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외면
분명 돌바닥과 강하게 부딪친 걸 봤는데도 그의 롱소드는 멀쩡했다.
오히려 롱소드에 맞은 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
자신의 상식으로,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단한 돌을 힘껏 내려쳤는데, 롱소드에 아무런 상처가 없다니.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검을 살폈다.
“헉!”
목숨처럼 아끼던 자신의 검이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칼날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의 검은 일반 병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달랐다.
최고의 대장장이에게 의뢰해서 만든 검으로, 웬만한 기사가 사용하는 검보다 좋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검이 단 한 번의 부딪침에 큰 상처를 입었다.
“푸하하하하하!”
놀란 알리사 병사를 보고 스탄다비아 병사가 크게 웃었다.
“어떻게 그런 무기가 있을 수가 있지? 그것도 기사도 아닌 일개 병사가 가지고 있다니. 그렇구나. 당신은 병사가 아니었어. 우리를 놀리려고 변장을 한 기사인가? 기사란 작자가 행동이 이렇게 가볍다니. 당신은 명예가 뭔지도 모르나? 이런 후안무치한 작자 같으니라고.”
알리사 병사가 오히려 스탄다비아 병사를 향해 크게 꾸짖었다.
“무슨 소리야? 난 자포리자 영주님의 충실한 병사 호드란이다. 영주님의 은혜를 받아 이런 훌륭한 무기를 받았지. 나뿐만 아니라 모든 병사가 강철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하늘이 너희들의 악행에 노하시어 영주님께서 축복을 내리셨다. 알리사에게 지금까지 당한 모든 치욕을 몇 배로 돌려줄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너희들의 목숨이다!”
호드란이 성난 황소가 돌진하듯 달려들며 롱소드를 휘둘렀다.
챙, 챙, 챙!
둘의 칼날이 부딪치며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분명 실력은 알리사 병사가 위였다.
하지만 몬스터와의 실전에서 실력을 닦은 호드란도 만만치 않았다.
변칙적인 공격과 몸놀림으로 한 번씩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미 실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는, 목숨을 건 싸움에서도 평소와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낼 수 있었다.
그에 반면 알리사 병사는 검술을 닦기 위해 일평생 노력했지만, 실전이 주는 압박감에서 아예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가진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한 채 서서히 뒤로 밀렸다.
‘제법이구나. 실전에서 저렇게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이다니. 나 또한 누구보다 많은 실전을 겪었다고 자부했지만, 저자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구나.’
매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스탄다비아 병사이기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알리사 병사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싸움이 시작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방어를 하기에도 급급한 모습이었다.
호드란은 우세한 무기와 실전에서 닦은 대담한 몸놀림으로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알리사 병사는 몸의 힘을 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이려 노력했지만, 순간순간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 너의 움직임이 나보다 자연스럽고 대담하긴 하지만, 내가 못 막을 정도는 아니야. 지금은 방어에 모든 힘을 쓰고 있지만, 이대로 시간을 보내기만 한다면 분명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알리사 병사는 열세인 상황임에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굉장한 싸움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해 있었다.
검에 모든 인생을 걸은 자다운 모습이었다.
긴장으로 무리하게 힘이 들어갔던 근육이 점점 싸움에 적응해 나갔다.
그의 행동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로의 무기가 부딪쳐 갈수록 그의 검은 점점 약해져 갔다.
상처 입은 칼날은 무뎌지고, 열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은 금이 가고 깨져 나갔다.
아무리 뛰어난 대장장이가 만들었다고 해도 지금의 기술로는 이게 한계였다.
날카롭던 칼날이 충격으로 여러 군데가 움푹 파이고, 휘어지는 바람에 공기의 저항을 만들어 냈다.
휘어진 검은 휘두를 때마다 검신이 휘청이며 춤을 췄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게중심이 틀어진 검은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고도 남을 정도의 큰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쟁그랑!
알리사 병사의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졌다.”
그는 지금 싸움의 결과에 승복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커다란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난 알리사의 병사 탄두스다. 이 싸움이 이기고 지든 난 이 자리에서 죽을 결심이었다. 어차피 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내 명예를 지키고, 가치 있는 죽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오히려 싸움에 진 지금은 도저히 죽을 수가 없다. 난 강해지기 위해 평생 검술을 연마했다. 이 검을 사기 위해 10년간 모은 돈을 모두 써야 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무기 때문에 졌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다. 이 싸움은 분명 내가 졌다. 난 지금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같은 검으로 싸울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스탄다비아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 지금은 알리사의 병사이지만 나의 직업은 용병이다. 사정상 알리사의 잠깐 몸을 의탁하고 있었을 뿐, 누구에게도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다.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지금도 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지금까지 정의에 어긋난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기회를 달라는 지금의 내 행동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당장이라도 내 목을 벤다면 반항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검을 사랑하는 검사로서 오늘 진정한 검을 만났다. 나도 그 검을 가지고 수련하고 싸울 기회를 달라. 대신, 나의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
탄두스가 복종의 의미로 무릎을 꿇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샤트론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놈이. 너의 임무는 나를 지키는 것이다. 얼른 일어나 싸워라! 이 개자식아, 당장 일어나지 못해?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너의 가족 모두 비참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샤트론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탄두스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흥, 나의 역할은 너 같은 하인 놈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나밀에게 기생해 온갖 해악을 부리는 너 같은 놈을 지키는 일이라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방금 나의 말을 듣지 않았느냐? 원래 용병이었다고. 알리사에는 내 가족이 없다, 이 멍청한 자식아.”
탄두스의 말에 샤트론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탄두스만 빼고 모두 죽여라. 그리고 저놈은 살려서 너희의 원한을 풀어도 좋다.”
블라도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재빨리 뛰어나갔다.
긴 창이 뻗어 나와 알리사 병사의 복부에 파고들었다.
창을 보던 탄두스의 눈이 커졌다.
창 자루가 강철이었다.
이 시대의 병사들의 창은 철을 아끼기 위해 창날에 나무를 끼우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다 보니 창을 가진 상대와 싸우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개개인의 가진 양의 차이일 뿐, 호흡을 통해 몸속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마나는 신체 능력을 올리는 또 다른 힘이었다.
아직 마나를 깨우쳐 기사가 되지는 못했으나, 몸속의 마나를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런 그가 싸움 중 창 자루를 부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몇 번 칼과 부딪치면 아무리 단단한 나무라도 깨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잘라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창 자루가 강철이라면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탄두스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저런 창을 가진 상대와 어떻게 싸워야 하지.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와 거리를 좁혀 나가는 수밖에 없어 보이는데. 상대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뚫으며 들어가야 한다라…….’
강철 창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긴장부터 됐다.
병사 중에서는 누구보다 검술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자신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스탄다비아 병사들의 창이 모두 저렇다면, 이번 영지전은 알리사에겐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 될 것이었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좁은 복도에서 모든 공간을 점유하고 찔러 오는 여러 개의 창을 상대할 방법은 없었다.
살아 있는 이는 샤트론과 탄두스뿐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확연히 달랐다.
탄두스는 검에 미친 자답게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기대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에 반면 샤트론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오줌을 지린 듯 바지는 축축이 젖어 있었으며 지린내가 진동했다.
“이런 더러운 새끼.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 기대해도 좋아. 우리 아주 행복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아 보자. 절대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너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애석하게도 네놈을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일단 도망가지 못하게 너의 발목과 손목의 힘줄을 모두 자를 거야. 그리고 마을 중간에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다가 묶어 둘 거야. 너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해. 아주 짜릿할 거야, 하하하하! 지금까지 사절단이 저지른 모든 죄를 네놈이 갚아야 할 거야. 마지막으로 너의 더러운 몸뚱이는 내가 직접 불에 태울 거야. 물론 산 채로. 우리의 처절한 원한을 몸으로 직접 겪어 봐라.”
샤트론은 거의 혼이 나가 있었다.
현대와 다르게 이곳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잔인했다.
호드란의 말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실행될 것이다.
병사들은 샤트론을 끌고 내성 밖으로 나갔다.
“잘 봐라. 네놈의 미래일 수도 있으니.”
샤트론은 지금 보이는 광경이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아니, 외면하고 싶었다.
성의 앞마당에서 팔과 다리가 잘린 나밀이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꽁꽁 묶여 있었다.
그의 참혹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헤어진 지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의 머리는 새하얗게 세 버렸으며, 얼굴은 10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던 그의 얼굴은 가뭄이 지속된 논처럼 쩍쩍 갈라져,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졌다.
초점 없는 눈은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고통에 정신을 놓아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입고 있던 화려한 디자인의 옷은 그가 흘린 피로 검붉게 변해 있었다.
“내가 최소한 저놈보다 두 배의 고통을 약속하마.”
자신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리는 병사의 말이 천둥 치듯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이 저릿하고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아아아아아악!”
샤트론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잘 봐, 개새끼야! 미래의 너의 모습일 테니.”
호드란이 샤트론의 턱을 힘주어 잡아 고개를 돌렸다.
샤트론은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늘 운이 좋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인생의 말로가 이렇게나 비참할 줄이야.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제발 꿈에서 깨어나게 해 줘!’
아무리 외면해도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껏 쾌락을 위해 학대했던 여인들의 얼굴이 한 명 한 명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배 밑에 깔려 제발 살려 달라고 빌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악귀의 형상으로 변해 자신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손에 죽음을 당한 몇 명의 여인들은 마음껏 자신을 향해 비웃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