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동상이몽 (1)
“여기에도 변수가 많습니다. 비누가 훌륭한 물건인 건 맞지만, 아직 시장 반응을 본 게 아니라서 섣불리 예상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누를 구매한 뒤는 저희 물건이니 판매가를 물으시는 건 범위를 넘는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비누의 생산자로서 시장 가격을 물어보는 게 월권이라는 말인가? 그래, 좋아. 얼마에 팔지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하지. 그럼 지금의 얘기를 계속하지. 비누가 40페니라는 건 너무 싼 거 아닌가?”
“영주님, 40페니면 괜찮은 가격입니다. 영주님이 비누에 대한 애정이 크다 보니 가격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 상단만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상단보다 가장 높은 가격을 불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시장 반응을 냉정하게 보시면 40페니는 절대 싼 가격이 아닙니다.”
에바돈은 더 이상의 흥정은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칼자루를 쥔 것처럼 행동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다른 상단은 더 적은 금액을 불렀다는 이야기인데, 자포리자는 이 사실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비누의 가치는 결코 이렇게 하찮은 게 아니었다.
‘이자가 이렇게 자신 있게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이건 애초에 흥정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이지 않은가. 분명 비누를 욕심내는 모습인데,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다니. 내가 비누 판매를 거부하면 여기까지 온 게 헛걸음이 될 뿐인데, 이렇게 나온다라… 이미 끝난 거래에 오히려 내가 지분거리는 거 같잖아.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 이거 혹시?’
자포리자는 여유 넘치는 에바돈의 행동이 수상했다.
“일단 그쪽의 뜻은 잘 알았네. 생각을 좀 해 봐야겠으니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로 하지. 이만 가 보게나.”
“알겠습니다, 영주님.”
에바돈은 자포리자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약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도 영주의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신이 나 있었다.
행정관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이상,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런 촌구석의 귀족 정도는 얼마든지 요리할 자신이 있었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왕국의 주요 도시마다 작은 지점이나마 개설한 상단으로 키워 내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상단으로는 그의 욕망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적극적인 도움이나, 독점하는 품목 하나만 있으면 충분히 대형 상단으로 올라갈 자신이 있었다.
“드디어 내 인생에 대운이 들어왔어. 난 이걸 발판 삼아 왕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거야. 돈만 있으면 그놈의 귀족 자리 하나 사는 것은 일도 아니지. 내 아들은 이름뿐인 귀족이 아니라 최소한 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만들고 말겠어.”
에바돈은 숙소로 돌아가는 마차에 앉아 장밋빛 희망과 꿈에 빠져 행복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지금쯤 행정관을 불러 계약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겠군. 행정관과 30페니로 계약하기로 입을 맞추어 놓은 상태이니, 내일 계약은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 10페니나 올려 줬다는 걸 알면 의심을 거두고 나랑 계약하자고 하겠지. 이런 한심한 촌구석에 박혀 망해 가는 귀족이 나에게 이런 큰 행운을 주다니. 세상 참 재미있단 말이야, 하하하하!”
그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자포리자는 그의 예상과 다르게 행정관 대신 그의 충직한 기사인 칼튼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칼튼이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칼튼, 자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네.”
“명령하십시오.”
“지금 당장 행정관을 잡아와. 아무래도 상단에게 뒷돈을 받은 거 같으니, 그의 집을 샅샅이 뒤져 그 증거를 찾아오게나.”
“알겠습니다.”
칼튼은 영주의 명령에 짧게 대답을 하고는 곧바로 방에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정관을 잡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자포리자는 성의 지하로 내려갔다.
이곳은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는 곳이었다.
감옥으로 내려가니 행정관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모습만 봐도 자포리자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알았다.
“성주님, 여기에 앉으십시오.”
칼튼이 나무 의자를 가지고 왔다.
자포리자가 의자에 앉자 그가 보고를 시작했다.
“영주님의 명대로 행정관의 집을 수색해서 500골드를 찾아냈습니다.”
“500골드? 이거 참, 많이도 받아먹었군.”
1골드면 평민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였다.
이곳 스탄다비아가 워낙 가난한 곳이라 다른 곳보다 생활비가 적게 들기는 했지만, 50골드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영주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재물에 눈이 삐어서 그만.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행정관이 자포리자를 향해 자비를 구걸했다.
작은 영지의 일개 행정관이 이토록 큰돈을 덥석 받아먹을 수 있던 건 에바돈처럼 그도 자포리자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자포리자 영주는 촌구석에서 박혀 앞날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만히 놔두어도 알아서 망해 가는 귀족일 뿐이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몬스터와 싸우는 것뿐인 단순한 인물로 봤다.
지금도 자신의 죄가 발각되어 이렇게 잡혀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가장 떡고물이 많이 떨어지는 행정관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영지가 워낙 가난해, 횡령한 돈으로는 그의 욕심을 채우기엔 너무 미미했다.
그런 와중에 지금까지 쌓여 있던 욕심을 단번에 채우고도 남을 돈을 제안받았는데, 그걸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행정관은 도리어 에바돈과 흥정을 벌리면서 그가 처음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뜯어냈다.
“너 같은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손해를 입어야 하는 거지? 네놈이 먹은 건 500골드지만, 상인 놈은 그보다 백배, 천배의 돈을 남겨 먹을 것이다. 그게 모두 영지로 들어와야 하는 돈이야. 네놈의 더러운 욕심 때문에 스탄다비아가 얼마나 큰 피해를 봐야 하지?”
자포리자가 추상같은 목소리로 행정관의 죄를 꾸짖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영주님, 제가 워낙 힘들게 살아오다 보니 큰돈을 본 순간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저만 믿고 사는 노모에 아내와 어린 자식까지 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행정관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자포리자의 눈은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
“이자를 감옥에 집어 놓고,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하도록.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영지에서 추방한 뒤, 이자의 목을 베어라.”
자포리자의 단호한 말에 행정관은 동상처럼 얼어붙었다.
그러다 얼음이 깨진 계곡물에 빠진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족들이 소속 없는 유민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이 시대에 법과 제도에서 벗어난 삶은 노예보다도 훨씬 비참했다.
더군다나 재산 한 푼 없이 맨몸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사막에 버려진다는 것과 똑같았다.
자신의 잘못으로 노모와 부인, 어린 자식까지 그런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이제야 진정 참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희망 없는 삶을 연명할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고 미칠 것만 같았다.
“영주님! 제발 제 목숨만으로 끝내 주십시오. 가족들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발 가족들을, 가족들을 쫓아내지 말아 주십시오!”
행정관은 자포리자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영지민들에게 간과 쓸개까지 다 빼 줄 거 같은 영주의 모습만 보아 온 행정관으로서는 이렇게 단호히 자신의 죄를 물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충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보이면 가벼운 처벌로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보니 영주를 대하는 기사의 각 잡힌 모습 또한 놀라웠다.
이건 자신이 평소 생각하던 자포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엄한 처벌을 받자 비로소 지금까지 그를 크게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충!”
칼튼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행정관의 운명이 결정이 났다.
자포리자는 눈물범벅으로 간절하게 비는 행정관을 외면한 채 집무실로 돌아갔다.
다음 날,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에바돈은 꿈에 부푼 채 영주와 약속한 시각에 맞춰 성으로 갔다.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그래, 자리에 앉지.”
에바돈은 자포리자를 마주 보며 정면의 의자에 앉았다.
영주는 어제의 모습과 조금 다르게 보였다.
총명했던 눈은 탁기가 낀 듯 흐리멍덩했고, 말은 어제와 달리 살짝 어눌했다.
과음을 한 뒤 아직 술이 깨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술 냄새가 났다.
‘쯧쯧,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술을 마시다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였네.’
에바돈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 듣자 하니 행정관과는 30페니에 계약을 하기로 했었더군.”
“네. 영주님. 영주님이 직접 거래에 나오셔서 제가 임의로 10페니를 더 올렸습니다.”
“그래. 내 체면도 생각해 주고, 그럼 40페니로 해서 계약서를 쓰도록 하지.”
에바돈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듣자마자 입이 귀에 걸렸다.
최대한 표정을 숨기고, 준비해 온 계약서를 꺼냈다.
미리 준비된 계약서를 보고 자포리자는 기분이 나빴으나, 그도 최대한 표정을 숨겼다.
“마치 오늘 거래가 이루어질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계약서를 가지고 왔군.”
“영주님이 저의 본심을 알아줄 거라 생각해 미리 준비해 놨습니다. 영주님도 바쁘실 텐데, 빨리 계약을 끝내고 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에바돈은 자포리자의 말에 속이 뜨끔했지만, 적당한 핑계를 대고 분위기를 넘겼다.
“그래, 그럼 계약서를 한 번 보세.”
에바돈은 공손히 두 손으로 계약서를 건넸다.
이제 자포리자의 사인만 남았다.
그는 지금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이 계약으로 헬리어스 상단을 왕국의 5대 상단과 같은 규모와 위치로 키워 낼 자신이 있었다.
앞으로는 5대 상단이 아니라 6대 상단으로 불리든지, 아니면 5대 상단 중 한 상단이 밀려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었다.
‘멍청한 놈.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놈이 이런 대단한 물건을 만들어 냈을까? 겨우 40페니로 보물을 얻었어. 이걸 내가 얼마에 팔질 알고 나면 깨나 속이 아프겠군. 이제 모든 게 내 것이야.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인간을 행정관으로 고용한 것도, 그놈에게 상단을 찾으라고 보낸 것도, 모두 본인 책임이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나에게 이런 큰 기회를 줬으니, 내가 마음속 깊이 고마움을 표시하마. 그건 돈 드는 것도 아니니, 킄킄킄!’
공손한 표정과는 달리 에바돈은 자포리자를 마음껏 비웃고 있었다.
계약서를 받아든 자포리자가 서명을 하려고 펜을 집었다.
그 모습을 본 에바돈은 마음속에서 환희의 폭죽이 펑펑 하고 터져 나왔다.
세상의 모든 돈이 자신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오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뜨고 자포리자의 손만 바라봤다.
그 순간, 막 서명을 하려던 자포리자의 손이 멈췄다.
그러고는 머리가 가려운지 펜을 내려놓고 머리를 긁었다.
그는 몇 번이나 서명할 듯하면서 결정적일 때마다 엉뚱한 짓을 했다.
그 모습에 공손한 표정을 연기하고 있던 에바돈의 얼굴에 금이 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