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원한
나밀은 다시 한번 애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자포리자의 눈을 보고 포기했다.
방금 전 고통이 두 번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그는 절망했다.
칼튼이 자신의 다리를 자르기 위해 검을 세우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었다.
그는 다리로 다가오는 검을 향해 재빨리 목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허무하게 불발되었다.
기사의 검을, 평생 칼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는 나밀이 따라잡기엔 애초에 무리였다.
서걱!
조금 전 팔이 잘리며 나던 소리가 다시 한번 나밀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팔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이번에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이 돌아가고,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는 숨이 멎기 전의 억눌린 소리만이 간간히 나올 뿐이었다.
분명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갔는데, 사지가 모두 아팠다.
환상통이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은 허공을 헤맸다.
아픈 곳을 감싸 안고 싶은데, 어디부터 잡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난 걸 후회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려 했다.
고통을 외면하고 싶은 무언가가 탈출하려고 계속해서 발버둥 쳤다.
그 순간이었다.
스핏, 하는 소리와 함께 팔과 다리가 잘린 고통을 비집고 들어와 새롭고 더 강한 고통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뾰족한 송곳으로 뇌를 그대로 후벼 파는 고통이 느껴지는 동시에, 나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조차 지를 수 없던 그의 입을 새로운 고통이 강제로 벌렸다.
인간이 내기엔 불가능할 거 같은 원초적인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칼튼이 재빨리 나밀의 입을 잡고 힐링 포션을 입속에 부었다.
커다란 손으로 입을 막아 버리자, 힐링 포션이 곧바로 삼켜졌다.
잘린 다리와 성기에 힐링 포션을 뿌리자 피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나밀이 입 밖으로 게거품을 내뿜고 있었다.
자포리자는 같은 양의 금보다 비싼 힐링 포션을 세 개나 낭비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남은 팔다리도 모두 자르고 싶었다.
지금까지 당한 걸 생각하면 이건 만분의 일도 돌려주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힐링 포션이 뛰어나다 해도 더는 목숨을 보장하지 못할 터였다.
자포리자와 칼튼은 자신의 죄를 온몸으로 받은 나밀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게 해 준 경일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샤트론은 한창 신이나 있었다.
나밀과 자포리자와의 만남이 끝이 나고 나면 마음껏 즐길 일만이 남은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진수성찬을 먹게 될까? 이번에 걸린 여자는 내가 아주 반쯤 죽여 버리겠어. 평생에 이런 일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즐길 수 있을 때 끝까지 최대한 즐겨야지. 이번에도 아주 뽕을 뽑겠어, 킥킥킥!’
인간이라는 동물은 잔인할 때는 그 누구보다 잔인해 질 수 있었다.
샤트론과 같은 일부의 인간은 누군가를 자신의 마음대로 가지고 놀 때, 가장 큰 희열을 느꼈다.
상대에게 남겨질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그는 상대를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나밀과 쿵짝이 잘 맞는 것도 이런 취향이 맞아서이기도 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나밀을 제외한 일행들을 집사가 안내했다.
복도에서 나밀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그들이 쉴 수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작년에도 한 번 겪어 봤기에 샤트론과 일행은 별다른 의심 없이 집사를 따라갔다.
집사는 아무런 말없이 그들을 데리고 한참을 걸어갔다.
샤트론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봐, 이 길이 아니잖아. 작년에 우리를 안내했던 방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는 집사를 향해 윽박질렀다.
무심하게 길을 안내하던 집사가 샤트론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신경질적인 경련이 그의 입 주위에 나타나 있었다.
“일개 하인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것이냐!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난 보일가의 집사다. 감히, 그런 나에게 반말도 모자라서 함부로 행동하다니!”
집사가 크게 화를 내며 나무라자 샤트론은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건방진 놈이 어디서 감히! 난 알리사 영주의 명을 받고 온 사절단이다. 겨우 스탄다비아의 일개 집사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내가 이 자리에서 네놈의 입을 찢을 수도 있다. 당장 무릎을 꿇고 사과하지 못해?”
샤트론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나밀의 호위를 위해 따라온 병사들이 험악하게 집사를 노려봤다.
마치 한마디만 더하면 베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일개 하인의 건방진 태도에 집사는 모욕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보일가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죽고 싶으냐?”
샤트론은 등 뒤에서 들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 블라드와 병사들이 험악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샤트론이 재빨리 병사들의 뒤로 물러나 몸을 숨겼다.
알리사 병사들과 스탄다비아 병사가 서로 노려보며 대치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병사들의 뒤에 숨은 샤트론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지금 이 행동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우리는 알리사 영주님의 명을 받고 온 사람들이란 걸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힌다. 만약 우리 몸에 손톱 크기만 한 작은 상처라도 난다면, 이곳은 피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이야. 당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빌어라. 그러지 않으면 이번 협상에 네놈들의 목을 요구할 것이다.”
마치 자신이 자작인 된 것마냥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쥐새끼가 감히 사자 흉내를 내다니. 겁먹고 병사들 뒤에 숨어서 하는 짓이 가소롭다, 가소로워.”
스탄다비아 병사들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오히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거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네. 블라도 님,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저 새끼는 제발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저놈의 창자를 씹어 먹어야 속이 풀릴 거 같습니다. 저놈이 작년에 제 여동생을 강제로 범했습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저놈은 내 거라고. 블라도 님, 저놈은 제 아내를 폭행하고 잔인하게 짓밟았습니다. 그날의 충격으로 아내는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를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구칩니다. 저놈을 잡아다 꽁꽁 묶어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작은 독에 집어넣어 매일 손톱과 발톱을 하나씩 뽑고, 저놈의 혓바닥을 조금씩 잘라낼 겁니다. 이 원한을 풀 수 있도록 저놈을 제발 저한테 주십시오.”
샤트론은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듯한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병사의 입에서 나온 ‘원한’이라는 서슬 퍼런 말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는 것과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이런 상황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일개 병사들이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다니.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누가 봐도 이들은 진짜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사절단인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설마 스탄다비아가 영지전을 선택한 거야? 이럴 수가…….’
그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손끝부터 떨려 오기 시작하더니 삐질삐질 땀이 났다.
서 있는 것이 힘들어질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모두 당황해하는 와중에 알리사 병사 중 한 명이 유일하게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아 싸움에 대비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무기를 뽑아! 네놈이 정녕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블라도 기사가 화가 나 소리쳤다.
“흥,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가만히 목을 빼고 그대로 기다리라고? 난 그렇게는 못 죽겠다. 최소한 싸우다 죽어야 후회가 없는 법이거든.”
알리사 병사가 제법 강한 기세를 내뿜었다.
“제법이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다니. 자세를 보니 병사치고 실력도 꽤 강한 수준이군. 너도 보나 마나 우린 영지에서 무언가를 바라고 왔겠지. 그 선택을 평생 후회하게 해 주지!”
블라도가 검을 뽑아 앞으로 내밀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에 알리사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의 몸에서 기세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복도를 장악해 나갔다.
아무리 실력 있는 병사라도 마나를 다루는 기사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리사 병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잠깐만요.”
블라도의 행동을 막은 건 의외로 스탄다비아의 병사였다.
“블라도 님의 행동을 막은 죄,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간악한 알리사와 싸우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닌 아내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제발, 저들과 싸울 기회를 주십시오.”
아내가 당한 일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다.
블라도는 병사의 한 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놈의 자세로 보면 정식으로 수련한 모습이 보인다.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그래도 싸우겠느냐?”
“네, 싸우겠습니다. 제가 죽인 몬스터만 해도 수십, 수백 마리입니다. 실전 경험은 저놈보다 몇십 배 더 뛰어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영주님이 내려 주신 이 롱소드가 있습니다.”
블라도는 병사가 들고 있는 롱소드를 봤다.
경일이 보내 준 철로 만든 무기였다.
원래라면 일개 병사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자포리자는 아끼지 않고 병사들에게 먼저 지급했다.
“그래, 좋다.”
“감사합니다.”
블라도 기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병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걸음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을 시작으로 나의 원한을 조금씩 갚아 가겠다. 덤벼라.”
샤트론은 병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니, 이미 영지전을 준비해 놓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불을 쫓는 불나방처럼 스스로 사지로 뛰어든 셈이었다.
사태를 완전히 인지한 그는 석상처럼 굳었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지? 저놈들이 절대 순순히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아, 아니야! 무조건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여태까지 이곳에서 한 짓이 있으니 더욱 겁이 났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봤지만, 벗어날 방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에게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들이 해일처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숨이 막혀 왔다.
“좋다. 나랑 맞서자. 인생의 마지막을 강자와 싸워 마무리하려 했지만, 그대와의 싸움도 나쁘지 않겠지. 그대를 이기고 다시 싸워도 되고 말이야. 마지막 싸움일지도 모르니, 한 줌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을 생각이야. 그대도 최선을 다해 덤벼라.”
알리사 병사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자세를 잡았다.
‘허~ 알리사에도 저런 병사가 있었나? 듣기로는 군기가 빠져 엉망이라고 하더니. 죽을 걸 알면서도 저렇게 당당한 태도라니. 병사인데도 명예를 아는군. 조금 아깝군 그래.’
생각과 달리 블라도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시작될 싸움을 지켜봤다.
“이야압!”
첫 공격은 스탄다비아 병사였다.
그는 자신의 목까지 오는 길이의 거대한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으며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공기를 가르고 오는 묵직한 파공음에 알리사 병사는 막지 않고 피했다.
쾅!
롱소드가 바닥과 부딪치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흥, 바보 같은 놈. 패기 있게 나서 길래 실력이 있는 놈인지 알았더니, 단순한 멍청이였구나. 롱소드로 돌바닥을 내려치다니. 이미 네놈의 무기는 휘어 졌을 테니, 이 승부는 빤하겠군. 모두 네놈의 책임이니 죽어도 나를 원망하지 말도록!”
알리사 병사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날렵해 보이는 검이 스탄다비아 병사의 허리를 노리고 빠르게 다가갔다.
깡!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치고 중량이 가벼운 알리사의 검이 튕겨 나갔다.
“흥, 제법이구나. 휘어진 롱소드로 내 검을 막아 내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롱소드가 휘어지다니.”
스탄다비아의 병사가 잘 보라는 듯이 롱소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얼굴엔 대단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알리사 병사는 놀란 듯 곧바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과할 정도의 침을 한 번에 삼킨 그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