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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61화 (61/300)

[61화] 따뜻한 차

“저놈을 알리사 영지에 버리고 와라.”

자포리자의 명령에 병사 한 명이 나밀이 탄 말을 끌었다.

처참하게 망가진 나밀이 이곳을 벗어났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나밀을 향해 혐오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단 한 명은 달랐다.

샤트론이었다.

그는 오히려 부러운 눈으로 멀어져 가는 나밀을 바라봤다.

저런 비참한 나밀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처지와 바꾸고 싶었다.

스탄다비아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이 모든 건 경일로 인해 시작된 변화였고, 그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단지 신체 능력의 향상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 *

[힘이 3 올랐습니다.]

[민첩이 3 올랐습니다.]

[체력이 3 올랐습니다.]

[마나가 3 올랐습니다.]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보였다.

“영주님도 대단하시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정진하다니. 어떠한 역경과 맞닥뜨려도 싸워 나가는 강한 용기와 힘은 정말 배우고 싶을 정도야.”

눈앞의 메시지는 스탄다비아가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경일은 자신의 신체 능력이 올라가는 것보다 스탄다비아가 오랜 정체를 깨고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더 기분이 좋았다.

오늘도 즐겁게 장사를 마친 그는 곧바로 던전으로 향했다.

그가 던전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여유로움이었다.

던전에 들어와 거처로 걸어가며 보는 이름 모를 꽃과 여러 식물은 한없이 한가로웠다.

지금 생각하는 근심, 고민, 욕심이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다.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도 느긋해 보였다.

“던전은 엄마의 품 같아. 어려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돌아가신 엄마의 품이 분명 이랬을 거야. 따뜻하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경일은 집으로 갈 때마다 다른 길을 이용했다.

사람이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던전이라 자신이 걸어가는 곳이 길이었다.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자연은 늘 좋다니까.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고.”

이런 경일이라도 매일 들려 쉬었다 가는 곳이 있었다.

곧은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었고, 나무들 사이에는 한 종류의 풀이 넓게 자리한 군락지였다.

작은 길쭉한 모양의 잎을 가진 풀로, 바닥의 흙이 보이지 않을 정로 촘촘히 붙어 자랐다.

풀에서 나는 향기에 이끌려 이곳에 오게 되었다.

시원하면서도 뒤에는 상큼한 향이 났다.

“냄새가 너무 좋다니까. 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자연과 향기를 즐기다 보니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경일은 아예 작은 벤치를 하나 가져다 놓고 이곳에서 쉬었다 가는 일이 많았다.

이곳에 있다 보면 온몸이 나른해지고 절로 졸음이 왔다.

스트레스가 절로 풀리는 기분이라고 할까.

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체험할 수 있는 곳 같았다.

주폭과 양아치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이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벤치에서 잠깐 쉬었다 갈 생각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 버렸다.

한 시간가량을 푹 자고 일어났는데 기분이 무척 좋았다.

가족들과 즐겁게 지냈을 때의 행복함이라고 할까.

첫눈에 반한 여인을 만났을 때의 설렘이라고 할까.

그런 기분 좋은 흥분이 남아 있었다.

“신기하네. 살짝 몸에 열기도 느껴지고, 조금 달아오른 듯한 기분인데. 이런 느낌이 그리웠어. 막 행복해지고, 조금은 흥분되고, 마음이 솜털처럼 가볍잖아.”

던전에서 잠시 졸은 덕에 분식점을 여는 시간이 조금 늦어졌지만, 아까의 좋은 기분이 남아 있어 하루를 밝은 기분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름 모를 풀이 모인 군락지에서 쉬는 시간이 늘어났다.

풀을 의식한 뒤로는 던전의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는 것을 알았다.

농경지 바로 옆의 풀밭에도, 아궁이 근처의 한구석에도 어디든 자라고 있었다.

경일은 작은 풀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어느 날, 문득 작은 호기심이 생겼다.

“냄새를 맡는 것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먹으면 더 좋지 않을까?”

경일은 풀잎을 하나 떼서 입에 넣고 씹었다.

다른 식물의 잎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맛이었다.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름 없는 풀을 먹었습니다. 좋은 꿈속으로 당신을 안내합니다.]

“이게 뭐지? 좋은 꿈속으로 데려간다고? 아, 그래서 이곳에서 잠을 자고 난 뒤 기분이 그렇게 좋았구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좋은 꿈을 꾸었던 게 틀림없어. 그때의 좋은 기분이 무의식에 남아 있어서 잠을 깬 후에도 그렇게 기분이 들떴구나.”

경일은 풀잎을 몇 개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매일 자기 전 몇 개의 잎을 먹고 잠을 청했다.

그 뒤로 악몽을 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좋은 꿈을 꾸기 위해 잎을 먹는 건 좋았지만, 초식동물도 아닌데 생으로 먹는 건 조금 고역이었다.

“좀 더 편하게 먹을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생각한 게 차처럼 우려서 마실 생각을 했다.

풀잎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물기를 말렸다.

달군 솥에 풀잎을 타지 않게 신속히 덖었다.

덖은 풀잎을 손으로 한 번 비비고는 골고루 펼쳐 널어 식혔다.

이 과정을 두 번 정도 더해 주고 볕이 잘 드는 곳에 풀잎을 건조했다.

말린 잎을 이용해 차를 우렸다.

작은 양에도 잎은 물에 잘 우러났다.

“음~”

차에서 나는 향기가 썩 괜찮았다.

채소를 데친 듯한 뒤에 구수한 맛이 올라왔다.

“괜찮은데? 이건 차로 마셔도 좋겠어.”

처음 먹어 본 차지만 매력이 느껴졌다.

얼마 뒤, 동네 분식의 매대 위에 두 개의 보온 통이 들어섰다.

하나의 보온 통에 뜨거운 차가, 나머지 보온 통엔 냉차가 들어가 있었다.

“사장님, 이건 뭐예요?”

출근하는 길에 커다란 보온 통을 본 이미순이 물었다.

“친구가 시골에서 만든 특제 차입니다.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든 거라 맛이 괜찮을 겁니다.”

“마셔 봐도 되요?”

“그럼요.”

이미순은 뜨거운 차를 선택해 마셨다.

“어머, 맛있다. 녹차보다 훨씬 나은데요? 앞으로 물 대신 차를 내실 거예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분식점에서 차라니. 역시 사장님은 대단하시네요.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겠어요.”

“하하하, 손님들이 좋아해 주시면 저야 좋죠.”

“언니가 빨리 오라고 해서 이만 가 볼게요. 저녁에 다시 올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이름 없는 풀을 먹었습니다. 좋은 꿈속으로 당신을 안내합니다.]

이미순의 머리 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워낙 밝은 사람이라 도움이 될까 모르겠네. 미순 씨는 꿈도 쾌활할 거 같다니까.’

경일이 보온 통을 분식점 안에 설치하지 않고 매대에 설치한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손님들과 자신의 입장에서는 분식점 안에서 관리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하지만 매대에 굳이 설치한 건, 지금 같은 경우 때문이었다.

“저기 사장님, 물 한잔 마셔도 될까요?”

할머니 한 분이 조심스럽게 경일에게 부탁했다.

“그럼요, 할머니. 편하게 드세요. 뜨거운 건 이 통에 있는 걸 드시고, 차가운 건 이 통에 있는 걸 드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삶의 굴곡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깊은 주름은 그녀의 인생이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굽어진 허리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폐지를 주어 생활했다.

산동네 특성상 비탈길을 온종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젊은 사람도 힘들 건데, 할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폐지를 찾아 동네를 돌아다녔다.

이곳에는 할머니와 같이 힘든 사람들이 많았다.

경일이 아무리 싸게 음식을 팔아도 한 끼를 사 먹는 것도 부담으로 다가올 만큼 가난했다.

분식점의 특성상 거리를 볼 일이 많아서 그런지, 가난한 사람들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매대에 차를 담은 보온병을 설치했다.

좋은 차를 대접하고 싶은 경일의 마음이 녹아 있었다.

김복례는 장바구니 카트를 끌고 다녔다.

폐지를 담을 수 있는 양은 적었지만, 힘이 부쳐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작은 수레를 끌고 다녔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부쩍 힘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수입이 확 줄어들었다.

더 많은 거리를 돌아다녀야 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수레를 끌고 다닐 때만큼은 되지 않았다.

구부정한 허리로는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걷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가끔 경일과 같은 친절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못 사는 동네지만 일부러 폐지를 모아 꼭 자신에게 주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온종일 돌아다녔지만 손에 쥔 건 몇 푼 되지 않았다.

힘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맨밥에 물을 말아 삭은 김치에 대충 식사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낮에 분식점에서 먹은 차가 생각났다.

“뜨거운 차에 찬밥을 말아 먹어도 맛있겠는걸.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차를 마셔 봤어. 총각이 싹싹한 게 참 좋았지. 내일 차를 좀 얻어 가도 괜찮을까?”

평소와 다르게 빠르게 잠이 찾아왔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 한참을 뒤척거리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오늘은 바로 잘 수 있었다.

그녀는 30년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면 50년은 젊어 보였다.

단출한 옷차림과 더불어 자연스러운 내적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 만한 인상에 넉넉한 마음을 가진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가 청소 중인 거실은 전체적으로 따뜻한 화이트 벽에 원목 가구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듯 밝고 따뜻한 느낌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청소가 끝나고 히비스커스 차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남들은 모두 커피를 마셨지만, 그녀는 늘 차를 마셨다.

젊었을 때부터 커피보다는 은은한 차가 더 취향에 맞았다.

차를 즐기는 것은 그녀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기도 했다.

맛뿐만 아니라 차가 주는 따뜻함과 경건한 느낌이랄까, 그런 것이 좋았다.

그녀만의 공간에는 잘 정돈된 책장의 책처럼 여러 종류의 차가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 배고파요.”

학교를 다녀온 아들이 밥부터 찾았다.

“민재야, 집에 들어오면 손하고 발부터 씻어야지.”

“배고픈데 밥부터 먹고 씻을게요.”

“안 돼.”

아들은 어쩔 수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보, 다녀왔소.”

“딱 맞춰 왔네요. 밥 차리는 중이었는데.”

“하하하, 당신이랑 민재랑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일찍 왔지.”

“민재 나오고 나면 손부터 씻어요.”

“그래.”

그녀는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는 이때가 가장 행복했다.

“여보, 당신이 끓인 이 된장찌개가 난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이대로 먹기에 아쉬우니 딱 한잔만 할게.”

“딱 한 잔만 먹어요. 요즘 너무 자주 마시는 거 알고 있죠?”

“그럼, 조금만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 오늘 새로운 게임 나왔는데, 인기가 장난이 아니야. 친구들이 난리야. 내 용돈 모은 거로 사도 되지?”

“네 용돈이니 사도 되지만, 적당히 해야 해. 온종일 게임만 하고 있으면 엄마가 압수할 거야.”

“알았어. 다른 집 엄마들은 무조건 못 하게 하는데, 엄마는 이래서 좋아.”

“나도 네가 다른 집 아이들처럼 공부를 잘했으면 다른 집 엄마처럼 말리겠는데. 넌 아빠를 닮아서 공부 머리는 없는 거 같으니, 다른 경험이라도 많이 해 봐야지.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걸 찾으려면.”

“아니, 또 왜 그래? 나 민재 나이 때까지는 공부 잘했어.”

“아빠, 거짓말 말아요. 저번에 아빠 친구분들이랑 집에서 술 드실 때 공부 제일 못했다고 한 거 다 들었어요.”

“크~ 그놈이 엉뚱한 소리를. 하여간 친구 놈 때문에 아들 앞에서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네.”

“호호호호.”

거뭇거뭇 수염이 나기 시작한 아들은 다른 집 아이들과 다르게 살가운 면이 많았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점점 대화가 사라져 간다는데, 자신의 아들은 그런 게 없었다.

남편도 성실했고, 걱정거리 하나 없는 삶이었다.

아들은 커 가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공부 머리는 없었지만 다른 쪽으로 재능이 있었다.

남편은 여전히 다정했고, 그녀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저런 남편과 아들이 있는 그녀의 인생은 참으로 행복했다.

늘 다음 날은 눈뜨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든 그녀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한 번씩 진한 웃음을 짓는 게 무척 행복해하는 얼굴이었다.

맑고 투명한 작은 물방울이 감고 있는 그녀의 눈꺼풀을 뚫고 나와 깊고 굴곡진 주름을 따라 흘렀다.

이미 말라 버린 그녀의 눈물샘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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