 기반이 되고도 남을 정도의 물건이었다.

그는 곧바로 행정관을 도시에 보내 상단을 수배했다.

워낙 척박한 지역이라 상단이 오지 않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상단 입장에서 이곳에 와 장사를 한들 아무런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니 올 이유가 없었다.

행정관이 근 한 달 만에 돌아오면서 데리고 온 상단은 헬리어스 상단이었다.

헬리어스 상단은 주로 각 지역의 특산물을 사서 다른 지역에 팔아 수익을 올렸다.

서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니 귀족을 상대하는 상단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영세할 수밖에 없었다.

자포리자는 실망했다.

이 정도의 물건이면 왕국에서 가장 큰 5대 상단까지는 아니어도 중형 상단 이상은 데리고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먼 길까지 온 상단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만남이 이루어졌다.

“영주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헬리어스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 에바돈 칼슨입니다. 에바돈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에바돈은 자포리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반갑소. 나는 스탄다비아의 영주 자포리자 보일이요. 일단 앉아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자포리자가 자리를 권했다.

“서로 쓸데없는 말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갑시다. 여기까지 왔으면 비누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일 테고, 그에 따른 이야기만 합시다.”

“하하하, 아주 시원시원하신 성격이십니다.”

에바돈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영주를 칭찬했다.

칭찬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닌 이상, 그는 최대한 상대를 치켜세웠다.

“그래서 에바돈 씨는 비누의 가격에 대해 얼마를 생각하시오.”

자포리자 성주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에바돈은 순간 당황했다.

보통의 귀족들은 체면상 돈에 대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대충 인사를 나누고 나면 실질적인 거래는 영주 밑의 행정관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음~ 이러면 머리가 아파지는데. 행정관은 이미 구워삶아 놓아서 쉽게 거래를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에바돈은 겉으로 웃고 있지만,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행정관이 도시로 나가 접촉한 상단은 총 세 군데였다.

이 중 가장 영세한 상단이 헬리어스 상단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헬리어스 상단이 선택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헬리어스 상단이 선택된 건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에바돈이 행정관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던 것이다.

행정관으로서는 어느 상단이든 데리고 가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어떤 상단들과 접촉했는지 영주가 어떻게 알겠는가.

에바돈은 행정관이 준 비누를 처음 써 본 순간 천국을 맛보았다.

그 개운함은 그에게 새로운 쾌락을 맛보여 주었다.

그는 이 비누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한 번 비누를 써 본 이상, 비누가 주는 개운함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을 건 당연했다.

이 비누만 있으면 그의 꿈인 귀족과의 거래도 틀 수 있을 것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힘들게 장사를 해도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순간, 편하게 고수익을 남길 수 있을 터였다.

이미 행정관을 구워삶아 놓았으니 영주와의 거래도 어렵지 않으리라고 봤다.

먹여 둔 돈이 있는데 행정관이 자신의 편을 들 건 빤한 이치였다.

에바돈은 행정관과 정해 둔 가격보다 약간 올려 말했다.

영주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40페니가 적당한 가격으로 생각됩니다.”

에바돈은 망설임 없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자포리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생각한 가격과 너무 큰 차이가 나서였다.

평민들의 처지에서 40페니가 큰돈이었지만, 귀족에겐 하찮은 금액이었다.

120페니가 1골드였다.

베르아스 왕국에서 자작의 1년 수입이 평균 2,200골드였다.

40페니면 일 년간 6600개의 비누를 살 수 있었다.

에바돈은 자포리자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영주님도 알다시피 이곳은 왕국의 가장 서쪽에 있는 영토입니다. 당연히 운임이 많이 들 수밖에 없고, 전국의 귀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팔아야 하는 저희로서는 최대한의 금액을 쳐 드린 겁니다. 비누가 알려진 물건이 아니니, 처음에는 공짜로 비누를 풀어 광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저희의 상황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인의 화려한 언변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40페니가 매우 합당한 가격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에바돈의 말에도 자포리자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가 상인이 아니라도 비누를 40페니로 정한 것은 가격을 형편없이 책정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누를 만들려면 고블린을 잡고 따로 지방을 채취해야 했다.

고블린을 잡기 위해 매번 기사와 병사는 물론이고 영지민들까지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이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일일이 고블린을 해체하는 데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 외에도 비누를 만드는 과정 역시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간 물건인데, 40페니는 너무 쌌다.

차라리 그 가격이면 팔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누군가는 고블린을 막는 건 원래 스탄다비아가 하던 일이니, 그 부분은 원가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정 부분 가격에 반영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을 아예 배제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자포리자가 가장 기분이 나쁜 것은 선인이 자신들을 위해 내려 준 은혜인데, 그걸 하찮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40페니로 가져가서 얼마에 팔 생각이지?”

자포리자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에바돈은 생각지도 않은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질문을 하는 귀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체면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귀족이다.

그런 그가 상인인 자신과 이렇게 직접 가격 협상을 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깊숙하게 찔러올지는 몰랐다.

“그 질문에 답을 해 드리긴 곤란합니다. 얼마의 부대비용이 들지 계산이 끝난 상태가 아니라서 가격에 관한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대충이라도 말해 보게나. 여기까지 비누를 사러 왔을 정도면 대략적인 계산이 섰을 것인데.”

“영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상인인 만큼 어느 정도의 부대비용이 들지 예상되는 금액을 알고 있으니 대략적인 가격은 나온 상태입니다만…….”

에바돈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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