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불청객
신기한 광경이었다.
땅속 광산의 입구까지 일정 크기의 땅이 그대로 수직으로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360도를 둘러싼 절벽이 바닥과 만나는 곳에 광산의 입구가 있었다.
누가 일부러 다듬은 듯 절벽은 매끄러웠다.
깊이가 최소 20m가 넘어 보이는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자연이 만들어 낸 천혜의 감옥이었다.
경일이 광산을 내려다보니 다섯 명의 사람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광산으로 보내긴 했는데, 저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굶겨 죽일 수는 없으니, 식량도 내려줘야 하는데… 밑으로 어떻게 내려가지?”
헌터인 자신도 광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스킬 광산 관리가 발동됩니다. 광부가 캔 금속은 인벤토리로 들어옵니다. 노동의 대가는 인벤토리 안의 식량과 교환됩니다. 금속과 식량의 교환 비율은 언제든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현재 교환 비율은 던전 금속 100g에 한 끼 음식이 제공됩니다. 광부들의 행동은 원하는 시간 언제든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광부 1. 주폭, 김호근.
김호근은 광산의 광부로 얼마 동안 일하길 원하시나요?
광부 2. 금발 양아치, 차경호.
차경호는 광산의 광부로 얼마 동안 일하길 원하시나요?
광부 3. 머리를 반만 염색한 양아치, 심진원.
이상규는 광산의 광부로 얼마 동안 일하길 원하시나요?
광부 4. 코에 피어싱 한 양아치, 이상규.
심진원은 광산의 광부로 얼마 동안 일하길 원하시나요?
광부 5. 김만복.
김만복은 광산의 광부로 얼마 동안 일하길 원하시나요?
“대박인데? 이건 완전 광산 A.I잖아.”
이 순간, 광부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이 캔 금속 100g은 한 끼 식사와 교환됩니다.]
“이게 뭐야? 이 미친 새끼야, 당장 나와! 여기서 날 꺼내 달라고!”
성질 급한 금발이 가장 먼저 소리를 질렀다.
미친 듯이 주위를 뛰어다니며 나갈 곳을 찾는 모습이었다.
주폭은 알코올 기운이 사라질수록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벌써 금단 현상이 왔는지 얼굴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제발,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제발 한 병만!”
그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계속해서 술을 찾았다.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 수가 있어? 상규야, 내 뺨 좀 때려 봐.”
머리를 반만 염색한 남자가 코에 피어싱 한 남자에게 말했다.
짝!
손바닥과 뺨이 만나는 찰진 소리와 함께 머리를 반만 염색한 남자의 비명이 뒤따랐다.
“악! 이 미친 새끼야, 지금 무슨 짓이야?”
때리는 사람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 자신도 모르게 온 힘을 다해 뺨을 때렸다.
“야, 네가 때리라고 했잖아.”
뺨을 맞은 반만 염색한 남자가 화를 내자 코에 피어싱 한 남자는 오히려 남 탓을 했다.
결국, 둘은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바닥을 뒹굴며 싸움을 시작했다.
가장 나중에 온 김만복은 아직도 죽음의 공포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들의 모습을 경일은 눈앞에서 보듯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뭐, 식량도 공급된다고 하니, 별다른 걱정은 없겠네.”
그들이 있는 곳은 제법 넓었고, 충분한 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먹고 사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경일은 지구의 시간보다 빠른 던전의 시간을 감안해서 다섯 명의 광부에게 2년 동안 일할 것을 명령했다.
[광부들의 노동 교화 기간이 끝이 나면 지구로 돌아갑니다. 이곳에서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남아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거 대단하데? 정말 던전을 관장하는 신이라도 있는 거 아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신기한 일의 연속이구나.”
경일은 던전의 신비를 잠시 생각하다가 멈췄다.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이 대단한 던전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마냥 좋기만 했다.
“아~ 속이 뻥 뚫리는구나! 오늘은 오래간만에 던전의 경치나 감상하며 기분 좋게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머리 아픈 일을 모두 해결한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 *
스탄다비아에 한 무리의 불청객이 들어서고 있었다.
말을 탄 한 명의 남자와 그를 수행하는 하인, 그리고 그 뒤로 몇 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여기는 올 때마다 칙칙하다니까. 몬스터 피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거 같잖아. 어휴~ 미개하기는.”
화려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는 이는 알리사의 행정관 나밀이었다.
“그래도 여기 오면 거나하게 대접받을 수 있으니 좋지 않습니까? 용돈도 짭짤하게 생기고. 소인은 여기에 올 때마다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요. 피 냄새가 아니라 돈 냄새가 납니다요.”
나밀을 명을 수행하는 샤트론이 개처럼 헥헥거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네 말을 듣고 보니 피 냄새보다 돈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지는구나. 이번에는 스탄다비아의 곳간을 아주 제대로 박박 긁어야겠어. 영주님도 이번에는 특별히 신경 쓰라고 하더군.”
“그럼, 우리에게 떨어지는 떡고물도 많겠습니다요.”
“아마, 그렇겠지? 이번에는 뭐로 한 번 먹어 볼까? 삼시 세끼를 아주 제대로 차려서 먹어야겠어. 요즘 몸이 허한 거 같으니 제대로 몸보신을 해야지. 여기 오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뒷돈을 좀 많이 썼잖아. 하여간, 좋은 건 안다니까.”
“하하하, 저도 행정관님 명을 수행하려고 돈 좀 썼습죠. 여기가 좋다는 소문이 나서 노리는 것들이 많아졌다니까요.”
행정관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 말의 고삐를 잡은 샤트론과 수다를 떨며 스탄다비아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들은 스탄다비아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알리사의 사람들이었다.
스탄다비아가 몬스터의 침공을 목숨 바쳐 막는 동안, 이들은 그들의 뒤에서 편하게 생활했다.
지리적 위치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스탄다비아의 입장에서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그런 스탄다비아에게 손톱만 한 존중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스탄다비아가 몬스터를 막고 자신들이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스탄다비아는 우리가 지옥의 야차처럼 보이겠지?”
“그렇습죠. 자신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행정관님의 얼굴만 봐도 오줌을 지릴 겁니다요.”
이들은 지금 스탄다비아에 영지전을 선포하러 가는 길이었다.
알리사의 영주 나바론 스타테인 자작은 연례행사처럼 스탄다비아에 영지전을 걸었다.
스탄다비아는 영지전을 할 여력이 없었다.
밀려드는 몬스터의 침공을 막기에도 버거운 상태였으니까.
자포리자의 리더십과 그를 따르는 영지민들이 없었으면 몬스터에게 벌써 무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영지전이 벌어진다면 알리사가 백전백승일 정도로 빤한 승부였다.
하지만 매년 영지전을 걸었는데도 스탄다비아는 여전히 자포리자가 다스리고 있었다.
매년 알리사 영주가 영지전을 걸긴 했으나, 실제로는 전쟁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아서였다.
알리사 영주로서는 몬스터를 막아 내야 하는 스탄다비아를 차지하는 것은 실익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엄청난 골칫덩이를 안는 셈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영지전을 거는 이유는 자포리자의 강직한 성품을 이용해 돈을 뜯어먹기 위한 하나의 쇼였다.
“어떻게 보면 자포리자가 대단한 인물이긴 해. 나 같으면 이런 거지같은 영지는 버려도 벌써 버렸겠어. 골칫덩어리인 이 영지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안고 있는 거 보면, 보일가가 확실의 뼈대 있는 명문이긴 해. 세월이 비정한 거지. 그렇게 대단한 보일가가 이렇게까지 몰락하는 걸 보면 말이야. 옛날 이 근처 영지들은 스탄다비아를 향해 고개도 못 들었어.”
“그래 봐야, 모두 옛날의 영광이 아닙니까? 지금의 보일가는 이빨 빠진, 늙고 병든 호랑이가 아닙니까. 아무도 알아 주지도 않는데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삽니까? 멍청하고 미련한 짓이지.”
“그래, 네 말이 맞다. 미련한 거지. 그러니 나 같은 평민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명색이 귀족이라는 작자가 말이야. 모양 빠지게.”
“귀족이면 뭐 합니까. 힘이 없으면 천민보다 못 하지요. 힘 있는 행정관님이 여기서는 진정한 귀족이고, 왕이십니다.”
“푸하하하하! 맞다, 내가 여기서는 왕이지.”
샤트론의 아부에 나밀의 기분이 하늘을 찔렀다.
자포리자도 이런 치욕을 겪을 바에는 영지전에 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지전이 일어난다면 죄 없는 많은 영지민이 죽을 건 빤한 얘기였다.
아니면 영지전 없이 곧바로 항복하고, 스탄다비아를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자신이 떠난다면 알리사 영주는 곧바로 이득이 되는 부분만 취하고, 스탄다비아를 버려 버릴 것이었다.
그럼 남아 있는 영지민들은 껍질만 남은 스탄다비아에서 몬스터의 침공 속에서 힘들게 살아야 한다.
자포리자는 조상 대대로 지켜온 스탄다비아와 영지민들에게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힘든 와중에도 매년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 마련한 돈을 알리사 영주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년 엄청난 자괴감에 시달렸다.
나밀의 눈에 저 멀리 스탄다비아의 성이 보였다.
“다 왔구나. 이제 즐길 일만 남은 것인가? 이번에도 잘 준비해 놨겠지? 어휴, 벌써 하초가 뻐근하구나!”
“하하하, 좋으시겠습니다, 행정관님. 제가 행정관님에게 충성하는 거 잘 아시죠?”
“그럼, 잘 알지. 내가 특별히 자네에게도 계집을 챙겨 주지. 살이 타고 뼈가 녹는 밤이 될 거야.”
나밀은 행복에 겨워 하늘을 날 거 같았다.
작년에도 이곳에 와서 거의 보름을 묵었다.
그는 방자하고 교만했다.
온갖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왕처럼 굴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여자를 그의 방으로 끌어들였다.
처녀와 유부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는 스탄다비아에서 그가 품고 있는 은밀한 모든 욕구를 발산했다.
이곳에 지낼 동안은 일국의 왕도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나밀에게 유린당한 딸의 부모와 남편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자포리자 성주는 그 꼴이 보기 싫어 첫날 나밀과의 협상 후, 그가 머무는 동안은 성을 떠나 방벽에서 몬스터를 토벌하며 지냈다.
나밀은 올해도 이곳에 오기 위해 윗선에 뇌물까지 먹였으니, 더 화끈하게 놀 생각이었다.
뒷돈도 더 많이 챙기고.
외성에 도착하자 샤트론이 거만하게 소리쳤다.
“알리사의 사절단이다. 이놈들아, 어서 성문을 열어라. 그리고 즉시 이 사실을 스탄다비아 영주에게 전해라.”
일개 수행원인 샤트론이 거만하게 소리쳤다.
외성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저 죽일 놈의 새끼들.’
감히 하늘같은 성주님을 아랫사람 대하듯 부른 것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경일의 지원을 받는 스탄다비아 영지민들은 더 이상 이전의 힘없이 당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전히 먹고 살기는 힘들었지만, 그들은 무력 쪽으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상태였다.
그들의 눈에 살기가 차올랐다.
매년 알리사 사절단들이 어떤 패악을 부렸는지 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딸이, 부인이 하룻밤 노리개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당장 달려가 사절단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자포리자의 지엄한 명령이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기사 칼튼이 엄한 눈으로 병사들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 실린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은 눈에 서린 살기를 지우려 노력했다.
성문이 열리고, 사절단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들어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