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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50화 (50/300)

[50화] 동상이몽 (2)

‘이 멍청한 자식아, 뭐 하는 거야? 빨리 서명하라고. 이런 촌구석에서 비누 하나에 40페니면 충분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을 테니, 얼른 서명해!’

마음이 바짝 달아오른 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영주님, 얼른 서명하시지요.”

에바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포리자를 재촉했다.

애초에 자포리자는 이 계약서에 서명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서명할 듯 말 듯 연기를 하는 것은 모두 에바돈을 약 올리기 위해서였다.

행정관에게는 벌을 주었지만, 자신의 영지민도 아닌 상단의 단주를 마음대로 벌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영지에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계약도 엄밀히 말하면 사기가 아니었다.

행정관과 세부 내용에 대해 합의를 하고, 그 내용에 따라 영주가 서명한다.

이건 모든 귀족이 행하는 통상적인 계약의 절차였다.

자포리자는 작은 연극을 통해 그의 기분을 하늘까지 띄워 올렸다가 강제로 땅바닥으로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에바돈은 표정 관리를 한다고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었으나, 자포리자가 서명을 하려는 순간 인내심이 풀려 버렸다.

그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으며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누가 봐도 그는 엄청난 기쁨에 싸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바돈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자포리자는 서명하려던 펜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계약서를 좀 읽어 봐야겠네.”

뜬금없는 자포리자의 말에 에바돈은 과장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영주님. 이미 행정관과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 합의가 끝났습니다. 그 내용 그대로 들어가 있으니 영주님은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에바돈의 재촉에도 펜을 다시 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좋았던 기분이 사라지고, 온갖 짜증이 밀려들었다.

“아니, 성주님,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장난하십니까? 얼른 서명하세요.”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진 그는 귀족에게 아랫사람 대하듯 질책하는 말투로 말하고 말았다.

“지금 나에게 뭐라고 했나?”

자포리자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그 속에 담긴 권위는 절대 작지 않았다.

그 순간 에바돈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못하면 이건 귀족 모독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이 분명 상단주이긴 했지만, 그의 신분은 엄밀히 평민이었다.

평민이 감히 귀족에게 명령조로 말하다니.

이건 잘못하면 큰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말이 헛 나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에바돈이 급히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머리를 깊게 숙였다.

자포리자가 고개를 숙인 그의 뒤통수에 대고 한 번 웃어 보이고는 곧바로 표정을 지웠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게 워낙에 중요한 계약이니.”

자포리자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넘어가자 에바돈은 크게 안심했다.

“그런데 성주님, 서명을 망설이시는 이유라도… 이미 행정관과 모든 합의가 끝난 상황인데,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있지.”

짧은 말이지만, 조금 전의 어수룩한 말투와는 전혀 달랐다.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거래 기간이 무려 20년이나 되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 더군다나 헬리어스 상단에게 스탄다비아에서 생산한 비누 전량을 모두 넘기는 거로 되어 있는데, 이대로라면 완전한 독점 계약이 아닌가?”

자포리자의 말에 에바돈이 크게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구름 위를 걷고 있었는데, 생각도 못 한 날카로운 질문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잘못하다가는 다된 밥에 재를 뿌릴 판이었다.

“아~ 그건 모두 영주님을 생각해서 넣은 문구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상단이 가장 비싼 가격을 불렀습니다. 무려 20년간이나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으니, 영주님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이건 헬리어스 상단이 비누를 거래해 주신 영주님께 보내는 신의의 표시입니다. 장사라는 것이 서로의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모두 스탄다비아를 위하는 헬리어스 상단의 순수한 마음을 담은 문구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교묘한 말솜씨였다.

자포리자가 행정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무조건 넘어갔을 것이다.

사실 그가 행정관을 의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에바돈이 제공했다.

에바돈은 자신의 과한 욕심에 비누의 가격을 너무 낮게 책정했다.

자포리자에게 비누의 가격이 40페니라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그 결과 행정관을 의심했고, 집을 뒤져 증거를 찾아냈다.

그리고 지금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만약 에바돈이 조금만 욕심을 버렸다면 비누라는 획기적인 아이템을 독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를 곧바로 영지에서 쫓아낼 생각이었다.

괘씸하긴 했지만, 500골드라는 공돈이 생겼으니 자포리자 입장에서도 손해를 본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큰 이익이었다.

스탄다비아의 재정에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거금이 생긴 것이다.

자포리자는 기사를 시켜 그를 쫓아내려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도 자신을 이용했듯이 자포리자도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방법이 생각났다.

‘이놈을 쫓아내고 다른 상단을 불러오는 데에도 다시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다른 상단이 또다시 수작을 부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분명히 부리겠지. 상단 입장에서는 당연히 가장 싼 가격에 비누를 사 가려 할 테니. 문제는 내가 상인들처럼 비누의 값어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계약에서 또다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비누의 값어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상 불리한 계약을 맺을 공산이 컸다.

그래서 자포리자는 한 가지 꾀를 냈다.

자신을 속이려고 한 헬리어스 상단에 큰 타격을 줄 방법을.

거기다가 자신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으면서 귀족들에게 비누를 알리고, 시장 가격까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음~ 헬리어스 상단이 제법 신의가 있군 그래.”

“저희가 아직 기회를 못 만나서 그렇지, 조금 있으면 왕국에서 누구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커질 겁니다. 많은 분이 저희 상단의 진가를 알아보시고 지원을 약속하셨거든요.”

‘그 기회가 바로 지금이지, 킄킄킄. 지원은 멍청한 당신이 하는 거고.’

영주가 자신의 말에 동조하는 듯하자, 에바돈은 안심하며 자포리자를 마음껏 비웃었다.

“저희가 다른 곳과 약속이 되어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에바돈이 계약을 재촉했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그의 생각과 다르게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쪽의 마음이 고맙기는 하나, 이대로 계약하는 건 좀 아닌 거 같군. 우리 가문의 신조가 다른 이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자이거든. 도움을 주면 줬지, 민폐를 끼치면 안 되지. 더군다나 귀족의 체면도 있는데 말이야. 안 그런가?”

“네?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신지?”

에바돈은 자포리자의 뜬금없는 말에 당황하며 버벅거렸다.

“그래서 계약을 조금 바꿀 생각이네.”

“계약을 바꾼다고요?”

에바돈은 자포리자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여유 있던 그의 미소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 된 밥이라고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민폐를 끼칠 수 없으니 계약 기간을 없애겠네. 무려 20년이나 비누를 가장 좋은 가격으로 판다는 건 헬리어스 상단에 크나큰 민폐지. 빤히 자네 상단이 힘들어질 걸 알면서도 그런 불공정 계약을 맺는 건 체면이 안 서는 일이야. 그래서 이번 거래는 비누 천 개만 하도록 하지. 이러면 자네 상단도 큰 부담이 없을 거야. 한 번 팔아 보고, 40페니도 부담이 된다고 하면 다음에는 내 가격을 조금 내려주지. 하하하하, 어떤가? 이러면 자네 상단도 부담이 가지 않겠지?”

자포리자가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런 병신 같은 놈이. 내 말을 더 오버해서 받아들이면 어쩌자는 거야. 살다 살다 이렇게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네.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니, 영주님, 굳이 그럴 실 필요까지는 없는…….”

에바돈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자포리자가 이미 계약서의 여러 문장에 줄을 북북 긋고 자신이 말한 내용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눈 깜짝할 사이에 계약서를 고친 자포리자는 곧바로 서명했다.

“자, 이럼 둘 다 만족스러운 계약이 됐네. 내 지시해 놓을 테니, 비누를 받아 가게나.”

“성주님, 굳이 이렇게 할 필요까지…….”

이번에도 자포리자는 에바돈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자네, 방금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얼른 가 보게. 우리 비누 홍보를 잘 부탁하네.”

자포리자가 축객령을 내리자, 에바돈은 떨떠름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20년간의 비누를 독점할 기회가 겨우 비누 천 개로 마무리되었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수직으로 떨어져서 땅바닥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제기랄, 어쩔 수 없지. 영주가 멍청하니 다음번에 와서 계약을 잘 끌어내면 될 거야. 아직 거래할 기회가 많이 남아 있으니 실망하지 말자.’

에바돈은 자신을 위로하며 비누 천 개를 가지고 떠났다.

떠나는 그의 모습을 성벽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자포리자였다.

“네놈의 말대로 아직 귀족들이 비누를 모르니 공짜로 공급하며 비누를 알려야겠지. 그럼 나는 손 안 대고 코를 푼 게 되겠군. 하하하하, 귀족들이 다시 비누를 찾으면 몇 개 남지 않은 비누를 최대한 비싼 가격으로 팔겠지. 그럼 난 비누의 시장 가격을 알게 될 거고. 광고도 알아서 해 주고, 시장의 가격도 알려주고, 500골드라는 큰돈까지. 에바돈, 아주 괜찮은 거래였어.”

에바돈은 앞으로도 자포리자가 자신과 거래를 할 것이라고 꿈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비누의 팔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최선을 다할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포리자는 다시는 에바돈과 거래할 생각이 없었다.

에바돈은 비누의 생산지를 최대한 숨기고 싶어 할 테지만, 비누가 풀리고 나면 자포리자 쪽에서 먼저 소문을 낼 생각이었다.

그럼 전국의 상단이 알아서 몰려들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행정관을 매수한 돈 500골드가 날아가고, 알아서 비누의 광고까지 해 준 걸 알면 에바돈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포리자는 생각만으로도 통쾌한지 얼굴에 커다란 웃음이 걸렸다.

* * *

경일은 한참 던전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스탄다비아가 발전하면서 던전과의 유대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던전에 새로운 던전 고유 식물이 자라납니다.]

“응? 던전 고유 식물? 설마?”

경일이 지금까지 던전에서 찾은 식물은 모두 지구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사과, 고구마, 고추 등등.

그는 늘 한 가지가 궁금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던전인데도 이상하게 기존의 던전에서 발견되는 식물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수한이의 가족 사정을 알고 난 뒤, 한동안 던전을 뒤지고 다녔다.

던전병에 효과가 있는 식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던전병의 발병 원인이 정확히 밝혀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마나의 부작용으로 생각했다.

보통의 경우, 몸속에 마나가 스며들어 인체를 각성시켜 헌터가 됐다.

만약 각성하지 못할 경우, 체내에 남아 있는 마나의 부작용으로 던전병이 발병한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었다.

그동안 꾸준히 찾으려 노력했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던전에서 자라는 식물은 볼 수가 없었다.

모두 지구에 존재하는 것밖에 없었다.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일은 이번 메시지가 무척이나 기뻤다.

던전 고유 식물은 헌터들에게 더욱 중요했다.

일정한 배합을 통해 여러 가지 포션을 만들 수 있었는데, 발견되는 양은 적지만 헌터들의 마의 구간을 넘는데 도움이 되는 식물도 존재했다.

던전 고유 식물이 자란다는 건 기분 좋은 뉴스였다.

“틈틈이 공부해 놓기를 잘했네.”

경일은 농사를 지으면서 지구의 식물과 던전 고유 식물까지 공부해 놓은 터라 이제 찾기만 면 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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