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영지전 (1)
그녀가 사는 단칸방의 작은 창이 서서히 밝아져 왔다.
어둠이 차지하고 있던 세상이, 조금씩 밀려오는 빛에 서서히 물러나는 시간.
아직은 밤의 짙은 어둠이 훨씬 가까운 정도의 어두움 속에서 그녀는 눈을 떴다.
김복례는 오늘만은 잠에서 깨어난 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가족을 몬스터에게 잃고 나서는 다음 날 눈을 뜨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다.
근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분명 꿈을 꾼 거 같았는데,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가슴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행복의 파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제의 아침과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난방비를 아끼려고 켜지 않은 방바닥은 여전히 차가웠고, 아무리 청소해도 사라지지 않은 곰팡이 냄새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그녀의 기분이었다.
“여보, 민재야. 머리가 맑아서 그런지 오래간만에 얼굴이 또렷이 기억이 나네. 얼마 만인지 모르지만, 정말 행복해. 내일도 이렇게 얼굴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어.”
그녀는 가만히 앉아 날이 밝아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밥을 먹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먹을 게 없다 보니 자연히 아침을 먹지 않는 습관이 들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이 시간이 가장 싫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아침은 또 다른 죽음의 세상 같았다.
끔찍한 몬스터만이 존재하는 지옥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아침은 달랐다.
세상이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던 남편과 아들이 그녀의 마음에 있었다.
동이 터 오자, 그녀는 구부정한 허리를 한 채 집을 나섰다.
새벽이라 아직 추웠지만, 무덤 같은 집보다는 밖이 한결 나았다.
집에서 쉬는 것보다 거리에서 쉬는 것을 더 선호했다.
눅눅한 집안의 곰팡이 공기보다 상쾌한 새벽 공기가 훨씬 좋았다.
그녀가 움직이는 기본 동선에 변화가 생겼다.
평소 잘 지나가지 않던 동네 분식이 동선에 들어갔다.
경일은 한창 장사 준비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일찍 왔구나.”
첫 손님도 오지 않는 장삿집에 자신 같은 사람이 먼저 가면 분명 싫어할 것이다.
그녀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할머니!”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아닌 줄 알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먼저 찾는 건 생소한 경험이었다.
“할머니!”
소리는 다시 한번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리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니, 경일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웃는 모습은 경계심을 해체하는 효과가 있었다.
김복례는 경일의 웃음에 이끌려 동네 분식으로 다가갔다.
“할머니, 어서 오세요.”
경일이 햇살 같은 웃음으로 그녀를 환영했다.
‘이럴 때면 헌터라는 게 참 다행이구나. 하마터면 할머니를 이대로 보낼 뻔했잖아.’
정신없이 재료 준비 중이던 그는 스치는 눈길에서 할머니를 발견했다.
“할머니, 이거 가지고 가세요. 오늘 할머니가 오실 거 같아서요.”
수줍게 웃는 경일이 한쪽 구석에 정리해 둔 라면 박스를 가지고 왔다.
그는 재빨리 할머니의 카트에 차곡차곡 쌓았다.
“안 이러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저를 대신해 박스를 치워 주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아 참, 이거도 가지고 가세요. 집에 안 쓰는 보온병이 있어서 가지고 왔어요.”
“이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할머니, 얘도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 주인 만나서 이쁨 받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 전 앞으로 쓸 일이 없을 거거든요. 여기 차도 담아 놨으니 가져가서 드세요. 그리고 여기 보이시죠?”
경일이 가리킨 건 매대에 설치된 보온병이었다.
거기에 큼지막한 글자가 붙어 있었다.
[공짜예요. 드시고 싶은 분은 알아서 받아 가세요.]
“동네 주민을 위해 만든 거니, 언제든지 오셔서 받아 가세요. 할머니도 동네 주민이시니, 충분히 드실 자격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니에요. 전 뜨거운 물을 부은 거밖에 없어요. 시골에 사는 친구가 남는 차를 보내 준 거라 전혀 부담이 없어요. 친구도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 주면 더 좋아할 거예요.”
김복례는 저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가 차를 먹은 지 오래됐지만, 젊었을 때부터 차를 즐긴 경력이 있어 이 차가 얼마나 좋은 차인지 알고 있었다.
“잘 마실게요, 사장님.”
그녀는 뜻하지 않은 행운이 연달아 찾아온 느낌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더는 행운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어제 몇십 년 만에 맛있는 차를 마셨다.
죽을 때까지 마시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황당하리만큼 쉽게 마실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차를 이렇게 쉽게 마신 것에 현실감이 잠깐 사라질 정도였다.
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몇 년 만에 고통 없이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리고 행복한 꿈까지 꾸었다.
그렇게 싫던 해가 뜨기 전 새벽도 힘들지 않았다.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에 동네 분식을 다시 찾았지만,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좋은 차를 다시금 줄지 의문이 든 것이다.
그런데 라면 박스를 챙겨 주고 새 보온병에 차까지 챙겨 주니, 눈물이 날 것 같이 기뻤다.
꼭 자신을 위한 것처럼, 매대에 놓여 있는 보온병에 적힌 글자에 마음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김복례는 경일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오늘 온종일 마시고도 남을 정도로 보온병은 컸다.
저녁에 찬밥을 말아먹고도 남을 거 같았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 뒤로 경일과 할머니는 빠르게 친해졌다.
차를 먹은 이후로 그녀의 깊은 주름이 조금이나마 펴진 거 같았다.
친해지고 난 뒤로는 할머니를 챙기기가 더 쉬워졌다.
이제는 한 번씩 음식을 챙겨 드려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늘 감사 인사를 잊지 않으시는 할머니가 행복해졌으면 했다.
* * *
“무어라? 이 미친 새끼가!”
알리사 영주 나바론 자작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밀이 한쪽 팔다리와 성기가 잘려서 왔다는 소식에 그는 눈이 뒤집혔다.
“저기… 영주님, 이 편지가 나밀의 품속에 있었습니다.”
집사가 미쳐 날뛰는 영주에게 조심스럽게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를 읽은 영주가 더는 참지 못하고 책상 위의 물건들을 마구 집어던졌다.
“이 새끼가 정말 미쳤구나! 나밀을 팔다리를 자른 것도 모자라 영지전을 승낙한다니! 그래, 좋아. 내가 아주 뼈를 갈아 마셔 버려 주지. 네놈의 영지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리겠어! 칼라일을 불러라!”
“네, 영주님.”
집사는 빠르게 영주의 집무실을 나가 칼라일 기사를 불렀다.
똑똑똑.
“들어와.”
칼라일이 씩씩한 걸음으로 영주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나바론은 칼라일의 듬직한 모습에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는 알리사를 대표하는 기사였다.
그의 강함은 주위 영지에도 소문이 날 정도였다.
싸움에서 선봉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아군의 병사의 사기를 한 번에 올리고, 적군의 병사의 사기를 한 방에 꺾을 수 있었다.
칼라일은 이런 촌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오러 유저 상급이었다.
나바론이 스탄다비아를 압박하면서 매년 거액의 돈을 뜯어 갈 수 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칼라일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병력의 수도 알리사가 세 배 많았으며 칼라일이 있는 이상, 기사들의 싸움도 걱정 없었다.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더군다나 스탄다비아의 병사는 대부분 몬스터의 침공을 막기에도 벅찼다.
그런데 뜬금없이 영지전을 하자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였다.
“칼라일.”
“네, 영주님.”
“자포리자 영주가 영지전을 승낙했다.”
“네?”
진중한 그도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스탄다비아는 몬스터의 침공을 막는 것만 해도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그랬지.”
“결과가 빤한데 영지전을 신청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과 우리의 병력의 차이가 세 배입니다. 더군다나 스탄다비아는 워낙 가난해서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무기조차 공급이 힘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상하지.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해 보니 알겠더군. 자포리자 입장에서는 내가 얼마나 밉겠어. 일 년 내내 몬스터와 싸우면서 겨우 모은 돈으로 기사와 병사들의 장비를 보강해야 할 건데, 그때마다 사절을 보내서 힘들게 모은 돈을 박박 긁어 오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어. 원래 보일가가 대대로 자존심 강한 가문이었어.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가문으로 유명했지. 지금은 저 모양 저 꼴이지만, 100년 전만 해도 우리 스타테인가는 보일가 앞에서 기를 펴지도 못했지. 그런데 지금은 역전이 돼서 우리 가문에 속한 영지 취급을 받고 있잖아. 자포리자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모양이야.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귀족인 자포리자가 매년 우리에게 피 같은 돈을 뜯겨 왔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하지. 하긴, 나라도 벌서 싸웠을 거야. 자포리자가 오히려 오래 참은 거지. 귀족답게 마지막은 싸우다 죽고 싶은 모양이야.”
나바론은 스탄다비아가 강해졌을 거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에서 스탄다비아에 대한 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토지는 척박해서 매년 흉년이고, 일 년 내내 몬스터와 싸워야 하는 가혹한 곳이었다.
전쟁도 돈이 있어야 가능했다.
돈 나올 곳이 아예 없는 곳이라, 이번 영지전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없었다.
설마 다른 세계의 경일과 연결되어 미래 기술인 강철이 자포리자에게 넘어갔을 거라고는 누가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하하하, 아무리 명예가 소중하다고 하지만, 목숨까지 버리다니요. 그렇게 명예가 소중했으면 처음부터 싸웠어야지. 지금 와서 저러다니 참 미련한 작자군요.”
“오히려 잘됐어. 이번에 아주 쓸어버려야겠다. 보일가의 역사는 이제 끝이야. 이전에 무시당했던 조상님들의 원한도 이번 기회에 확실히 풀어 드리고, 이번 영지전으로 우리의 진정한 힘을 주위 영지에 한 번 보여 주자고. 안 그래도 요즘 마음에 안 드는 놈이 하나 있는데, 우리 힘을 보고 나면 끽소리도 못하겠지. 왕국에 귀족이 넘쳐난다는데 내가 애국하는 의미로다 한 명 줄여 주지.”
나바론은 영지전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이미 이긴 것처럼 말했다.
그에게서는 영지전에 대한 긴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놀이동산에 가기 전의 아이처럼 설레 했다.
“저기, 영주님.”
칼라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나바론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봤다.
“굳이 자포리자를 죽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찮은 자가 영주님께 덤벼들어 기분이 상한 건 알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굳이 가를 필요가 있을까요? 이번에 제대로 혼쭐을 내주면 앞으로 고분고분해지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뜯은 돈도 쏠쏠했지 않습니까. 덕분에 우리도 풍족하게 생활했고. 더군다나 스탄다비아는 몬스터의 침입을 막아 주는 완충지인데, 굳이 멸망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자포리자가 원하는 명예로운 죽음을 우리가 굳이 줄 이유가 있습니까? 이거야말로 그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불구로 만들어 기를 꺾어 버리겠습니다. 오히려 그게 영주님의 마음을 더 시원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음…….”
나바론이 칼라일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말을 듣자 고민이 되었다.
성질대로 하자면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칼라일의 의견이 현실적으로 타당했다.
자포리자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기가 꺽힌 자포리자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내 장롱에 게이트가 열렸다