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51화 (51/300)

[51화] 주폭

분식점으로 향하는 출근길은 늘 기분이 좋았다.

산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듬뿍 들이마셨다.

푸른 하늘에는 솜처럼 포근한 뭉게구름이 느리게 헤엄치고 있었다.

분식점을 열고, 매대의 먼지를 한 번 더 닦아 냈다.

그리고 깨끗이 씻은 사각 스텐 냄비를 올렸다.

민물 새우를 우려낸 육수에 양념장과 떢을 넣고, 마지막으로 던전 채소를 듬뿍 넣었다.

분식점의 매대에서 떡볶이가 기분 좋게 익어 가고 있었다.

경일은 오늘 장사할 재료를 다듬었다.

타타타타탁!

식칼이 도마와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신체 능력이 오르자 그의 칼질이 더 정교해지고 빨라졌다.

채소는 짓눌림 없이 반듯하게 잘렸고, 음식의 맛이 더욱 좋아졌다.

재료 준비가 끝나고 오픈 시간이 되자 첫 손님이 들어왔다.

이미순이었다.

동네 분식을 자주 찾아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게시판에서 자신을 위해 싸워 준 그녀에게 무척 감사했다.

자신이 한 건 겨우 음식을 포장해 준 거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도 역시 깨끗하네요. 사장님은 어떻게 이렇게 부지런할 수가 있어요? 난 미용실 지저분하다고 언니한테 매일 잔소리 듣는데. 참고로 우리 언니도 청소 못 해요. 그러면서 맨날 나한테만 뭐라 하고. 하여간 전생이 마녀였을 거야. 사장님은 손님이 별로 없을 때도 깨끗했는데, 이렇게 손님이 많은데도 여전히 깨끗하네요. 전 미용실에 손님이 많으면 어쩔 수 없이 청소가 게을러지곤 하는데 말이에요.”

이미순은 의자에 앉자마자 평상시대로 수다를 떨었다.

“요즘 체력이 확실히 좋아진 걸 느껴요. 어제 오래간만에 엄청 바빴는데, 청소까지 완벽하게 했잖아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 숫자의 손님이 오면 퇴근 때는 손끝 하나 들 힘도 없었거든요. 독한 파마약에다가 염색약 냄새까지 맡다 보니 몸이 아주 힘들었어요. 특히 매일 손님들 머리를 감기다 보니 손도 엉망이었고.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피부가 좋아요. 독한 냄새를 맡아서 그런지 편두통도 심했는데, 어느 날부터 두통도 사라졌어요. 손님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도 적어지고. 신기하지 않아요, 사장님? 운동을 새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영양제를 따로 먹은 것도 아닌데, 요즘 너무 기분이 좋아요. 매일 맛있는 안주로 술을 먹을 수도 있고, 요즘은 너무 행복해요. 남자 친구만 있으면 딱 인데. 이렇게 깜찍하고 이쁜 나를 보고 대시하는 남자들이 없다니. 다들 눈이 삐었어.”

이미순의 이야기는 늘 재미 있었다.

표정도 풍부하고, 말에 그녀만의 독특한 리듬이 있다 보니 같은 내용이라도 그녀가 말하면 더 재미있게 들렸다.

“하하, 술은 적당히 드세요.”

“체력이 좋아지니까 술이 더 맛있는 거 있죠. 어제도 마셨는데, 어떻게 숙취가 전혀 없어요. 완전 새로 태어난 기분이라니까요. 오늘은 사장님이 절 위해 만들어 주신 비빔밥을 주세요.”

경일은 게시판 사건 이후 고마워서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넌지시 말을 하자 이미순이 원한 건 의외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메뉴에 넣어 달라는 거였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 다른 걸 얘기하라고 했더니, 그녀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녀가 원하는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경일은 이미순을 위해 고추장을 직접 만들었다.

지금까지는 시중의 기성품을 사용했지만, 이번 음식만큼은 정성을 담아 최고로 만들고 싶었다.

쌀농사도 짓고 있어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 중 고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던전에서 농사를 짓는 작물로만 만들었다.

마음 같으면 고기까지 던전에서 구한 거로 넣고 싶었지만, 던전에서 아직 동물을 본 적이 없어 그건 불가능했다.

동네 분식의 메뉴 중 던전 식물이 가장 많이 들어간 메뉴의 탄생이었다.

비빔밥에는 사람에게 이로운 효능이 듬뿍 담겨 있었다.

특히 이미순에게 도움될 만한 효능을 집중적으로 넣었다.

경일은 그녀가 지금처럼 건강하고, 늘 즐거운 웃음을 지었으면 했다.

작은 덩치에 비해 그녀는 꽤 많은 양을 먹었다.

경일은 밥과 고명을 듬뿍 올린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이미순은 익숙한 듯 뚝딱 비빔밥을 비볐다.

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한입에 넣고 씹었다.

작은 입에 저 많은 밥이 한 번에 들어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늘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으~ 사장님 너무 마시쎠요!”

이미순이 열심히 씹으며 말했다.

“국물이랑 같이 드세요.”

경일은 큰 그릇에 국을 떠서 주었다.

비빔밥만으로는 뭐가 모자란 거 같아 며칠 전부터 고민하고 연습해서 오늘 완성한 국물이었다.

비빔밥과 어울리는 국을 만들기 위해 말린 무를 이용했다.

생물 무로 육수를 낼 경우에는 쓴맛이 날 수도 있었다.

말린 무가 가지고 있던 맛이 농축되어 생물 무보다 국물에 훨씬 맛이 더 잘 배어 나왔다.

말린 표고버섯을 우려낸 육수와 민물 새우가 들어간 육수까지 섞어 국간장으로 간을 했다.

마지막으로 후추를 넣어 풍미를 더해 주었다.

그렇게 비빔밥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에도 잘 어울릴 거 같은 국물이 완성되었다.

“와! 사장님, 이 국물은 뭐예요? 시원하면서도 구수하고, 깊은 감칠맛까지 끝내주네요. 끝에는 은은한 단맛도 나고. 어휴~ 속 풀려.”

이미순은 깜찍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인생을 오래 산 아저씨의 느낌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오늘도 술을 마실 생각인지 음식 포장을 주문했다.

한참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정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저 왔어요.”

수한이가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경일과 친구가 된 이후로 아이는 이전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편하게 찾아 왔다.

어느새 어두웠던 얼굴은 활짝 펴져 있었다.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늘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음식을 먹고,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경일의 마음에 위안과 행복이 가득 찼다.

“어서 오세요.”

처음 보는 손님이 매대 앞에 섰다.

“원하시는 튀김을 말씀하시면 튀겨 드리고요. 떡볶이랑 어묵은 앞 접시에 덜어서 드시면 됩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지저분했다.

머리는 씻은 지 오래됐는지 온통 떡이 져 있었고, 옷에는 온통 더러운 얼룩이 묻어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게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있는 것이 노숙자 같았다.

다른 손님이 불편하실까 봐 처음에는 음식을 팔지 않으려 했다가 곧 생각을 바꾸었다.

못사는 동네이다 보니 저런 옷차림의 사람들은 종종 눈에 띠었다.

그들도 원하는 것을 먹을 권리가 있었다.

경일의 친절한 말과 반대로 남자는 손톱 밑에 새까맣게 때가 낀 손으로 떡볶이를 덥석 집었다.

남자의 더러운 손이 떡볶이가 들어있는 사각 팬에 들어갔다 나왔다.

남자는 손에 쥔 떡볶이를 잘도 먹었다.

더러운 손으로 떡볶이를 집는 순간, 경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상상도 못 한 사태에 일순 뇌가 정지했다.

급박한 스트레스로 위가 쪼그라들 듯이 아파졌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서서히 차올랐다.

경일에게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더러운 것에 짓밟힌 기분이었다.

“제법 맛있네. 내가 왜 이 집을 몰랐지? 야, 튀김도 종류별로 몇 개 내놔 봐라.”

남자는 당당하게 다른 음식을 주문했다.

떡볶이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그는 어묵 꼬치를 간장 통에 깊숙이 담갔다.

간장을 따로 덜어 먹으라고 작은 종지가 구비되어 있었지만,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침이 묻은 어묵을 간장 통에 넣어 휘저었다.

“무슨 짓입니까? 여러 사람이 먹는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고, 침이 묻은 어묵을 간장 통에 그냥 넣다니요. 여기 앞 접시랑 간장 종지 안 보입니까? 이거 어쩔 겁니까?”

경일이 화가 나 소리쳤다.

“개썅, 애새끼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더럽게 시끄럽네. 귓구멍은 안 막혔다.”

남자는 경일의 말을 무시하고 간장을 찍은 어묵을 육수 통에 집어넣어 씻었다.

“먹던 어묵을 지금 어디에다가 넣어요!”

“염병, 귀 안 먹었다고 이야기했잖아. 요즘 애새끼들은 한 번 말을 하면 알아듣지를 못해. 간장이 많이 묻어서 짤 것 같아 씻었다. 왜?”

경일이 뻘게진 얼굴로 소리쳤지만, 남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떡볶이 냄비에 더러운 손을 넣어 휘저어 버렸다.

그의 손에 떡볶이 양념이 묻어 새빨개졌다.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쪽쪽거리면서 경일의 면전에서 빨아 먹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지금 어디에서 행패야!”

참지 못한 경일이 가게 입구로 달려 나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남자는 곧바로 바닥으로 쓰러지며 소리쳤다.

“동네 사람들! 어린놈의 새끼가 늙은이를 때려요! 넌 애미 애비도 없냐? 늙은이를 아예 잡네, 잡아. 그래, 쳐라 쳐. 염병할 인생 별로 미련도 없다. 쳐 보라고. 개호로 새끼야. 왜 막상 치려니 못 치겠어? 하여간 좆도 없는 것들이 개폼은. 씨발, 노려보면 어쩔 건데? 동네 사람들! 저 싸가지 없는 새끼 눈 한 번 보세요. 아주 잡아먹겠다, 먹겠어.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 알기를 우습게 알고 말이야. 어디 감히 말이야.”

입속에 씹고 있던 떡볶이를 튀겨 가며 남자는 소리를 꽥꽥 질러 댔다.

“이런 미친!”

경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참지 못하고 남자를 걷어차려는 순간, 누군가 말렸다.

“사장님, 참으세요. 잘못 건드렸다간 괜한 깽값만 나갑니다. 딱 봐도 일부러 이러는 거 같은데, 힘으로 해결하시면 안 됩니다.”

경일을 말린 남자는 분식점 안에서 식사 중이던 단골이었다.

“제가 아까 신고했으니 곧 경찰이 올 겁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경일은 단골의 말에 화를 삭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한 번 뻗친 화가 잘 내려가지 않는지 경일은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 댔다.

“아이구, 허리가 부러졌네.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의 허리를 부러뜨렸네. 개새끼야, 네가 인간 새끼냐? 더러운 깡패 새끼 같으니라고. 캬아아아악~ 퉷!”

남자는 경일을 향해 가래침을 내뱉었다.

다행히 가래침을 맞지는 않았지만, 아마 맞았으면 경일은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히히히히, 병신 새끼.”

경일이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남자는 적나라하게 비웃었다.

“욱!”

가슴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더는 참지 못하고 남자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저 멀리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가 왔다.

차에서 내린 경찰이 현장을 한 번 보고는 곧바로 소리치는 남자에게 다가왔다.

“하~ 이 사람 또 시작이네.”

경찰은 짜증나는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아마 이런 상황을 자주 겪은 듯이 보였다.

“아이고, 경찰 나리, 잘 오셨습니다. 저 새끼가 지금 나를 때렸습니다. 지금 허리가 아작 났다니까요.”

“김순기 씨, 일어나세요. 당신 올해만 몇 번짼지 아세요? 이번에 들어가면 구속될 수도 있습니다.”

경찰은 신원 확인도 하지 않았는데도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나머지 한 명의 경찰이 경일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저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떡볶이 냄비에 손을 집어넣고 휘저었습니다. 어묵탕에 침이 묻은 어묵을 집어넣어 헹구고. 온갖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분식점에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경찰은 경일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 사람은 이 동네에서 유명한 주폭(주취폭력)입니다. 매번 식당에서 공짜로 음식을 먹고 트집을 잡아 행패를 부리죠. 한동안 안 보이길래 사라졌나 했더니, 다시 나타났네요. 혹시 폭력을 행사하거나 한 건 없으시죠.”

“네. 떡볶이 냄비에 다시 손을 넣어 휘저으려고 하기에 목덜미를 잡아 뒤로 끈 거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경찰서에 같이 가셔서 진술을 해 주셔야 합니다.”

“네.”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언젠가 주폭에 관한 기사를 읽어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설마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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