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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58화 (58/300)

[58화] 사실일 리가 없어!

“네놈들의 눈은 장님이냐? 우리가 오는 모습을 빤히 보였을 텐데도 미리 성문을 열지 않다니. 우리를 무시하는 것은 알리사 영주인 나바론 스타테인 자작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내가 당장 네놈들의 목을 벨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나밀의 말에 병사들의 피가 거꾸로 솟고,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나밀의 목을 베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밀은 그런 병사들의 분위기를 읽지 못한 채 말 위에서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기사 칼튼입니다. 성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칼튼이 나밀을 향해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딱 떨어지는 기사의 표본과 같은 행동에 나밀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칼튼의 기사다움에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깊은 원한이 담긴 병사들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채 사절단은 아무런 의심 없이 오늘부터 펼쳐진 향락만을 생각했다.

‘흐흐흐, 저년의 엉덩이가 제대로 물이 올랐구나. 아주 좋아. 저년도 괜찮고. 벌써 몸이 근질거리는데? 자포리자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저년들을 끌고 가서 즐기고 싶구나. 이곳은 진정한 천국이야. 다들 기대해라. 네년들에게 내가 또 다른 세상을 선사해 주지. 하하하하!’

나밀의 눈은 여자들을 탐색하느라 빠르게 움직였다.

내성의 성문이 열렸다.

그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영주의 집무실까지 곧장 안내되었다.

시간 약속이 미리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곧바로 만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대우한다는 뜻이었다.

일개 행정관이 받을 수 있는 의전이 아니었다.

심지어 행정관은 내성에 들어올 동안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몸수색도 받지 않았다.

아무리 알리사 영주의 명을 받고 온 사절단이라고 해도, 결국 그는 평민이었다.

최소한 자포리자보다 직책이 높은 귀족이어야 가능한 의전이었다.

‘작년보다 대접이 확실히 좋아졌어. 이제야 자존심을 버리고, 현실을 인식한 모양이군. 쯧쯧쯧, 그래 봐야 소용없어. 내가 아주 거덜을 낼 거니까. 크크크.’

극진한 대접에 나밀의 기분이 한층 업 됐다.

시작부터 알아서 기는 듯한 태도에 그는 더욱 거만해졌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게.”

칼튼이 직접 열어 준 문을 잔뜩 거들먹거리며 나밀이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영주님? 작년에 뵙고 올해 또 뵙습니다.”

나밀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일개 행정관이 영주에게 보일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도 모자랄 판에 고개만 까딱거리다니.

칼튼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자신이 당한 모욕은 참아 낼 수 있었지만, 주군에 대한 모욕은 참기 힘들었다.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고서는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참고 또 참았다.

꽉 쥔 주먹에서 핏기가 사라진 걸 보아 얼마나 힘들게 화를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밀은 자포리자가 자리를 권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보다 먼저 당당하게 의자에 앉았다.

자포리자 성주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흥! 인상 쓰면 어쩔 건데. 네놈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몇 년간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나? 아직도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니. 그럴수록 네놈만 괴로울 뿐이지, 크크크.’

그는 자포리자의 얼굴에 서린 노기를 봤지만,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자신의 뒤에 알리사 영주가 있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자포리자는 굳이 의자에 앉지 않았다.

행정관과 같은 눈높이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작년까지는 그가 등에 업은 알리사 영주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했겠지만, 올해부터는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경일이 스탄다비아의 든든한 뒷배가 됨으로써 이들은 힘을 가졌다.

병사들은 실전을 겸비한 강병으로 변모해 있었다.

“여기 알리사 영주이신 나바론 스타테인 자작님의 친서가 있습니다.”

나밀은 의자에 앉은 채 품속에서 꺼낸 친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포리자가 입을 열었다.

“건방지군.”

짧은 말 한마디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나밀은 등줄기가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분위기는 뭐지? 조금 전 분위기랑 너무 다른데. 부하들은 나에게 최대한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영주란 작자가 정신을 못 차리고 초를 치다니. 조금 전 인상을 쓸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쯧쯧쯧. 좋아, 이딴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올해는 최대한의 돈을 뜯어내야겠어. 아주 껍질만 남기고 알맹이는 탈탈 털어 주지. 내 성질을 건든 만큼 그 대가는 매우 처절할 거야.’

나밀은 자신이 뜯어 가는 돈은 당연히 조공이라고 생각했다.

스탄다비아를 자신들에게 종속된 영지라 여겼다.

자포리자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영주전에 관한 내용이 적힌 친서를 그가 읽기를 기다렸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읽지 않고. 꼴에 자존심은 있다 이거지.’

자포리자가 이 글을 읽어야 협상을 빙자해 자신이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큼, 큼.”

나밀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 알리사 영주님의 친서를 보시지요. 중요한 이야기가 적혀 있으니 읽고서 그에 대해 답을 주시지요.”

자포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짜증이 났다는 걸 표시하고 있었다.

“일어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겨울의 새벽처럼 시리었다.

“네?”

나밀은 그의 기세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반문했다.

자포리자에게서 폭풍 같은 기세가 뻗어 나왔다.

이건 살기였다.

정면에서 그 살기에 노출된 나밀은 온몸이 떨려 왔다.

“저 건방진 놈의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베어라. 그리고 저놈의 성기를 잘라 개의 먹이로 주어라.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힐링 포션을 먹여서라도 상처를 치료해. 저놈의 품속에 이번 영지전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서한을 동봉해 알리사로 돌려보내라. 지금부터 한 달 뒤, 스칸디아 평원에서 영지전을 할 것이다.”

나밀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자포리자에 엄한 목소리는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그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이 삽시간에 귀신을 본 듯 창백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는 영지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지전이야 일어나든 말든 그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문제는 영지전을 수락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전의 나온 말이 문제였다.

‘지금 내 팔과 다리를 자르고, 그것도 모자라 내 성기까지 자른다고? 설마… 거짓말이겠지. 이게 사실일 리가 없어.’

머리로 아무리 부정해 봐도 몸은 이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장이 조이듯 아파 왔다.

이곳에서 늘 최강의 힘을 내던 그의 성기가 쪼그라들어 아예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스탄다비에서 입으려고 특별히 맞춘 화려한 디자인의 바지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지, 지금 영, 영지전을 하, 하자는 겁니까? 영… 영지민을 모, 모두 죽, 죽일 셈입니까? 알리사 영, 영주님은 절, 절대 봐주지 않으실 겁니다. 지, 지금이라도 말, 말을 물, 물리시면 모, 모른 척하겠습니다. 이, 이번에 받, 받을 조, 조공은 특, 특별히 한 푼도 받, 받지 않겠습니다. 제, 제가 영, 영주님께 잘, 잘 말씀드릴 테니 우, 우리는 이, 이대로 돌, 돌아가겠습니다.”

나밀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말을 끝낸 후, 몸을 돌려 빠르게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을 막는 존재 때문에 나밀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놈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네놈의 얄팍한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여기서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영주님의 명이 떨어진 이상, 모든 건 그대로 실행될 것이다. 지금까지 당한 것을 백배, 천배로 돌려주마. 넌 오른손잡이니까 내가 특별히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잘라 주지. 고통을 네놈 뼛속 깊이 새겨 주마. 죽어서도 잊지 못하도록.”

칼튼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조금씩 칼집을 벗어나는 묵빛의 검이 불길함을 내뿜었다.

“잠, 잠깐! 내가 반드시 잘 말씀드…….”

나밀이 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말을 했으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서걱!

나밀은 깔끔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봤다.

잘려 나간 팔이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그러고는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어 뇌를 헤집어 놓았다.

고통에 기절하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칼튼이 칼끝으로 잘린 팔을 후벼 팠다.

그는 절대 나밀이 기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더 큰 고통으로 기절하려는 그의 정신을 붙들었다.

이건 영지민들이 지금까지 당한 원한을 대신해 행하는 하나의 신선한 의식이었다.

키기킥!

칼끝과 뼈가 만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악!”

잘린 단면에서 밀려오는 믿을 수 없는 고통에 나밀은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는 바닥을 뒹굴며 처절한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팔에서 흘린 피로 카펫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칼튼이 바닥에 뒹구는 그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쥐고 들어 올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머리 가죽이 뜯겨 나가는 고통에 나밀이 비명을 질렀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 보려고, 머리카락을 잡은 칼튼의 손을 잡으려 했다.

분명 두 손으로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가 허전했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커다란 상실감이 끔찍했다.

“사, 사절단에게 위, 위협을 가하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절단이라 놈이 남의 영지민을 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했지. 마음에 드는 여자는 가리지 않고 강간하라는 법은 대체 어디의 법이냐?”

칼튼은 나밀의 개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거센 손이 그의 양쪽 턱을 잡아 강하게 눌렀다.

나밀의 입이 벌어지고, 칼튼이 힐링 포션을 입속에 부으려 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렸다.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죽음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았다.

고개를 흔들어 힐링 포션을 거부해 보려 했지만,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기사의 힘 앞에서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칼튼이 강하게 턱을 누르자 턱뼈가 빠져 나갈 거 같았다.

벌어진 입안으로 차가운 느낌이 밀려들었다.

강제로 나밀의 입이 닫히고, 그와 함께 꿀꺽꿀꺽, 힐링 포션이 목을 타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팔이 잘린 단면에도 힐링 포션을 뿌렸다.

지혈된 듯 피가 멈췄으나, 고통을 전부 없앨 수는 없었다.

남아 있는 고통으로도 나밀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입만 벙긋거리며 한 마리 애벌레처럼 바닥을 기었다.

“아직 두 군데가 더 남았다.”

칼튼의 스산한 말에 나밀은 자포리자를 향해 벌레처럼 기었다.

“영, 영주님, 제발,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대로만 보내 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없던 일로 만들겠습니다! 아니, 스탄다비아에서 받아 간 돈을 모두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나밀은 남은 한 손으로 자포리자의 발을 잡고 애원했다.

그는 급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감히 일개 행정관 주제에 건방진 말을 잘도 하는구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자포리자가 그의 잘린 팔의 단면을 발로 지그시 눌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수천 개의 바늘이 찌르는 듯한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다.

“네놈은 우리 영지민이 너에게 유린당할 때 제발 살려 달라고, 멈춰 달라고 빌었을 때. 넌 어떻게 했지? 그럴수록 넌 더 크게 흥분해 날뛰며 철저히 유린했지. 한마디만 더 하면 남은 팔다리도 모두 잘라 버리겠다.”

자포리자의 말에는 서릿발 같은 차가운 위엄이 실려 있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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